침투(9)
살짝, 당황한다.
현 정세에 관해 뭔가 물어볼 거라고 생각했지, 옛이야기를 꺼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뭘까. 그 시절 이야기라면 대체 어떤 걸 물어보려는 거지?
-류성일…… 과의 협력에 대해 냄새를 맡은 건 아니겠지.
루우는 계속해서 세규의 예상을 뛰어넘는 말을 던졌다.
“그대는 짐을 고려로 데려오기 전에, 타이시 볼로드와 접촉했었지.”
“……그렇습니다.”
“그때 정확히 어떤 말이 그대들 두 사람 사이에 오갔는지, 짐은 알고 싶다.”
공손히 고개를 조아린 안세규의 시선이 바닥 여기저기를 오간다.
그러나 그의 기민한 두뇌는 황제에게 알릴 정보와 알리지 말아야 할 정보를 빠르게 편집해, 입으로 보내고 있었다.
“제가 폐하를 모시러 몽골에 들어가 볼로드와 접촉했을 때, 볼로드는 이미 저의 의도를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폐하를 고려의 황제로 옹립한다. 그리하여 정치체제 상으로는 완전한 민주정에서 입헌군주정으로 한 걸음 물러서지만,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고려의 민심을 장악하고 정계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는 그도 짐작했던 듯합니다.”
루우는 가만히 듣고만 있다.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는다.
의심의 시선이 머리에 내리꽂히는 것만 같은 이 느낌은, 그저 세규의 염려가 너무 깊은 탓일까.
아니면 세규의 본능이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
루우는 뭔가를 의도하고 있다. 그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침묵이 이렇게 길어지지 않는다.
좀 더 많은 정보를 내놓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세규는, 말을 이었다.
“당시 볼로드는 대단히 모호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하긴 시레문 카간께서 직접 그 자리에 나와 계신 건 아니었어도, 제국의 ‘후계자’ 문제를 함부로 거론하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는 어떤 면에서 보면 ‘여자이면서 불필요하게 야심이 큰 공주에게, 고려 황위를 넘겨주어 그걸로 만족하게끔 한다’는 식의 태도를 보였죠.”
아들이 없는 시레문의 후계자는 그 아우인 게레센제나 울제이가 되어야 한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복잡한 상황이건만, 쓸데없이 야심많은 공주가 끼어들면 일이 복잡해진다.
자칫하면 보르지긴 황실의 추태만 잔뜩 드러내겠지.
그래서 골칫거리 공주를 밖으로 치워버린다. 대충 ‘고려 황제’ 정도면 루우도 만족하고, 몽골 황위도 포기하지 않을까. 그런 계산으로.
‘외부인들의 눈으로 보기엔’ 그런 해석이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흘러가는 정세를 보아서는 전혀 다른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여성이신 폐하께 ‘고려’라는 강국을 기반으로 드려서, 향후 몽골 황위에 오르시는 데 차질이 없도록 한다는…… 그런 원대한 계획을 품고 있었던 것이 아닐지.”
“확실히 짐도 이번에 볼로드와 만나 대화를 나누며 느꼈다. 그자는 보르지긴 황실이나 카간 개개인보다도, 그 자신의 권력보다도 중세 ‘다이온’ 시절에 버금가는 강대국을 건설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더군.”
세계대전 같은 비극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중세의 유산에서 찾다니 어지간히 시대착오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생각이 들긴 하지만 루우도 그럴 처지가 아니긴 하다.
그녀도, 견하도, 그 한재연이라는 자도 실컷 중세의 유산을 이용하려 하니까.
다만 다이온이라는 중세풍 포장지로 근대 국가를 감싸려는 루우나 견하와 달리, 볼로드는 내용물에서도 중세적이라는 게 문제다. 사회주의가 대두하고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높아져 가는 시대에, 여전히 초원 귀족의 눈으로 국민이 아닌 ‘신민’을 바라본다.
볼로드는 루우의 지지파라고 할 수는 있지만…… 그 한계가 명확한 사람이다.
