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투(8)
“개선식은 그냥 자기만족이 아닙니다. 정치적 의미가 있는 행위죠. 물론 그 ‘의미’는 반란군의 잔당을 크게 도발하거나 자포자기하게끔 해서 극단적 행동을 유도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해방자’라는 이름.
카라코룸을 반란군의 손아귀에서 풀어준 자.
내전을 끝낸 자.
몽골에 드리운 어둠을 몰아내고, 밝은 미래를 연 자.
리안과 고려군은 바로 그런 위치에 서야 한다.
라디오나 신문을 통해 입성 소식을 전하고, 그렇게 간접적으로 누가 이겼는가, 누가 주도권을 쥐었는가를 전하는 것도 효과가 아예 없진 않을 것이다. 말은 하지 않더라도 모두들 느끼겠지.
“하지만 ‘눈으로 보이는 것’의 충격은 상상 이상입니다.”
막연하게 내전의 결과를 느끼는 것과, 눈앞에서 고려군이 그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고 당당하게 행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시간과 함께 퇴색되겠지만, 후자는 그날의 선명한 이미지로 뇌리에 박힌다.
소리와 냄새까지 더한다면 더욱 효과적이다.
“승자가 승리를 과시할 때, 물론 패배자들은 충격을 받을 겁니다. 이를 갈고, 복수를 꿈꿀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누가 승자이고 패배자인지 각인시킬 수도 있습니다. 좌절이 무기력으로 이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경우 ‘관용’은 패배자들의 복종이나, 승자와 패배자 간 화해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패배자들은 승자의 관용이 ‘승자가 완전한 승리를 선언하기엔 약해서’ 나타난 것이라 믿는다.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한 패배자가 무서워서’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그런 믿음이나 해석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다.
“카라코룸에까지 그래야 할까? 효과가 있다고 해도 다른 위험성을 모두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는 건가? 감찰국장, 우리는 몇 겹이나 되는 경호를 받고 있지만 밖에 경비 서는 병사들은 아니야. 저 사람들은 누가 와서 폭탄 하나만 던져도 죽어.”
반란군의 잔당 중 한 사람이 조잡한 폭탄을 옷 안에 품고 다가와서 자폭 한 번 하면, 많은 군인을 살상할 수 있다.
카라코룸의 민심은 불안해지고, 동명과 칸발리크 정계도 흔들린다.
“물론 칸발리크나 동명에서는 대대적으로 이번 승리를 선전할 거야. 칸발리크에서는 게레센제나 울제이가 아니라 ‘우리’가 해냈음을 보일 거고, 동명에서는 ‘태사인 내가’ 해냈음을 보여야지.”
옳은 말이다. 칸발리크와 동명에서 미리안이 카라코룸을 제압하고 몽골 내전을 끝냈음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밖에 카라코룸의 안정을 헤칠 수 있는 행위는 불필요한 낭비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더욱, 리안은 ‘해방자’가 되어야 한다.
“잔당들은 이 사령부에서 그런 ‘우려’가 나오고 있다는 걸 잘 알 테니까요.”
합리적 우려는 강점도 될 수 있지만, 반대로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바로 그 부분만 찌르고 들어가면 상대는 계속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으니까.
따라서 다소 피를 보는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카라코룸의 시민들과 숨어 있는 잔당들에게 ‘승리자’가 누구인지 알려야 한다.
견하의 말을 다 들은 리안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인간관의 차이군.”
불필요한 자극이 없다면 불필요한 분쟁도 없다고 보는지.
자극이 있든 없든 멍청이들은 멍청이답게 날뛸 것이고, 어차피 흘릴 피라면 확실한 절망과 공포를 심어주어야 한다고 보는지.
어느 쪽이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다. 두 가지 유형의 인간 모두, 인류의 역사에 늘 있었다.
그때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김천열이 조용히 의견을 말한다.
“제 생각에도 감찰국장의 말이 옳은 듯합니다.”
리안은 김천열에게 말해 보라는 듯 한쪽 눈썹을 올렸다.
