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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246화 (246/541)

침투(4)

갑자기 참혹한 시체가 된 전우, 그 뒤쪽에 나타난 도끼 든 거한. 당황이라는 감정을 미처 표현하기도 전에 투글룩의 부하들이 퍼부은 사격이 그 얼굴들을 날려버린다.

첫 희생자로부터 멀리 있을수록 정신을 차리는 속도가 빠르다. 몇 차례 고함이 오가고 총알이 날아온다.

다른 이단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무기를 휘둘러 총탄을 막아낸다.

일반인에 비하면 엄청나게 강력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술의 큰 양상이 변하진 않는다.

이단이 냉병기를 휘두르는 건 일반 보병이 착검돌격을 하는 것과 ‘본질적으로는’ 같다. 적의 화망을 돌파,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 대검으로 찌르거나 벤다. 다만 보병을 대규모로 돌진시켜 ‘살아남은’ 보병이 하는 그 역할을, 기본적으로 이단은 혼자서 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적의 사격에 다소 주춤한다. 그러나 곧 아군의 엄호 사격이 적의 사격을 둔하게 만들어준다. 그 틈을 타 다시 멀리 돌격.

이단은 이처럼 앞장서서 적의 주의를 끌고, 뒤에 오는 아군의 안전을 위해 적의 전력을 ‘걷어내야’ 한다. 그러고 나면 다시 아까처럼 뒤의 아군이 엄호사격. 기본적으로 전투는 이런 과정의 반복이다.

투글룩이 이끄는 부대는 이단의 수가 적었다. 그래서 장군이라도 어쨌든 이단이라면 이렇게 선두에서 돌진해야 한다.

아직 위관급이었던 시절이 떠오른다. 그때 동기들 중 절반이 태평천국군과 싸우다 전사했었지.

그들의 피도 이렇게 붉었고, 증오스런 한족의 피도 이렇게 붉었다.

이제 자신의 도끼로 동포의 피를 봐야 할 줄이야.

아니, 붉다는 건 이 감상적 기분에 의한 착각일까. 기껏해야 모닥불뿐인 어둑한 산골짜기에서 피의 색깔이 보일 리가 없다. 그저, 검고 끈적이는 무언가를 피라고 짐작하는 거지.

패잔병 무리는 불쌍하게도 이단이 단 한 사람도 없는 모양이다. 짐작했던 대로 이단들은 패잔병 무리에 섞여들지 않았다.

그들은 장교의 긍지를 품고 연합군에 끝까지 저항하려고 남았을 수도 있다. 투항해도 ‘값비싼’ 이단이니만큼 좋은 대우를 기대할 수도 있고.

아니, 우리 쪽이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이단과의 싸움은 이단이 죽음을 각오하는 몇 안 되는 상황이다. 그 외에는 적의 포병 전력이나 항공 전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상황이라든가…….

전세는 기울고, 팽팽했던 접전은 처절한 저항으로, 다시 일방적 도륙으로 변해간다.

전투가 끝날 무렵에는 동이 터 왔다.

다들 지쳤을 테니 휴식을 취하게끔 해야겠지.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적의 피묻은 군장에서 빼앗을 수 있는 건 다 빼앗아야 한다. 식량, 깨끗한 속옷이나 양말, 탄약, 그 밖에 유용해 보이는 건 뭐든.

희미한 햇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작은 전장은, 다른 모든 전장만큼 참혹했다. 피와 살과 뼈. 그게 어떤 모양으로 터져나가고 흩어졌는지 묘사하는 것 자체가 진부할 정도로…… 사방이 그런 것들투성이였다.

대부분은 적이었지만, 부하들의 시신도 보였다.

매장할 시간은 없었다. 부하들 시신만 대충 가지런히 한 뒤, 그들은 휴식을 취할 자리를 찾아 조금 이동했다.

패잔병 무리에서도 패잔병이 된 자들은 굳이 추격하지 않았다. 그들이 다시 보복을 위해 추격해 올 가능성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패잔병이다.

이동하면서, 투글룩은 쓰게 중얼거렸다.

