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투(7)
주견하가 레오 6세에게 죽음을 권유하고, 레오 6세가 죽음의 절차를 밟는 그 시간에도, 새너두에서 ‘민족 문제’를 다루는 회의는 계속 진행 중이었다.
지겹도록 긴 회의지만, 그런 지겨움을 견뎌내야 할만큼 중요한 문제였다.
귀찮으니 대충하고 넘깁시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레오 6세의 죽음은 주견하 또는 미리안의 독단적 판단이 아니다. 여기 앉아 있는 모두의 동의가 있었기에 진행된 일이다.
그래서 레오 6세 이야기가 나오자 새너두 행궁의 어전에는 잠깐 우울한 분위기가 돌았다.
그런 분위기를 몰아내겠다는 듯, 볼로드는 목소리를 조금 높여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 비극적인 내전 자체는, 일단 카라코룸의 함락으로 끝이 났습니다. 잔당 몇을 토벌하는 일이 남았을 뿐이지요. 이 나라는 곧 정상화될 것입니다. 하지만 키타이와 낭키아스를 몽골화하는 프로젝트의 재가동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겁니다.”
새로운 방향 모색. 새로운 책임자의 임명. 어느 것 하나 쉽지 않다.
“몽골문으로 쓰인 소설이나 시 등의 문학, 몽골의 영화 산업 등에 투자하는 방향도 동시에 진행되고 있지. 그 분야에 대한 평가는 어떠한가?”
“송구합니다만 이 역시 시간이 지나고 봐야 그 성과를 알 수 있습니다. 몽골인들이 평가하기에 높은 예술적 성취가 한족들에겐 성에 차지 않을 수도 있고, 몽골 대중의 취향에 맞는 작품이라도 한족의 대중성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나올 이야기는 다 나왔다.
결국 ‘한족의 몽골화’는 인내심을 갖고, 편의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면서, ‘장기적인 성과’를 기대하며 최소 수십 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진행되어야 할 프로젝트다.
그렇게 당연한 이야기로 끝을 맺을 줄 알았는데, 볼로드가 가만히 의견을 덧붙인다.
“단기적인 통치 효율을 생각한다면, 이라는 전제가 붙긴 합니다만, 다른 의견도 있습니다.”
“무엇인가?”
“한족의 완전한 자치 허용입니다.”
게레센제의 얼굴이 굳는다. 아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참모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그건 절대로 안 될 말이다.”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몽골인의 한화’ 위험이 커진다. 자치를 인정하면 그 외에 다른 권리들도 차례로 인정해야 한다. 한족들이 몽골 본토에 진출하는 일도 종종 일어나겠지.
한족의 문화는…… 화려한 물질문화뿐만 아니라 학문 예술 분야 등 정신적 성취까지, 너무나도 유혹적이다.
인간의 본능은 난세를 꺼리고 치세를 바란다. 평화와 안정이 자리 잡으면 당연히 좀 더 세련되고 화려한 문화가 힘을 얻는다.
그런 인간의 본능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 본능이 유약하다거나 퇴폐적이라며 탄압하려 해봤자 헛수고다.
따라서 한족의 완전한 자치권 인정은, 정상적인 몽골인이라면 그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의견이다. 감정적인 이유에서든, 실리적인 이유에서든.
“하지만 독립을 원하는 세력의 힘은 확실히 한풀 꺾일 것입니다.”
그 말은 맞다. 단기적으로는.
한족들에게 충분한 자치가 인정된다면, 그들의 역사에서 으레 그랬듯이 보르지긴 가문은 ‘새로운 왕조’로서 자리 잡을 것이다.
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천하의 주인이 누구인들 어떠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독립을 원하는 사람보다 많아지겠지.
그러나 그것은 유예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생활 수준이 높아지고 교육을 받아 영리해질수록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마련이다. 말하자면 ‘민족의식’이라는 것이 점점 더 커진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독립을 요구하게 된다. 그런 정책으로는 자치가 아니라 ‘한족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스리는 나라’에 대한 욕구를 막아낼 수 없어.”
그러므로 게레센제와 참모들은, 더 생각해볼 여지도 없는 일이라며 그 대안을 쓰레기통에 처박는다.
“그보다는, 우리가 처한 한족 봉기라는 이 ‘위기’가, 어떤 측면에서는 또 다른 ‘기회’라는 걸 생각해보도록.”
