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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248화 (248/541)

침투(6)

레오 6세는 구금되어 있긴 했지만, 대우는 나쁘지 않았다. 존경받는 어른이자 성직자였으니까.

방은 넓지는 않더라도 깨끗했고, 식사도 적당히 따뜻하고 맛있었다. 필요한 물건은 웬만하면 얻을 수 있었다.

다만 밖으로 나가거나 편지를 주고받을 수는 없었다. 면회도 허락되지 않았다.

이제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주의 미련한 종이, 주의 뜻을 함부로 짐작하고 행동하다가 이렇게 주의 뜻을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가난을 해결해달라는 시위대를 보호하기 위해 앞장섰으나, 그 행동은 전국을 두 쪽 낸 반란의 기폭제가 되었다.

내전을 끝내기 위해 직접 칸발리크로 가서 카간께 호소하려 했으나, 카라코룸을 빠져나오는 중에 공화국 정부에 발각되었다.

그 후 쭉 구금된 신세였는데, 자신의 감시자들이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소속이 바뀐 건 바로 얼마 전에 알았다.

기도, 묵상, 독서.

레오는 그 세 가지로 천천히 흘러가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 심심한 일상에, 변화가 갑작스레 찾아왔다.

문이 열리고, 낯선 청년이 들어온다.

청년은 통역을 데리고 온 고려인이었다.

“고려의 감찰국장 주견하라고 합니다.”

레오 6세는 고려의 ‘태사부’ 정도는 알 수 있었지만, 감찰국이니 정치경찰실이니 하는 건 잘 모르는 분야였다. 그저 뭔가 자신과 관계가 있는 일을 맡았거니,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두 사람 사이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레오는 궁금해하면서도 함부로 말을 꺼내선 안 된다고 생각했고, 견하는 견하대로 하려던 말을 꺼내기 어려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견하는 레오에게 죽음을 권하러 온 것이니까.

마침내 레오가 온화한 어조로 물었다.

“그래, 감찰국장이라는 분께선 이 늙은이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러 오셨는가?”

그 질문에 청년도 결심을 굳힌 듯, 말문을 열었다.

“전쟁은 사람에게 편을 고르라고 합니다. 잘못된 편을 고른 사람은…… 어떻게 되는지 총대주교께서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레오는 눈을 감았다.

올 것이 왔다. 이 목숨은 주께 맡긴 것이라 항상 생각해왔지만, 두려움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젊은이, 내가 유언을 여기 밖에 있는 다른 이들에게 남길 방법은 없겠지.”

“예. 총대주교께선…… ‘노환으로 돌아가신 것으로 처리’될 예정입니다. 그 전에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실 수는 없습니다.”

내전을 전후한 총대주교의 행보, 그 복잡한 정치적 사정이 밖에 알려지는 것보단 총대주교 한 사람의 ‘조용한 죽음’이 훨씬 파장이 적다.

“그래…… 그렇다면, 유언을 들어줄 사람이 지금 젊은이 뿐이구만. 늙은이의 마지막 하소연을 들어줄 수 있겠나?”

견하는 한숨 한 번 내쉬지 않고, 자그마한 탁자를 사이에 두고 레오와 마주 앉았다.

견하는 레오의 얼굴을 기억하지만, 레오는 루우의 대관식 때 잠깐 스쳐 지나갔던 견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

그래도, 예의는 지키고 싶었다. 그의 삶은 ‘선의’의 연속이 파국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안타까운 사례니까.

총대주교는 고맙다며 살짝 미소 짓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의로운 청년들을 죽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지. 카간의 군과 경찰은 시위를 유혈 진압할 것 같았으니까. 실제로 성당까지 불탔고.”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꼭 레오에게 가해진 카간 정부의 보복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당시엔 카간 정부가 갈 데까지 갔구나, 하고 경악했지만.

“설마 카라코룸 총대주교인 나에게까지 총구를 들이댈까 싶었네. 그러다 내가 죽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그건 카간 정부가 스스로 자신을 끝내기로 한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일 것이라 여겼지.”