“각하께서 앞으로 장기간 카라코룸에 머무신다면야, 시간을 들여 서서히 위엄으로 저들을 누르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리안은 일단 고려로 돌아가야 한다. 제국최고회의에 나가서 이번 몽골 내전에서 고려가 거둔 성과를 보고하고, 앞으로 펼칠 정책을 위한 결의를 끌어내야 한다.
그러고 나서 다시 카라코룸으로 돌아올지는 알 수 없다. 그녀를 대신할 누군가가 파견되어 카라코룸에서의 일을 감독할 가능성이 더 크다.
“저는 각하께서 개선 행진을 하시는 것보다, 여기서 잠시라도 떠나실 때 저들 잔당을 더 크게 자극할 거라고 봅니다.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러니 그 전에 ‘고려군’을 비롯한 연합군의 행진을 한 번 제대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 저들에게 확실한 패배감을 안겨주는 편이 낫다.
누구 한 사람 나서서 그 행진을 방해하지 못한다면, 저들의 무기력감은 더욱 커질 테니 좋고.
입술을 꾹 다문 채 고민하던 리안은,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
전차, 기갑사, 트럭에 매단 견인포. 그 뒤를 잇듯 질서정연하게 들어오는 보병들.
한껏 깨끗하게 빨고 다림질까지 마친 군복을 입고, 손질한 총을 어깨에 받쳐 들고.
전투기 몇 대가 카라코룸의 하늘을 긁듯이, 다소 낮게 날아간다.
군악대가 연주하는 음악은 몽골의 것이지만, 이 행진을 지켜보는 그 누구라도 주역이 고려군임을 잘 알고 있다.
제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견하는 군중 틈에 섞여 그 행진을 지켜보았다. 옆에는 역시 사복을 입은 효윤이 서 있다.
“표정들이 그리 밝진 않네.”
그렇게 효윤은 견하의 귓가에 대고, 몽골어로 이야기했다. 이러면 괜히 고려인 티를 내지 않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몽골어가 어눌해서 의심받을 일도 없다.
어쨌든 몽골인들 사이에 섞여 있으려면 조심해야 한다.
“……그리 어둡지도 않고.”
목소리를 낮게 깐 채, 견하도 몽골어로 대답했다. 그 말을 뱉은 뒤로도 계속해서 분석을 이어나간다.
“밝은 표정을 지을 수도 없고, 마냥 침울해 있을 수도 없을 거야. 밝으면 밝은 대로 공화국 잔당의 보복을 받을지 모르니 눈치를 볼 테고, 침울해 있으면 각 ‘해방구’를 장악한 ‘시민군’의 미움을 사겠지.”
순수하게 내전이 끝났다는 기쁨으로 미소 짓는 군인들과 달리, 시민들은 ‘이제 막 끝난 전쟁’의 여파를 느끼고 있었다.
환호하고 박수치며 꽃다발을 던지는 시민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병사들의 행진이 ‘해방군에 대한 환영’과 맞닥뜨리는 연출을 위해 동원된 사람들이다. 대부분은 일반 시민이 아니라 시민군 소속이었다.
“해방군, 이라…….”
그 속을 알듯 모를듯한 어조로 효윤은 중얼거린다. 견하는 흘끗, 그녀의 옆얼굴을 봤다.
효윤도 고개를 돌려 견하를 본다.
“견하 너는 정말로 리안 언니가 ‘해방자’로서의 명성을 얻길 원하는 거야, 아니면……”
‘아니면’ 뒤에 이어질 말을, 견하는 굳이 자르지 않았다. 차분히 듣기만 한다.
“‘승리자’ 쪽에 방점을 찍고 싶은 거야?”
“……어떤 건 맞고 다른 건 틀렸다, 이렇게 말하긴 어려워.”
고려 국내에 한정해도 그렇다. ‘고려군의 승리’는 국민들에게 쾌감을 안겨줄 수 있다.
동시에 ‘압제에 시달리던 도시를 해방한 고려군’은,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 강국이라는 도덕적 만족감 역시 국민들에게 줄 수 있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승리자’의 면모 쪽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싶어.”
“왜?”
