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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247화 (247/541)

침투(5)

그러고 보면 신수덕은 허동주의 심복이었지. 신수덕이 그런 학살을 저지른 건 허동주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물론 개별 부대의 지휘관들이 방조하는 병사들의 살육과 약탈에 대해선, 다른 나라들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이니 눈살 좀 찌푸리는 선에서 끝날 겁니다. 병사들의 복수심이나 광기가 부른 ‘우발적 사고’로 취급받겠지요.”

그런 상황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있어도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정도다.

“그러나 국가가 전면에 나서서 대량 학살 시스템을 구축, 가동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이건 그 어떤 나라라도 참아줄 수 있는 ‘선’을 넘어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태평천국이 애초에 ‘국가 수뇌부 및 수도 괴멸’을 목적으로 저지른 평양 폭격.

고려라는 나라가 하나의 국가로 설 역량을 뿌리 뽑을 목적으로 저지른 초토화 작전.

이런 만행들이 바다 건너 일본공화국이나 아즈텍 연방의 분노까지 사고 말았다.

두 나라는 실질적인 손해를 입기 전에, 이미 이런 만행들을 듣고 ‘계기만 있다면 고려와 몽골 동맹에 가담할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짓을 몽골이 다시 저지른다?

“당시 증오에 미쳐 날뛰던 고려라면 몰라도, 아즈텍과 일본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테지요. 곧바로 몽골에 선전포고하고 총부리를 겨눠도 이상하지 않은 짓입니다.”

국제 외교 무대는 흔히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오직 ‘힘’만이 외교 무대를 지배한다고 착각해선 안 된다. 힘으로 윽박지른다고 ‘예, 그러십시오’라고 물러서는 사례는 그다지 많지 않다.

세상이 오로지 힘으로만 돌아간다고 착각하면, 외교 무대를 지배하고 있는 또 다른 규칙인 ‘도덕’을 간과하게 된다.

반드시 선이 행해지지 않는다고 해서, ‘거대한 악’이 용인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악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좋고, 행해야 한다면 ‘남들이 눈감아 줄 수 있는 최소한’으로만 행해져야 한다.

“만약 그때 시레문 카간께서 한인(漢人)을 멸종시켜 신민들의 복수심을 달래려 하셨다면, 국제 사회는 콘스탄티누폴리 평화회의의 문을 굳게 걸어 잠갔을 것입니다.”

게레센제도, 그때를 기억하는 장성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시레문이 얼마나 많이 고민했는지, 얼마만큼의 각오를 끌어안고 약탈과 살육을 엄격히 금지했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음 해결책으로 넘어가 보도록 하지. 돌아가신 형님 카간께서 세우셨고, 지금 짐과 울제이 칸이 이어받은 정책에 대해서.”

볼로드는 다시 한번 공손히 예를 표하고, 시레문 카간의 지난 치세에서 자신이 참여했던 정책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몽골인 관료의 파견, 그들을 통한 점진적인 한족의 몽골화. 이 또한 어렵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단순히 공무원 몇 명 뽑아다가 각 지역에 배치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으니까요.”

몽골에 파견될 관료는, 한족에게 몽골의 정책을 설명할 만큼 능력 있는 인재여야 했다.

당연히 그런 인재가 흔할 리 없거니와, 새로 그런 인재를 길러내는 데에는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든다.

“이른바 독립운동이라는 이름의 테러도 걱정이었습니다. 그런 불복종으로부터 관리들을 보호할 경비 인력까지 포함하면 더 많은 사람과 장비가 필요했죠. 강제로 뽑아서 배치할 경우의 반발도 우려됐습니다. 따라서 한족의 땅이라는 ‘오지’ 근무로 사람들을 유인하려면, 그만큼 많은 봉급도 보장해야 했지요.”

산업과 경제가 회복되어, 장기적으로는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해도, 문제가 거기서 그치진 않는다.