레오는 시위대가 카간에게 자기들의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만족하길 바랐다. 카간도 시위대의 목소리를 겸허히 받아들여, 그들을 달래길 바랐고.

그러나 시레문은 ‘반(反) 보르지긴, 반 군주제’ 목소리에 강경하게 대응하는 우를 범했고, 시위대도 그런 강경 대응에 맞서 점차적으로 거친 수단을 택했다.

“끝내 반란과 내전으로 이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네. 아니, 바라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옳겠지.”

“총대주교께선 잘못된 일을 하신 게 아닙니다. 성하께선 그 위치에서 하셔야 할 일을 제대로 하신 겁니다. 문제는…… 성하께서 아무리 올바르셔도, 성하를 둘러싼 정세는 그 올바름을 받아들일 사정이 안 되었다는 거겠죠.”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하지만 나는 남 탓을 할 생각은 없네. 내가 좀 더 주께 간절히 지혜를 구했더라면…… 더 나은 길을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어쨌든 반란은 일어났으니, 레오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움직여야 했다.

당장은 카라코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기로 했다. 그래서 반란군에 저항하거나 그 정권을 비난하지 않고 협력했다.

그러나 범 알타이 인민동맹, 알타이 자유 공화국 정부는 그런 레오의 ‘선의’를 자기네 입맛대로 이용했다.

마치 레오가 카간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공화국을 승인해주기라도 한 것처럼.

“현 카간과 칸발리크 정부 구성원의 대다수, 칸발리크 시민들은 성하께서 그렇게 배신하신 줄 알고 있습니다.”

견하는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담아, 그런 말을 들려준다.

“……이제 와서 실은 배신한 게 아니었습니다, 이러저러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제 의도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라고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나.”

레오의 답은 쓰디쓴 삶을 마쳐야 하는 남자의 체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견하는 그런 레오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슬슬 자기가 여기 온 다른 이유를 꺼낼 때가 왔다고 느꼈다. 이제 레오가 세상을 떠나면 더 물어볼 수가 없으니까.

그는 단순히 레오에게 죽으라고 통보하기 위해 여기 온 게 아니었다.

견하는 탁자 위로 초상화 하나를 내밀었다.

토칸의 몽타주였다. 견하의 진술을 토대로 한 화가가 그린 것이다.

“혹시 이 남자를 아십니까.”

레오는 허리를 숙여 초상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퍼득 고개를 들었다.

“알고 있네. 토칸이라는 청년인데, 반란이 일어나기 전에 카라코룸에서 시위를 주도했던 청년들 중 한 명이지. ……그 청년을 추적 중인가.”

“그렇습니다.”

“성실하고 올곧는 청년인데…… 잘못된 길을 들어선 게 안타깝군.”

견하는 쓴웃음을 지으려다 간신히 삼켰다. 성실하고 올곧다? 성실하긴 할 것이다. 지독할 정도로 꼼꼼하고 성실해서 얼마나 많은 피해를 끼쳤던가.

하지만 올곧은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토칸은 여기 카라코룸에선 성실한 아시리아 동방교회의 청년 신도를 연기했던 모양이다.

그런 자가 칸발리크에서 혁세주교라는 정체불명의 종교를 통해, 끔찍한 테러를 일삼고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면…… 이 늙은 성직자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견하는 아주 잠깐, 사실을 알려줄지 말지 고민했다.

레오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를 마음껏 조롱하고 절망 속에서 죽게 할 힘이 견하에게 있었다.

가벼운 침묵 끝에 사실을 알리지 않기로 했다. 그런…… 절망을 안겨주면서 죽일 필요는 없잖아. 자신은 그런 걸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한다.

뭔가를 억누르듯 삼키며, 견하는 입을 열었다.

“……이 사람으로 인해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잡히면 죽음을 면하긴 어렵겠죠.”

“이해하네. 그게 자네에게 주어진 소명일 테니까.”

레오는 잠깐 생각한 뒤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토칸이라는 청년, 공화국이 수립되고 나서는 전혀 찾아오지 않았지. 나는 단순히 그 청년이 큰일을 맡느라 바빠서 그런 것인 줄 알았는데…… 실은 내 쓸모가 다한 것이었어.”