그러나 볼로드의 처분은 나중에 생각할 문제다. 루우가 오늘 세규를 여기 부른 건, 지금 한 이야기 ‘너머’에 있는 것을 묻기 위함이다.
세규는 지금까지 황제와 나눈 대화를 통해, 그녀가 지금 자신의 황제 즉위 배경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루우에게 그건 어쨌든 상관없는 문제였다. 그녀는 고려에 오는 것만 볼로드와 안세규의 힘을 빌렸을 뿐, 본인이 태사 미리안에게 접촉해 황제의 자리까지 직접 걸어갔다.
미리안이 갑자기 황제 지지를 철회하거나 하지 않는 이상 볼로드와 안세규가 루우를 두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오판 때문에, 세규는 루우가 다음 순간 던질 질문을 예측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대와 볼로드는 짐만을 두고 거래하진 않았을 터. 그 외에 어떤 거래를 했던가.”
세규의 눈이 커진다.
뭐지? 뭘 알고 있는 거지? 볼로드와 만나서…… 뭔가 이야기를 들었나?
볼로드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까지는, 아무리 세규의 정보력이 뛰어나도 알 수 없다.
게다가 루우와 볼로드가 이야기하던 시기는 칸발리크가 극도의 혼란에 빠졌을 때다. 칸발리크에 펼쳐둔 구 민국정부의 정보망도 제대로 작동할 수가 없었다.
계산할 수 없다면, 여기서 시치미를 떼는 것만큼 위험한 건 없다.
황제가 자신을 떠보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지만, 그보다는 이미 알 건 다 알아낸 상태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고 생각하는 게 좋겠지.
여차하면 황제를 기만했다는 격노가 쏟아질 것이다. 옛날, 황제가 전제군주였던 시대처럼 세규의 목을 치진 않겠지만, 황제는 다른 방식으로 세규를 몰락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황제의 격노, 그 분노의 원인을 언론에 흘려, 세상 사람들이 세규를 손가락질하게 만든다든가.
황제를 능멸한 놈이 무슨 당수며, 내무장관인가. 저런 놈은 당장 물러나야 한다.
시위가 벌어질 테고, 그때를 틈타 조유관은 좋다고 고려국민당의 당권을 장악하거나 국무회의에서 자신을 탄핵할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식은땀이 흐른다.
그러니 여기서 최선의 선택은, 솔직하게 답하는 것.
“이단, 특히 인위적으로 이단을 양성하는 기술 일부를 받았습니다.”
볼로드는 아마도 고려민국 임시정부가 고려 내 다른 정치세력들과 대결해가며 루우를 황제로 옹립하기엔 전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사람 수와 화력이 부족하면, 다른 분야에서 전력을 보강하면 된다.
그래서 이단 전력이라도 보강하라는 의미로, 그때까지 몽골이 축적한 이단 관련 기술을 전수하고 장비도 일부 내주었다.
그 결과……
“1929년 4월, 태사가 지금의 류성일 법무장관이 있던 제1대학교 총장실로 피신했던 날. 그날 태사를 습격하고 짐과 싸웠던 암살자들 중엔 이단이 있었어. 그들은 분명 고려민국 임시정부 소속의 이단들이었지. 혹시 그들이, 볼로드와 맺었던 제휴의 결과물인가?”
“……고려민국 임시정부에서 이단이 본격적으로 양성된 시점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주 잠깐 망설이긴 했지만, 세규는 순순히 답을 내놓는다.
“그렇다면…… 볼로드에게서 이단 관련 기술이나 장비를 지원받을 때, 뭔가 ‘특별한’ 걸 더 지원받지는 않았나?”
세규는 아까 자신이 했던 예측이 맞았음을 느낀다. 황제는 지금 알아볼 만큼 알아보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외람되오나, 폐하의 ‘혈액’을 비롯해 폐하의 특수한 이단 능력과 관련된 자료 일부를 제공받았습니다.”
역시, 하는 얼굴로 루우는 고개를 돌린다.
볼로드에게서 듣고 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불쾌감이 가시는 건 아니다.
