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투(3)
투글룩은 소장이라는 계급에 어울리지 않게, 중대 규모는 될까 싶은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이동 중이었다. 그가 이끄는 무리에는 병사나 부사관은 몇 되지 않았고, 대부분 장교였다.
차량은 모두 버렸고, 도보로 이동 중이었기에 많이들 지쳐 있었다. 투글룩은 적절한 지점에 이르렀다고 생각되자 부하들을 돌아봤고, 그제야 휴식 명령을 내렸다.
“다들 대단하군.”
짧은 말로 치하한 뒤 투글룩도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각자 육포를 씹으며 요기를 한다.
여기는 부르칸 칼둔 산 인근의 구릉지대다. 군복의 색깔과 주변 자연의 색이 뒤섞여, 이렇게 자세를 낮추고만 있으면 적에게 발각될 위험은 적다. 우중충한 날씨도 혹시 모를 적 항공기의 눈을 피할 수 있게 해 준다.
하지만 지금 투글룩과 부하들이 가장 피해야 하는 자들은…… 명확히 ‘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투글룩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투글룩 역시 적대할 생각은 없었지만, 거기로 가선 안 되는 사정이 있다.
투글룩은 손짓으로 부관을 불렀다. 몸을 낮추고 잰걸음으로 다가온 부관에게 속삭이듯 묻는다.
“챙겨온 자료들은 다 잘 있나? 중간에 흘린 건 없겠지?”
“물론입니다. 여기 고스란히 넣어두고 매일 상태를 점검합니다. 시설을 탈출할 때 소각한 것 말고 누락된 자료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부관은 자기 군장을 어깨로 살짝 들썩였다. 투글룩은 부관에게 표정으로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단단히 주의를 준다.
“절대로 카간 측으로 흘러 들어가선 안 돼. 어떻게든 고려군과 접촉할 때까지…… 아니 내가 황제 폐하를 알현할 때까지는 굳게 지켜야 하네.”
“명심하겠습니다.”
투글룩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부관의 뒷모습을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부관으로 둔 자는 다른 부하들에 비하면 머리가 나쁘다. 명령하면 그 명령만을 충실히 수행할 뿐,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거나 조언을 해주지 못한다.
그 점 때문에 지금 상황에서는 아주 적합한 인재라 할 수 있다.
다른 부하였다면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겠지. 게레센제 카간에게 가는 안전한 길을 고르거나, 아니면 내전 시작과 동시에 공화국 정부와 협상, 정보를 비싼 가격에 넘기자고 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자들은 지금 자신처럼 ‘비합리적 고집’을 세우는 상관에게 쉽게 반발심을 품는다. 자신의 ‘합리적 두뇌’로 떠올린 제안이 먹히지 않으면, 뒤에서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믿을 수가 없다.
투글룩에게 필요한 사람은 비합리적인 명령도 미련할 정도로 수행해주는 자다. 지금 부관처럼.
“……무모한 짓거리긴 하지.”
그뿐만 아니라 괜한 고생을 사서 한다고, 투글룩 자신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해야만 하는’ 일이다.
카라코룸에서 일어난 봉기, 뒤이은 알타이 자유 공화국의 건국과 몽골 내전.
시레문 카간이 죽은 직후, 투글룩은 칸발리크 사태와 카라코룸 봉기가 일련의 반란 음모임을 확신했다.
투글룩이 뭐라고 확신했든 간에, 정세는 그의 앞에 선택지를 들이밀었다.
투글룩은 시레문에게 계속 충성한다는 길을 택했다.
카라코룸 근교 유적지와 그 연구시설을 관리하던 투글룩은, 하루아침에 적진 한복판에 떨어진 신세가 되었다.
편한 길을 고를 생각이었다면 진즉에 공화국에 투항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길을 골랐다면, 연구시설과 자료가 모두 공화국 정부에게 넘어갔겠지. 공화국은 투글룩이 넘긴 자료들을 토대로 ‘더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을 테고.