“바쁘기도 했을 겁니다. 지금도 무척 바쁠 테고요.”

토칸의 행동에 대해서는 그렇게 냉소적으로 평을 내린다. 그 자신의 말마따나 철저하게 이용만 당한 이 늙은 성직자에게서 더 캐낼 정보는 없을 듯하다.

토칸이 이제 어디로 갔는지,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잔당이 어디로 숨어들었는지는 다른 경로로 알아봐야겠지.

총대주교에겐 다른 일을 시킬 시간이다. 그는 이제 ‘살아있는’ 상태로 대중에 모습을 드러내선 안 되는 사람이 되었다.

견하는 품속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결혼반지를 담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상자였다.

견하가 내민 상자를 열어 본 레오의 눈이 미묘하게 흔들린다. 그 안에는 알약이 들어있었다.

“첩보 쪽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결용으로 준비해 두는 약이라더군요. 고통 없이, 품위 있게 한 번에 죽음을 선사해준다고 합니다.”

견하는 잠깐 침묵한 뒤에 덧붙였다.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노환에 의한 사망’으로 처리될 것이기에, 명예는 최대한 지켜질 겁니다. 장례 절차도 총대주교께 행해지는 선례를 밟을 테지요. 그리고…… 이 일은 저희가 성하를 ‘핍박’해 이루어진 일이니 ‘목숨을 함부로 던지신 것’도 아닐 겁니다. 이 말이 성하께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영혼 없는 존재’인 우리가 무엇을 걱정하랴 싶지만, 그런 사정을 알려줘봤자 일만 복잡해질 뿐이다. 의미도 없는 일이지.

그러니 할 수 있는 한 레오의 마음을 최대한 달래주자.

우리는 ‘외상없이 조용히 세상을 떠난 시체’가 필요하니까.

레오는 물끄러미 견하를 바라보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순전히 호기심에서 묻는 건데, 내가 이 약을 먹기를 거부하면 어떻게 되나? 갑자기 우락부락한 요원들이 튀어나와서 한바탕 격투를 벌이게 되는 건가?”

“그런 절차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보다는 우회적인 절차를 밟을 겁니다.”

완력을 써서 레오를 죽인다 해도, 그건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견하의 몫이 될 것이다. 그러나 견하는 그 이야기도 굳이 들려주지 않았다.

“……저희가 성직자를 죽이려면 일단은 성직자가 아니게 만들어야 하기에, 크테시폰 총대주교에게서 파문 결정을 받아 내는 방법이 올라와 있습니다.”

크테시폰.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와 같은 이름이지만, 완전히 같은 도시는 아니다.

세계대전 후 로마 제국은 바그다드를 철저히 파괴한 후, 고대 크테시폰 유적이 있던 자리에 지금의 새로운 크테시폰을 세웠다. 아시리아 동방교회의 수장 역시 그때 크테시폰으로 옮겨갔고.

로마 교종과 콘스탄티누폴리 총대주교가 서로에게 파문을 내린 사례가 있듯, 크테시폰 총대주교가 카라코룸 총대주교에게 파문을 내리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다소 억지는 있겠지만.

“파문 결정을 받아내려면, 그에 해당하는 명분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이 토칸이라는 청년과 그 동지들이 저지른 만행 일부가 공개되어야 하고, 어떤 것들은 총대주교께 책임이 씌워지겠죠.”

즉, 저희는 성하의 ‘명예’는 지켜드릴 수 없게 됩니다, 라고 견하는 덧붙였다.

“……그렇구만.”

레오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죽어야 어떻게든 해결을 볼 수 있는 일이군.”

“저희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는 생각해도 더 배려해 줄 여지가 없다.

“이만 나가보게. 혼자 기도를 올릴 시간 정도는 주지 않겠나?”

견하는 끄덕였다. 그리고 통역을 향해 눈짓한 뒤 방을 나섰다.

그것이 두 사람이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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