제국의 공주, 시레문의 딸이기 이전에 그녀는 하나의 실험체에 불과했다. 공주라는 신분이 그녀가 무자비하고 고통스러운 실험 환경에 처하지 않도록 막아주었을 뿐, 그녀의 몸에 대해 할 수 있는 연구는 거의 전부 이루어졌다.
“그 자료들도 민국 정부의 이단 양성에 활용되었는가?”
루우의 목소리가 한층 날카로워졌음을, 그녀 자신과 세규 모두 느꼈다.
세규는 단어와 어조를 신중하게 골라가며 답을 만들었다.
“저는 이단 관련 과학자는 아니기에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추궁하고 어쩌고 할 문제는 아니다. 그 당시에는 루우도 고려민국 임시정부 소속이었고, 그녀 역시 그렇게 양성된 이단들과 함께 손발 맞춰서 여러 가지 임무를 수행했으니까. 이제 와서 남의 일이라는 듯 굴기엔 민망한 일이다.
문제는…… 루우의 ‘피’가 고려민국 임시정부의 이단 양성에 쓰였고, 그것이 돌고 돌아 견하가 이단이 되는 데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는 점이다.
견하에게 일어나는 이상 반응들은, 신종(神種)의 ‘이’가 무리하게 일반인의 몸에 주입된 탓이 아닐까.
견하의 몸은 붕괴하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견하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되지?
루우 자신도 자신의 남은 수명을 장담할 수 없는데, 견하는…….
“구 민국정부가 제국의 정계에 들어온 이후에도 관련 연구가 계속되었나?”
세규는 놀라는 듯한 얼굴을 하더니, 부인한다.
“아닙니다. 이제 고려 제국에서 정상적인 정당 활동을 하게 된 이상, 이단 관련 연구는 더 진행하지 않기로 방침이 정해졌습니다. 이단 양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병을 양성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요. 기존 이단들도 모두 정식으로 군에 편입되었습니다.”
루우는 세규의 이 말에는 거짓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안세규가 이 방을 나서자마자 태사부나 전쟁성을 통해 조사해볼 필요가 있겠어. 내무장관은 일반 경찰들을 통솔하고 있는 만큼, 내무성 안에서 뭔가 꾸밀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짐과 관련된 자료가 있다면, 즉각 전부 폐기하도록. 짐은 다소 특수한 이단이기 이전에 고려의 황제로 있고 싶군.”
안세규는 공손히 명을 받든다. 물론 그도 지금 방을 나서자마자 ‘귀중한 자료를 잃지 않고 보존할 방법’을 고민할 것이다. 그 정도야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남은 건 루우와 안세규 중 누가 더 기민하게 행동하느냐 하는 것뿐.
다시 침묵이 이어진다.
하고 싶었던 질문은 더 있었다.
그러나 그 질문을 하면, 모든 것이 파국으로 치달을까 두려웠다.
첫째, 견하의 집을 습격해 그의 부모님을 살해한 암살자들은, 어디 소속인가.
둘째, 1929년 4월 1일, 태사의 전용열차를 습격한 무리는, 어디 소속인가.
셋째, 안세규와 류성일은 내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제휴해왔는가.
세 가지 질문 모두 위험하기 짝이 없다.
정황에 따른 심증만 있지 문서라든가, 관계자의 증언 같은 것이 없다. 따라서 심증만으로 저 세 질문을 하는 위험을 감수할 순 없다.
저 질문들은, 내전을 끝내고 간신히 평화를 되찾은 고려의 안정을 뒤흔들 수 있으니까.
만약 견하의 부모를 살해한 자들이 허동주의 부하가 아니라 다른 세력…… 이를테면 구 민국 정부나 류성일의 옛 부하들이라면, 고려국민당과 제국입헌당이 손을 잡아 성립한 현 체제 자체가 붕괴한다.
제국입헌당은 고려국민당을 박멸하려 할 것이다. 그러면 어설프게나마 시도된 다당제 민주주의와, 그러한 제도를 통한 안정 역시 박살 난다.
일단 누가 뭐라 해도 주견하가 자신의 권한을 총동원해 고려국민당원의 체포 및 처형에 나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