투글룩 자신 또한 이와 기를 깊이 고찰하는 이단이었기에, 칸발리크에서 얼마나 참혹한 일이 일어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출세에 미쳐도 그런 놈들에게 죄다 갖다 바칠 순 없지.”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라고 했던가. 그놈들이 만들겠다는 세상이 지옥이라는 건 상식인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인류 역사에서 언제나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가차 없는 행동을 할 때는 무거운 책임에 대한 두려움이 따른다.
두려움 없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들은 위험하다. 아무리 인간이 호전적인 동물이라 해도, 그런 놈들은 동물의 선조차 넘어간 자들이다.
그런 자들에게 미래가 있을 리 없다. 아니, 미래가 있어선 안 된다.
그래서 투글룩은 적에게 투항하지 않고, 탈출을 감행했다.
연구진은 시설 내부의 ‘붉은 구체’가 죽어버린 직후 해산했다. 시설과 유적에 더 연구할 거리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원들 대부분은 칸발리크 인근의 다른 연구소나 소속 대학으로 돌아갔다.
남은 이들은 상당한 강도의 군사훈련까지 마친 장교들. 그들과 함께 적에게 절대로 넘겨서는 안 될 자료들을 챙겨 무작정 카라코룸에서 멀어지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유적과 연구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부하들은 기지에 남겨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아마 대부분 적에게 투항했을 것이다. 그들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은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연구원들을 사살할 필요가 없었던 것도, 남은 부하들이 충성스러웠던 것도.
어쨌든 카라코룸에서 멀어지긴 했지만, 부하들이 초원을 방황하다 죽게 할 순 없었다. 제대로 방향을 잡아야 했다.
그 시점에서 ‘방향을 잡는다’는 것은, 단순히 어디를 목적지로 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투글룩이 데려온 인재들, 그리고 자신이 지닌 중요한 정보를 누구에게 넘길 것인가라는 중대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낭키아스 칸인가, 키타이 칸인가, 고려 황제인가.
시레문은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투글룩은 스스로 다음 행보를 결정해야 했다.
시레문의 생전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 추측해보고, 그 뜻에 따라 방향을 정했다.
볼로드였다면 시레문의 의중이 어떠했건 간에 몽골 전체의 이익이 되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볼로드와는 다르다. 볼로드는 몽골 국가에 충성하는 사람일지 몰라도, 자신은 시레문 개인에게 충성하는 사람이다.
투글룩은 ‘시레문의 본뜻은 루우 테무르에게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딸에게 잘 대해주지 못한 아버지의 미안함을 확대해석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는 시레문의 마음이 루우 테무르 쪽으로 더 기울어 있었다 믿기로 했다.
그렇기에 고려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투글룩은 볼로드가 자신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한 끝에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는 것은 꿈에서도 떠올리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두 사람 모두 루우 테무르를 지지하게 되었다.
***
“날이 저물었군.”
“출발합니까?”
부관의 물음에 투글룩은 끄덕였다.
“낮잠들은 충분히 잤겠지. 요기도 충분히 했을 테고.”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투글룩은 덧붙였다.
“식수들 적절히 아끼라고 하게. 어제 보충한 물로 언제까지 버텨야 할지 알 수 없으니까.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군장에서 좀 덜어내고.”
한창 행군할 때는 몸에서 나는 열기 때문에 땀을 흘려도 별문제가 없지만, 쉴 때는 땀이 식으며 체온을 빼앗아간다. 아직은 밤공기가 시리다. 땀 처리는 야전에 임하는 군인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다.
괜한 땀을 흘려선 안 된다. 쓸데없는 일로 지쳐서도 안 되고.
투글룩과 부하들은 출발했다.
“부르칸 칼둔의 남쪽 기슭을 돌아, 동남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목적지는 시르겐 나우르로. 거기엔 고려군이 있을 확률이 높겠지.”
이렇게 도망치는 중에 가장 어려운 게 있다면, 바로 전황 파악이다. 척후조를 풀어도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기가 어렵다. 그때그때 한정된 정보로 ‘이럴 것이다’ 하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때마다 투글룩의 등줄기에는, ‘이번에는 부하들을 모두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흐른다.