그것은 다른 위기들도 마찬가지로 지니고 있는 성질이다. 위기는 기회다. 얼마나 당연한 진리인가.
긴 이야기 끝에 마침내 게레센제는 본심을 드러낸다.
“이왕 일어난 반란이다. 한족 봉기군도 실패할 생각으로 일어나진 않았을 테지.”
‘끝없는 저항’도 몸이 살아있어야 할 수 있다. ‘저항 정신’을 남기는 것도 소수의 희생자를 대신할 더 많은 상속자가 있을 때나 의미가 있지, 완전히 분쇄되고 나면 그저 한 줌 연기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한족 반군도 이번 기회에 어떤 식으로든 독립을 성취하려고 모든 역량을 다 기울일 것이다. 그걸 진압하는 일 또한 무척 어렵겠지. 허나 진압하는 데 성공만 한다면, 향후 수십 년간 한족 독립운동의 역량을 꺾어버릴 수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지난 이십여 년간 한족들이 끌어모은 인적, 물적 자원을 없애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는 독립을 꿈꾸기 어려울 만큼 무력감을 심어줄 수도 있다.
그러고 나면 한족의 몽골화 정책도 한층 힘을 얻겠지.
“이번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는 국가적 역량을 모두 기울인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
이는 게레센제의 개인 영지인 낭키아스의 발전, 더 나아가 반란 진압 후 높아진 몽골 제국의 위상과 함께 카간 게레센제의 위엄도 드높일 테니까.
“그리고 이 반란의 진압 또한 한족의 교과서에 실릴 것이다. 자신들이 ‘범죄 민족’임을 철저히 자각하게 하라. 그렇게 가르칠 수 있도록 철저히 승리할 방안을 마련하라.”
***
“그냥 사령부를 카라코룸 시내로 옮기는 선에서 마무리 짓지.”
화려한 개선식으로 자신을 과시할 필요는 없다는 게, 리안의 의견이었다.
“칸발리크 테러 이후엔 경제난, 반역자들의 선동에 따른 각종 시위로 많은 상처를 입은 도시야. 내전이 터진 후엔 반란 정부의 각종 통제와 징발에, 우리와 반란군의 교전에 고통받았지.”
상처를 들쑤실 필요는 없어, 라고 리안은 말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카간 충성파인 몽골군도 활약하긴 했지만, 어쨌든 카라코룸 입성을 주도한 고려군은 외국군이다.
“고통스러운 혼돈과 내전의 결과 외국군이 이 유서 깊은 수도에 들어왔다…… 는 식으로 불필요한 굴욕감을 줄 필요가 있을까.”
그 밖에도 여전히 ‘공화국에 대한 충성심을 숨기고 있는 시민들’ 문제도 있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시민들의 상당한 지지를 받으며 성립한 공화국이니만큼 여전히 애정을 품은 자들도 많을 거야. 괜히 그들을 자극해서 테러에 뛰어들게 하는 건 좋지 않아.”
너희가 우리 공화국을 멸망시켜놓고 편히 자게 놔둘쏘냐, 라면서 테러를 벌이는 인간이 과연 없을까?
칸발리크에서 그 정도의 테러를 일으켰던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니만큼, 카라코룸에서도 심각한 테러를 일으킬 능력이 없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 좋겠지.
“저쪽에서 복수를 시작하면 이쪽도 복수하지 않을 순 없어. 그러면 카라코룸 시민은 금세 두 쪽으로 나뉠 테지. 중립인 시민들도 어느 한쪽 편을 들기를 강요당할 거고. 그 결과 거리마다 폭력과 소요가 일어나리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겠지.”
그것은 연합군이 치안 유지에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미리안이 입성 이후 카라코룸을 안정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민들끼리 피로 피를 씻는 보복의 사슬은 끊어야 해.”
지금까지는 반란군의 공격으로부터 시민군을 보호해야 했지만, 이제는 승자가 된 시민군, 그 배후의 사회주의자들이 함부로 날뛰지 못하도록 통제해야 한다.
‘고려 태사가 자신들을 배신했다’는 식으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의 선을 지켜가면서.
무척 어려운 작업이다.
미리안은 장성들에게 엄하게 당부하고, 장성들 역시 그녀의 명령을 꼿꼿한 자세로 경청하고 열심히 부하들에게 하달했다. 그러나 말이란 원래 전달자를 몇 번 거치고 나면 본래의 의미가 희석되기 마련이다.