견하는 잠깐 입을 닫았다.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이나 「화림 계획」에 대해, 효윤에게 얼마나 말해도 될까?
지금 효윤에게 하는 이야기는 리안에게 전부 들어가지 않을까?
“……이 도시는, 누나의 것이 될 거야.”
결국 견하는 그렇게 에둘러서 말한다.
효윤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의미야.”
“다이온 연방이 성립하고, 루우가 몽골과 고려 모두의 황제가 되면, 그때는 새로운 수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
그제야 효윤의 눈이 커졌다. 살짝 흔들리던 눈이 과거를 더듬고, 필요한 기억을 찾아냈다.
“전에 한재연이랑 둘이서 카라코룸을 방문한 것도 그 때문이야?”
“그래.”
“실현 가능성은 둘째치고…… 언니가 그런 계획을 승인할까?”
“가능성은 나도 그리 높게 치진 않아. 그저 그런 일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할 뿐이지.”
설령 천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몽골의 ‘또 다른 수도’가 리안의 영향력 아래 있다면 그녀의 권력은 그만큼 커진다.
비유하자면 게레센제가 낭키아스를, 울제이가 키타이를 자신의 영지로 삼고 있듯이, 미리안도 카라코룸을 자신의 영지로 삼는 것이다.
“그러려면 카라코룸을 ‘해방’한 사람이라는 선전도 해야겠지만, ‘승리자’가 당연히 자기 전리품을 취한다는 인식도 사람들 머릿속에 박아둘 필요가 있어.”
효윤은 이제 아예 견하의 눈을 빤히 들여다본다.
견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눈싸움이라도 하듯 그렇게 마주봤다.
그러다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효윤이었다.
“루우의 힘이 그래서 필요한 거구나.”
“여차하면 천도를 밀어붙일 수 있으니까.”
“이 모든 일이 언니를 위한 거야, 아니면 루우를 위한 거야?”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가 모조리 사그라든 것만 같다. 두 사람의 교차하는 시선은 아까 그대로였지만, 견하만은 다소 얼굴이 굳었다.
“……대답해줘.”
효윤이 보기에 지금 견하는 자기가 무엇을 위해서 이런 일들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저 권력을 향한 충동에 몸을 맡긴 채, 필요한 힘을 여기저기서 빌려다 쓰고 있을 뿐이다.
계획적으로 일을 추진하는 것 같지만, 그 추진 동력은 방향성 없는…… 모호한 권력의 추구.
그러니 대답만이라도, 제대로 듣길 원한다.
“당연히 누나를 위한 거야. 뭐 그렇다고 황제를 이용하려 드는 건 아니지만, 이 모든 과정의 끝에는 누나가 있어.”
그 확답에 안심한다. 효윤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방금 그 말, 리안 누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다소 불안한 듯한 소년의 질문이 귀여워서, 효윤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소년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그냥 나 혼자만의 생각이니까 안심해. 하지만 그런 의심 사지 않으려면 이제 대학에서 언니한테 잘해야 할걸?”
***
“내무장관.”
어전으로 들어선 안세규의 두 귀를, 소녀의 조용한 음성이 때린다.
황제가 이렇게 신하와 독대하여 정치에 간접적으로 개입한다는 건, 동명특별시 정계에서는 이제 유명한 이야기다.
안세규도 그런 소문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여기 들어선 이 순간부터, 사람들은 대체 황제와 내무장관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을까 이런저런 추측을 하겠지.
다만 최근 황제 루우는 국무회의나 제국최고회의에 얼굴을 비치지 않고 있다.
아마도 몇 차례 칸발리크를 오가거나 직접 전선에 뛰어드는 식의 ‘직접 개입’은 삼가야겠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어쩌면…… 일단 숨을 돌릴 겸, 황제의 다음 행보에 대한 관심도 잠재울 겸 궁궐 깊은 곳에 웅크린 채, 다음 일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늘 그녀는 세규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까.
“……짐이 오늘 그대를 부른 것은,”
안세규는 긴장하며 귀를 기울인다.
“그대가 ‘고려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시절 이야기를 듣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