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244화 (244/541)

침투(2)

“고려 태사가 어떤 의도를 품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지.”

새너두. 행궁이라는 이름을 붙인 게레센제의 사령부 안에서, 그는 몽골 태사(타이시)인 볼로드에게 그렇게 말했다.

다른 장성들도 보고 있는 자리이기에 볼로드는 말을 아낄 수밖에 없다. 침묵 속에 게레센제의 말을 듣는다.

“미리안은 루우 테무르의 권력 확대를 바라지 않아. 이번에 카라코룸에 입성한 김에 ‘개선장군’으로서 자신의 위명을 드높이고, 그걸로 황제를 자신의 통제 아래 두고 싶어 하지.”

따라서 우리로선 미리안과 대립하면서 울제이를 계속 밀어줄 이유는 없다. 미리안이 카라코룸에 입성해도 딱히 손해 볼 것은 없다. 게레센제는 그렇게 덧붙였다.

“아니 오히려, 고려 태사의 그런 계산이 우리에겐 유용하다고 봐야겠지.”

일단 미리안은 루우 테무르를 견제해준다. 게레센제는 그 덕분에 한숨 돌리고 자신의 황권을 강화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미리안은 울제이가 카라코룸에 먼저 입성하는 것을 막았다. 울제이는 개선장군이 되지 못했고, 따라서 이번에도 게레센제를 위협하는 데 실패했다.

“고려 태사와는 협력하는 편이 우리에게 좋다.”

참으로 뜻밖이지만, 게레센제와 미리안은 공동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

볼로드는 게레센제가 고려 내부의 복잡한 사정은 모르길 바랐다. 미리안 또한 루우 테무르처럼 고려와 몽골 간 동군연합을 원한다는 식으로 파악하고 있다면, 게레센제는 미리안 역시 견제해줬겠지. 그러면 볼로드는 마음 놓고 루우에게 협력할 수 있었을 테고.

그래서 미리안과의 태사급 회담 이후에도 카간에게 알릴 정보에는 제한을 두었는데, 게레센제는 자신만의 정보망으로 일의 흐름을 대충은 파악한 모양이다.

하긴 낭키아스도 하나의 국가이니만큼, 그 수장인 게레센제에게 올라가는 별개의 첩보망을 갖췄겠지.

“타이시는 고려 태사와의 제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갑자기 질문의 화살이 볼로드를 향한다.

볼로드로서는 각오했던 질문이다. 볼로드가 루우 테무르의 영향력 증대를 바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고, 게레센제의 시험은 끝나지 않을 테니까.

즉, 게레센제와 미리안이 손을 잡는다는 이야기는 볼로드에겐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볼로드는 담담한 표정 밑으로 감정을 숨기며, 공손히 대답했다.

“신도 그러한 제휴가 카간께 큰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게레센제의 눈이 커진다. 정말로 놀라서가 아니라, 야유하듯 과장된 놀라움을 보이는 것이다. 카간의 입가에 떠오른 웃음은 냉소다.

“그대의 말은 참으로 교묘하군.”

말이 차갑다. 하지만 차가운 말 말고는 게레센제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볼로드는 게레센제가 함부로 거꾸러뜨릴 수 없는 상대다.

아직은.

미리안과 협력해 루우 테무르의 카간 즉위를 막고, 시간이 지나 게레센제의 권위가 확고해진다면…… 그때는 게레센제도 볼로드의 해임에 손을 대겠지.

어쩌면 거기서도 미리안의 협력을 구할지도 모른다.

볼로드는 미리안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계집에 불과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볼로드를 ‘말 안 듣는 괴뢰정권 수장’쯤으로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회담을 통해 미리안은 분명 ‘볼로드와는 손발을 못 맞추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게레센제의 제안이 들어온다면…… 마침 잘 됐다고 생각할지도.

이 기회에 좀 더 말귀를 잘 알아듣는, 게레센제의 입맛에 맞으면서 미리안의 입맛에도 맞는 타이시를 앉혀두는 게 좋겠다며 적극 협력해오지 않을까.

그렇게 되기 전에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

“타이시를 부른 건 고려와의 외교 문제를 논하기 위함만은 아니다. 어쨌든 카라코룸 탈환으로 북방의 반란은 끝났다. 남은 일은 잔당 소탕 작업 정도지. 이제는 눈을 남쪽으로 돌릴 때다.”