“몽골화. 말은 간단하고 쉽습니다. 하지만 이 간단한 말에 얼마나 많은 의미와 난관이 담겨 있었는지, 시레문 카간께서도 그때는 짐작하지 못하셨습니다.”

몽골화란 단순히 몽골인 부모의 혈통을 타고나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몽골인 부모에게서 난 ‘고아’가 한족들 손에 길러지면, 그 고아는 몽골인으로 자라는가? 아니다.

몽골화는 육신의 영역이 아니라 정신의 영역이다.

“정신적으로 몽골 문화에 젖어 들어야 비로소 몽골인이 됩니다. 그리되게 하려면, 우선 ‘언어’를 익히게끔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지요.”

또 다른 참모가 설명을 덧붙였다.

“언어는 낭키아스에서도 여전히 국가 정책의 중점으로 두고 있는 분야입니다. 울제이 칸이 다스리는 키타이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았고요.”

게레센제도 울제이도 자기 영지 내 공직자의 임용 및 진급 자격에 ‘몽골어 구사 능력’을 내걸었다.

“회화, 작문 시험 등을 통과하지 못하면 진급에 제한을 받지요. 이 정책 덕분에 몽골어 사용자나 몽골에 충성하는 친몽파 인구는 지속적으로 늘고는 있지만, 여전히 몽골인에 의한 통제를 체계적으로 구축하는 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러합니다. 특히 실무 환경에서, 한족도 아닌 몽골인들 자신이 ‘편리하다’는 이유만으로 한족 주민과 한어로 의사소통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이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으음, 하고 신음과 함께 게레센제는 긍정한다. 그 문제는 몽골인들이 선비나 거란의 전철을 밟아나간다는 뜻이니까.

한때 게레센제는 몽골 카간 자리에 오르는 길이 좌절되면, ‘한족’의 황제가 되는 대안을 생각해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몽골의 카간이다. 그때 생각했던 대안은 이제는 폐기된 지 오래다.

“그런 관리는 적발 시 파면, 벌금, 징역 등 매우 강한 처벌을 내리곤 있지. 하지만 완전히 뿌리 뽑진 못하네.”

이는 중세에도 있었던 문제고, 시레문 시대에도 역시 심각하게 떠올랐었다.

시레문은 이에 대해 몽골어 교사의 대거 양성 정책을 추진했다. 국가로부터 각종 혜택과 훈련을 동시에 받은 몽골어 교사들은 종종 키타이와 낭키아스로 파견됐다.

키타이와 낭키아스에서도 적극적으로 몽골어 교사를 적극 양성했다. 그러나 이 일도 쉽게 풀리진 않았다.

“교사의 훈련에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도 문제였지만, 이른바 ‘교육 이론’이 고도로 체계화되지 않은 것도 큰 문제였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가르치는 건 단순히 지식의 나열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 인간의 머릿속에 든 것을, 음성이나 문자를 거쳐 다른 인간의 머릿속으로 옮기는 과정은 무척 복잡하다.

이것을 어떻게든 효율적으로 전달해야 하는지, 그 연구 성과를 집약한 것이 바로 ‘교육 이론’이다.

그러나 완전한 교육 이론이란 존재하지 않고, 지금도 대학에서 수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를 연구 중이다. 당연히 이십여 년 전의 교육 이론도, 지금의 이론에도 한계는 있다.

게다가 이런 언어 교육 이론은, 보통은 그 언어를 ‘모국어’로 삼은 화자를 대상으로 수립되기 마련이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몽골어가 모국어인 화자를 가르치는 것과 몽골어를 ‘외국어’로 익히는 화자를 가르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몽골어 교육학에는 이에 대한 대비가 매우 부족했지요.”

또한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새로 배우려면,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확실한 동기 부여가 이루어져야 했다.

“몽골, 키타이, 낭키아스 정부는 ‘출세’나 ‘경제적 이익’이라는 대가를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언어를 통한 몽골화 정책은, 몽골어가 한족 사회 곳곳에 스며드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니 공직에 진출하거나 군인으로 임관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만 ‘시험용’으로 익히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습니다.”