장성들이야 눈앞에서 미리안의 무시무시한 압박감을 바로 느끼지만, 최전선의 병사야 ‘높으신 분이 그리 말씀하셨나 보군’ 하면서 귀를 후빌 뿐이다.
그러다 보니 작은 실수를 저지른 불행한 희생자 하나를 잡아다 ‘본보기’를 보여서 기강을 잡을 수밖에. 그것도 지나치면 병사들 사이에 반감을 부른다.
균형. 뭐든 균형이 중요하다.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선을 지켜서 상황을 이상에 가깝게 유지하는 것이다.
시민군, 고려군, 반란군 지지세력과 잔당…… 이 세 개의 세력만 얽혀 있다면 상황이 이리도 복잡하진 않았을 것이다.
카라코룸에는 또 다른 세력이 들어와 있다.
“울제이는 키타이로 내려가고 다른 사람이 와서 지휘를 맡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이 도시에서 뭔가 저지르진 않는지 경계해야 해.”
듣는 귀가 있으니 미리안도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리안의 말을 알아들었다.
게레센제 카간. 그가 과연 몽골을 개혁할 의지가 있는가? 시위가 내전으로 발전해 갈 수밖에 없었던, 그 배경을 이해하고 재발을 방지할 대책이 있는가?
“입증된 게 없지.”
그렇다. 무작정 ‘게레센제가 알아서 잘하겠거니’라며 안심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게레센제는 지난 20여 년간 낭키아스의 한족 통치는 성공적으로 유지해왔을지 모르지만, 몽골 본토에서 정치인으로 활동한 경험은 적다.
몽골 내 경제적 격차로 인한 사회 갈등은 그에겐 생소한 문제일 것이다.
물론 한족 중에도 사회주의자들은 있지만, 그들 중 세계혁명을 진지하게 꿈꾸는 이들은 적다. 보통은 민족 독립 문제에 사회주의 혁명 방식을 접목하려는 자들이다.
어차피 키타이와 낭키아스 사회에서 부는 몽골인이나 몽골인에 협력하는 한족들의 것이기에, 빈부격차로 인한 갈등은 그 자체로 몽골인과 한족 사이의 갈등과 같기 때문이다.
즉 이런 환경에서, 한족의 사회적 문제 해결은 ‘몽골인으로부터의 독립이 우선’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게레센제는 이에 대해 한편으로는 ‘친몽파’를 양성하고 회유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강경한 진압을 펼쳐 왔다.
그런데 그런 정책이 같은 몽골인들 사이에서도 통할까.
민족 간 문제도 아닐뿐더러,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모순을 손봐야 하기에 게레센제에겐 생소한 작업이다. 그는 이런 분야에서는 능력을 입증한 적이 없다.
“볼로드도 믿을 수 없긴 마찬가지야.”
지난번 태사급 회담 이후 리안은 볼로드에 대한 평가를 완전히 굳혀버린 듯하다.
“개혁 의지도 없고, 자신이 지금껏 해온 구시대적 발상이 문제가 없었다는 태도로 일관하지. 무엇이 문제가 되어서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어. 그게 정말 모르고 하는 말이어도 태사 자리에 있어선 안 되는 무능함이지만, 알면서 그러는 거면 애초에 정계에 있어서도 안 되는 인간이야.”
몽골이 독립 국가로서 안정되길 바라는 리안에게, 몽골의 불안정을 계속 키워가기만 할 볼로드는 방해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볼로드의 집권 기간을 늘려주자고 고려 제국 장병들이 이런 고생을 하는 줄 아나.”
불만을 좀 쏟아낸 리안은 여하튼, 이라며 화제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여기 우리 사령부의 지휘를 받는 몽골군 말고, 다른 몽골군이 카라코룸에서 무슨 일을 벌일지 안심할 수가 없어. 이상의 이유로 나는 사령부를 카라코룸 시청으로 옮기고 우리 주도 하에 군정을 시작했으면 해. 가능한 한 빨리.”
견하는 그녀의 말이 끝나길 기다리다가 신중한 어조로 의견을 내놓았다.
“각하의 말씀도 옳지만, 저는 누구라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개선식’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화려하지 않고 간소하게 하더라도요. 특히 우리 고려군이 앞장서서 카라코룸 시가를 행진하는 방식으로.”
리안은 갸웃한다. 일단은 그 말을 들어보겠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