그런 결정들에 비하면 식량과 물을 구하는 건 쉬웠다. 식량은 야생동물을 사냥해도 되고, 근처 마을에 들러서 좀 얻어내는 식으로 해결할 수도 있었다. 물은 얼음이나 눈을 녹이면 그만이고.
전황을 파악하기가 이토록 어려워진 데에는 미리안과 김천열이 세운 작전도 한몫했다.
광범위한 전선을 밀어붙이고 있었다면 전황 파악이 좀 더 쉬웠겠지만, 점을 돌파하고 선을 이어가며 카라코룸을 찌르는 방식으로 전진한 미리안의 지휘는 공화국군 전체에 혼란을 일으켰다.
고려와 몽골 연합군의 후방을 끊어야 하는지, 아니면 후퇴해 카라코룸을 지켜야 하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대기하면서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지.
포위 격파되며 흩어진 패잔병, 여전히 공화국에 충성하는 부대, 항복을 결정한 부대, 일단 위치에서 벗어나 퇴각하기로 한 부대, 일단 눈앞의 적을 공격하러 나서는 부대. 이들 모두가 명령체계의 혼란 속에 일정한 전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섞이며 공화국의 멸망을 가속했다.
미리안 입장에서는 통쾌한 승리였지만, 그런 전황 속 작은 점 하나에 불과한 투글룩과 부하들에게는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패잔병 무리, 혹은 패주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이동하는 공화국군 부대와 맞닥뜨릴 때마다 말이다.
오늘도 운이 그리 좋지 않은 날이었다.
척후조가 돌아와 그들이 가는 길 앞쪽, 조금 내려간 계곡 인근에 적의 패잔병 무리가 있다고 보고해 왔다.
“어두워서 정확하다곤 할 수 없으나, 대략 소대 두 개 규모였습니다.”
몽골의 국토는 넓은 초원을 자랑하지만, 도망쳐야 하는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도망자들끼리 이렇게 재수 없게 맞닥뜨리기도 하는 법이다.
“우리가 중대급은 되니까 수적으로 불리하진 않긴 한데, 저쪽이 뭐로 무장하고 있는지, 이단이 얼마나 되는지가 문제겠군.”
패잔병이라면 중화기를 지니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단은 보통은 패주하기보다는 전선에 남는다.
그렇지만 예외적인 상황도 있으므로 방심할 수는 없다.
투글룩은 자신의 무기, 거대한 도끼를 소환한다.
“고려인들은 확실히 아니었지?”
확인하듯 묻는다. 척후조는 끄덕였다.
“‘카라코룸으로 돌아갈 방법’이 어쩌고 하는 대화를 들었습니다. 의견 다툼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만……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순 없었습니다.”
더 접근했거나 시간을 끌었다간 척후조 쪽이 적에게 오히려 발각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투글룩은 그들의 노고를 짧게 치하한 뒤, 부하들을 모으고 전투 준비를 시켰다.
“기습한다.”
적을 우회하기엔 너무 지쳤고, 설득하기엔 위험성이 너무 컸다. 기습을 가한다면 적 무리에 이단의 수가 많아도 어떻게 대처해 볼 수 있다.
투글룩과 부하들은 늑대 무리처럼 산기슭을 비스듬히 타며 패잔병 무리에 접근했다.
어지간히도 사기가 떨어진 모양이다. 별달리 주의하지도 않고 불을 피워대고 있다. 적 공군이 목격하든 어쩌든 될 대로 되라는 태도다. 덕분에 그들을 식별하기는 쉬웠지만.
인간의 다리가 땅을 디딜 때의 ‘원리-이’를 변경. 한 번의 발 구름으로 수십 미터를 전진할 수 있다는 ‘현상-기’를 드러낸다.
투글룩은 지면에 바싹 붙어 나는 새처럼 적에게 육박해 들어갔다.
바로 눈앞, 자신을 등지고 있던 적을 두 동강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