군인이 되길 원하지 않는 자들은? 관리로 출세하길 원치 않는 자들은?

그저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마을 주변에서 한족들과 한어를 말하며 평화로이 일생을 보내기만 원하는 자들은?

진정한 몽골화는 그런 소박한 삶 속에서까지 침투해야만 한다.

“그 후 저희는 언어의 다른 요소에 주목했습니다. 하나의 언어는, 그 언어가 속한 문화 전체와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한족들이 몽골어에 매력을 느끼려면 일단은 몽골 문화 자체에 매력을 느낄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떻게 한족들이 몽골 문화에 매력을 느끼게 한단 말인가?

한족의 입장에서 몽골인은 ‘정복자’이자 ‘침략자’, ‘야만인’일 뿐이다.

몽골인들도 그런 사실은 굳이 대단한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그런 멸시를 표출하는 한족을 짓밟아버리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어찌어찌 몽골인에 대한 거부감을 극복한다고 치자. 그러나 난관은 아직도 남아있다.

“몽골의 거칠고 야성적이며, 군사적인 전통문화는, 세련된 도시 문화에 비하면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 어렵지. 애초에 그런 전통문화를 지켜가는 몽골인들도 지금은 많지 않고.”

게레센제 카간이 씁쓸하게 중얼거린다. 황족의 교양으로 승마와 궁술을 익히긴 했지만, 그 자신도 도시 문화에 더 친숙함을 느낀다. 기질적으로도 무예보다는 학문에 흥미가 많은 학자에 가깝다.

“물론 군사 문화에 매력을 느끼는 애호가들도 있겠습니다만…… 그 또한 도시의 세련된 사교계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제복이나 예절 등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지, 야전에서 거친 바람을 맞는 삶에 매력을 느끼는 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어디까지나 별종에 지나지 않는다.

“시레문 카간께선 몇 가지 길을 모색해 보셨습니다. 이를테면 한족의 정신문화가 이룬 성취를 흡수하기 위해 유가나 도가의 서적을 몽골문으로 번역하는 작업이 있었지요. 본래 취지는 ‘몽골인들은 야만인이 아니라 너희 한족이 이룬 학문도 이해할 만큼 격이 높은 민족이다’라는 식으로 인식 개선을 꾀한 것입니다만……”

한족들은 의도대로 생각해주지 않았다. 그 정책은 한족들이 ‘비록 전쟁에서는 졌지만 문화적으로는 이겼다’는 식으로 정신승리만 하게 만들었다. 프로젝트는 새로운 번역서 몇 권만 남기고 중단되었다.

“좀 더 몽골인 고유의 정신적 토대, 철학적 기반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후보로 떠오른 것이, 카라코룸 총대주교를 중심으로 한 아시리아 동방교회입니다.”

이른바 ‘네스토리우스파’라고도 불리는 이 크리스트교의 한 분파는, 먼 옛날 로마 제국에서 이단으로 몰려 쫓겨난 후 동방 각지에 정착했다.

그리고 각 지역의 문화와 토속 종교의 영향을 받아 변화, 발전해 왔다.

몽골의 아시리아 동방교회도 마찬가지여서, 몽골 고유의 텐그리 전통 신앙과 교류하며 그 면모를 많이 받아들이게 된다.

“마침 몰락한 태평천국 황실도 크리스트교 신자를 자처해왔기 때문에, 아시리아 동방교회를 중심으로 몽골의 문물을 전파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따르지 않을 것 같았지요.”

“하지만 카라코룸 총대주교가 주관하는 몽골 문화 전파 프로젝트는 현재 중단된 상태지.”

볼로드는 침통한 얼굴로 끄덕인다.

카라코롬 총대주고 레오 6세가 반란군을 지지하며 알타이 자유 공화국에 붙었기 때문이다.

볼로드도 존경하는 성직자이고 개인적인 친분도 약간 있었지만, 지금 그를 변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레오 6세의 미래엔 이제 어둠 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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