“……저 종이 뭉치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기를.”

남쪽에서는 대대적인 한족 반란이 일어났다고 들었다. 지금 투글룩이 고려를 향해 필사적으로 가져가는 정보는 한족을 통제하는 데에도 유용한 정보다.

그게 어떤 세력의 손에 들어가든 동아시아, 아니 세계정세는 크게 요동친다.

그러니 이 정보는 루우 테무르의 손에 들어가야만 한다. 투글룩은 다짐하듯 되뇌었다.

***

투글룩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한족 반란 사태를 걱정하듯, 그 문제에 대한 새너두의 논의도 며칠째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볼로드는 조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대다수 한족에게, 자신들이 어떤 고통을 주변 민족들에게 주었고, 당연히 그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는 별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그때도 그러했고, 지금도.”

논의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전에 전후 사정을 비롯한 사전 정보를 정리하는 말이다.

태평천국의 일방적 침략 전쟁.

그 전쟁에서 어떤 범죄가 자행되었는가.

당신네 한족들은 태평천국과 그 황제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그 범죄에 협력했는가.

그런 사실을 아무리 떠들어보았자, 그들의 귀를 지나 뇌까지 이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자기들이 받은 ‘대가’만 억울해서 별 관심도 기울이지 않겠지.

그들의 머릿속에는 침략 전쟁이 ‘똑같이 공격과 방어를 주고받은 전쟁’으로 둔갑해 있을 것이다. 그들이 다른 나라에 저지른 만행은 ‘승자가 꾸며내거나 과장된 것’이라 일축하겠지.

자신들의 선제공격은, 주변 나라들이 압박해서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고 변명하며.

자신들이 그나마 전쟁을 선택했기에, 조금 더 나은 세상이 되었다고 망상하며.

자신들이 말하는 역사가 ‘진실’이며, 자신들의 말과 모순되는 증거들은 믿을 수 없는 기록이라 둘러대며.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인간이 뱉을 수 있는 가장 비열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으며.

역사가 진정 승자만의 기록이라면, 어째서 그 승자의 기록에는 패배자가 아예 ‘삭제’되지 않았는가. 패배자의 영광, 곧 승자에게 남긴 씻을 수 없는 치욕과 만행의 기록은 왜 남아있겠는가.

아무리 이야기해봤자 이해하지 못하겠지. 아니, 어쩌면 이해하고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일 수도 있다.

소수의 인간이 ‘반성’을 입에 담겠지만, 그들은 ‘앞잡이’ 취급을 받으며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할 것이다.

볼로드의 생각은 지나칠지도 모른다. 편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편견이 볼로드가 하는 우국(憂國)의 방식임이 틀림없다.

누군가의 지적을 받더라도, 그가 그 생각을 고쳐먹는 일은 죽는 날까지 없을 것이다.

신수덕이나 허동주처럼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진 않는다 해도, 그 시대를 겪은 사람들이 한족을 대하는 태도 밑바닥에는, 기본적으로 이런 태도가 깔려 있을 수밖에 없다.

증오가 증오를 낳는다는 상투적인 문구를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볼로드의 이러한 태도는 세계대전이 남긴, 또 하나의 상흔이었다.

“한족의 무지와 비도덕성을 규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또한 의미있는 작업이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눈앞에 주어진 ‘사실’에 대한 대처입니다.”

어떤 ‘사실’이 주어졌는가.

그것은 ‘자신들이 잘못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 범죄 민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들 중에도 반성하는 목소리가 있다든가, 그들에게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정신적 위안으로 삼으려 해봤자, 현실에서 동떨어진 대책만 나올 뿐.

그런 범죄 민족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오직 사실로만 접근해야 한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우리 몽골 제국은 태평천국의 영토 대부분을 받아 냈습니다.”

물론 탕구트, 티베트, 대예, 보우슈엥, 고려 등의 나라도 태평천국 외곽의 일정 지역들을 갈라 먹었지만, 황하와 장강 유역에 있는 핵심지역 대부분은 몽골의 것이 되었다.

당연히 한족 인구 중 가장 많은 수를 떠안은 나라도 몽골이었다.