서부와 남부에서 일어난 대대적인 한족 봉기.

그런가. 그 일도 논하기 위함인가.

어쨌든 타이시는 타이시다. 정치적 대립이 있다고 해도, 게레센제에겐 아직 볼로드의 도움이 필요하다. 볼로드의 실각은 그의 쓸모가 다한 뒤에 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선대, 시레문 카간 아래에서 국정을 이끌어 온 그 능력과 경험은, 분명 제국 통치에 도움이 된다.

“마침 울제이 칸이 이런 요청을 보냈더군. 반란군 토벌이 얼추 마무리되었으니 자기 영지의 방어에 힘을 쏟고 싶다고.”

볼로드는 몸가짐을 가다듬는다. 어쨌든 지금은 게레센제의 참모로서 상황을 분석하고, 진언을 올려야 한다.

“허락하시되, 울제이 칸의 사령부를 개편하면서 권한 일부를 회수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울제이 칸이 본토에서는 전쟁성 장관으로서만 권력을 행사하게끔 하시고, 키타이에서만 칸으로서 군권을 행사토록 하십시오.”

“키타이 문제는 울제이에게만 온전히 맡겨두고, 짐은 낭키아스 문제에 집중하라는 말인가?”

볼로드는 고개를 저었다.

“카간께서는 장기적으로 키타이도 제국 본토에 완전히 편입하실 생각이시지 않습니까?”

물론 그것은 게레센제가 ‘다이온’의 이상에 적극 동조한다든가 하는 이유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다. 게레센제는 키타이를 ‘명목상’으로는 울제이의 영지로 남겨두되, 실질적인 권한은 빼앗을 계획이다.

그 계획의 과정에서 ‘키타이의 본토 편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외에도 게레센제의 개인 영지인 낭키아스와 몽골 본토 간 ‘육상 연결로’를 확보한다는 목적도 있다.

“울제이 칸의 사령부에 있던 장군들, 또는 여기 있는 장군들 위주로 새로 사령부를 편성해 키타이에서 울제이 칸과는 별개로 작전을 수행케 하심이 좋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키타이에서의 짐의 영향력을 늘려라?”

“그러합니다. 울제이 칸에게는 빚을 안겨주는 셈이지요.”

게레센제는 끄덕인다. 어쨌든 볼로드의 조언이 옳다고 여긴 듯하다.

“낭키아스에도 이제 지원을 보내야겠지. 고려군이 도와주고 있다곤 하지만, 우리도 고려가 넘긴 빚을 더 떠안는 건 곤란해.”

마침 여유도 났고, 라며 게레센제는 덧붙였다.

그 말대로였다.

그때까지 공화국과 제국 사이에서 거취를 정하지 못하고 있던 군인들도, 칸발리크 사태 제압 이후에는 새로운 카간에게 빠르게 충성을 맹세했다. 게레센제는 그들에게 ‘빚’을 지우기 위해 별다른 추궁을 하지 않고, 그대로 반란군 잔당 토벌을 맡겼다.

다시 정상화되어 가는 군사력 덕분에, 잔당 토벌은 어렵지 않게 진행 중이다. 잔당들이 도주할 방향은 서북쪽에 가느다랗게 뚫려 있는 미수복 지역이지만, 여기 국경을 맞댄 카자흐가 이들을 도와줄 것 같진 않다.

또 하나의 탈출로는 정북 방향에 있는 극북 지역이지만, 이쪽은 애초에 사람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힘든 척박한 지역이다. 옛날부터 몽골에 조공을 바치며 살아온 원주민이나 루스계 공국에서 온 탐험가, 개척민들의 후손밖에 없다.

잔당들이 그 지역에서 대규모 조직을 이룰 수는 없지만, 그래도 도적 떼나 테러리스트로 발전할 우려는 충분하기에 병력 일부를 풀어 추격 중이다. 주민들의 신고로 몇 명 잡아내고 나면, 나머지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알아서 죽겠지. 혹은 야생동물의 먹이가 되거나.