반성하지 않고, 자신들이 옳았다고 여기며,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는 데다 숫자까지 많은 민족을.

그 민족을 이제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

선대 카간 시레문에게 그런 문제가 주어졌다.

그 문제에 대해 고민했던 카간. 그 카간을 보좌하던 볼로드는, 이제 그때의 경험을 살려 새로운 카간에게 조언한다.

형이 고민하던 문제는 동생에게로 계승되었으니까.

“카간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이는 선비와 거란 같은 옛 민족들뿐만 아니라 칭기스 카간께서도 하셨던 고민입니다.”

따라서 해결책 후보 역시,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볼로드는 과거에 통하던 방식을 그대로 현재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믿는, 그런 미련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믿는다.

인간이라는 생물의 본질은 고작 몇천 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정도로 변하지 않으니까.

인간의 진보니 성취니 뭐니 하는 것은 학자들에게 맡겨놓으면 될 일이다.

정치가는 인간의 불변을 믿는다. 그래야 한다고 볼로드는 생각한다.

“칭기스 카간께서 ‘화북’, 그러니까 지금의 키타이에 대량의 죽음을 내리시어 한족의 숫자를 줄였던 선례를 따르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몽골인 관료를 각지에 파견해서 서서히 한족들을 몽골화하는 정책을 유지할 것인가, 하는 방법도 있었지요.”

게레센제의 참모 중 하나가 그런 볼로드의 말에 덧붙이듯 의견을 말한다. 그를 비롯한 참모들이 낭키아스에서 해왔던 정책이기에 잘 알고 있었으니까.

볼로드는 그 참모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뒤, 계속 말을 이었다.

“선대 카간께서는 그런 방법을 선택하셨지요. 그러나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당시엔 그 둘 말고도 다른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둘 다 답이 아니라면, 한족의 충성 맹세 정도만 받아낸 뒤, 자치를 허용한다는 방안도 있었습니다.”

“그랬지. 분명 응천에서도 의논했던 방안이다.”

게레센제가 낭키아스에서의 일을 회상하듯 말했다.

“먼저, 아뢰옵기 참혹하오나 ‘학살 방안’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키타이와 낭키아스 전토에서 학살을 벌인다면, 그 규모는 적게는 백만에서 많게는 천만 단위에 달할 것이다.

규모에 따라 여러 차례에 걸쳐 행해져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전쟁이 막 끝난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모두가, 특히 병사들이 평화의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복수보다도 더 강한 욕망이 있다면, 그건 가정으로, 사회로 돌아가서 평범한 삶을 다시 영위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학살은 틀림없이 수많은 구 태평천국 신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그 반발을 억누르기 위해 또 다른 학살을 감당해야 할 것이며, 거기에는 다시 많은 군인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병사들에게 이러저러한 살육을 벌어야 하니 남으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전쟁이 끝났는데도 점령지 주민들의 저항에 살해당할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말이다.

“선대 시레문 카간께서 내다보신 바대로, 신수덕이 산동에서 벌인 학살은 지금 키타이, 낭키아스에서 일어난 한족 봉기의 직간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지금이야 그로부터 20여 년이나 지났으니 감당할 수 있었지만, 당시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감당할 수 없었을 겁니다.”

당시 몽골에는 그런 학살을 수행할 여력 자체가 없었다.

“여기 있는 장군들도 잘 알고 있겠지만, 가스로 처형하든 총알을 퍼붓든, 국가 산업에 여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당장 파괴된 국토를 재건하는 데에만 온 나라의 자원을 쏟아부어도 부족할 지경이다.

학살 같은 ‘우선 순위가 떨어지는 일’에 돌릴 자원은 없었다.

게다가 병사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평화가 돌아왔다고 환호하는 국민들에게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 좀 더 전시 체제를 유지해달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외교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여기 계신 장군 중 세계대전에 참전하셨던 분들이라면, 고려가 더 많은 영토를 보상으로 받을 수 있었음에도 왜 산동만으로 만족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아시겠지요.”

태평천국 황제 일가 몰살. 허동주가 저질렀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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