여하튼 이제 북쪽, 몽골 본토의 내전은 끝났다고 봐도 좋다. 고려의 신수덕처럼 구심점이 될만한 인물들도 고려군이 제거해주었다. 시선을 남쪽으로 돌릴 여유가 있다.

“짐이 염려하는 바는 바로 거기서 시작한다.”

화제가 또 바뀌었다. 볼로드와 게레센제의 참모들은 카간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향후 한족들의 봉기를 제압하고 나면, 이전과 같은 정책을 키타이와 낭키아스에 그대로 펼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대들도 예케 몽골 울루스의 미래가 이전과 같다고 생각하진 않겠지.”

반란이 일어났고, 그 반란을 제압했다면, 반란이 일어난 원인부터 차례로 검토해야 한다.

특히 반란군 지도부와 구별되는 일반 대중은 어째서 봉기에 가담했는가, 하는 문제를 우선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문제의 해결책을 내놓아야 한다.

해결책을 내놓는 과정에서, 그 사회와 국가는 변한다. 미미한 수준이라 할지라도 틀림없이 변한다.

몽골은 어제의 몽골과 같을 수 없고, 이는 키타이와 낭키아스도 마찬가지다. 멸망의 불꽃을 향해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나라가 아닌 이상 말이다.

그렇다. 수많은 국가가 반성도 변화도 없이 ‘어제와 마찬가지로’ 살아가려다 몰락했다. 그 길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우리의 한족 정책은 이후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게레센제는 무거운 어조로 그런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그 질문에 당장 명쾌한 해답을 던질 수 있는 자는 여기 없다. 반란군을 생포하여 친절하게 인터뷰라도 하지 않는 이상, 정복자들이 피정복자들의 마음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반란을 일으킨 당사자들도 잘 모르지 않을까.

그렇기에 마치 어두운 동굴을 조심스레 더듬어 나가듯 서서히, 정책의 실패와 성공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야 한다.

“우리 몽골인들은 한족에 비하면 소수입니다.”

근대 이후 카간들은 여러 정책을 통해 몽골인 자체의 숫자를 늘리려 해왔고,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다.

다른 민족에게 ‘몽골화 정책’으로 몽골인이라는 정체성을 주입해왔을 뿐만 아니라, 척박한 땅에도 적용 가능한 농법 등을 통해 본토의 인구 부양 능력 자체를 키웠다.

그러나 몽골인의 수가 증가한다 해도, 다른 민족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던 건 아니다. 한족도 고려인들도 착실하게 인구를 증가시켜왔다.

세계대전 이후 고려와 몽골, 그 외 각국에 의해 한족 국가인 태평천국의 영토는 분할되었고, 어쨌든 몽골인들은 그 땅에 들어가 통치를 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태평천국의 기존 행정체계를 완전히 붕괴시킨 게 아니라 어느 정도 계승을 하긴 했지만, 몽골인을 그 한족 관료들 밑에서 일하게 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각 행정구역마다 대표는 몽골인이 되어야 했고, 그래서 몽골인 관료들이 태평천국 각지로 파견되었다.

그것이 현 키타이와 낭키아스 정부의 시작이었다.

“파견되었던 몽골인 관료들은, 아무리 승전국의 관리라 해도 그 지역 사회에서는 ‘소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절대다수의 한족들이 당장 몽골의 통치에 적응하도록 할 것인가, 아니면 몽골인 관리가 임지의 한족 사회에 적응할 것인가, 그들은 그런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칭기스 카간께서 처음 키타이를 정벌하셨을 때도 마찬가지 문제가 있었지.”

“그렇습니다. 이는 더 앞선 시대의 ‘선비’나 ‘거란’인들도 맞닥뜨렸던 문제입니다.”

한족 대분열, 천하의 대혼란 시대인 오호십육국 시대. 북방에서 밀고 내려온 선비족들은 한족 국가를 대체할 자신들의 왕조를 세웠다.

선비족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은 문제를 겪었고, 세대를 거듭하며 한족화되어 이제는 유물이나 성씨 정도의 흔적만을 남겨뒀다.

거란인들 역시 같은 문제를 겪고, ‘키타이’라는 지리적 이름만을 남기고 대부분은 한족들 사이로, 일부는 몽골인들 사이로 흩어져 사라졌다.

“……우리는 어떻게 그 민족들이 걸어갔던 길을 피해야겠는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