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투(1)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카라코룸 교외에서도 한참 벗어난 숲속.
토칸은 숨을 돌린다. 주견하는 더 추격해오지 않는다. 아마 저쪽도 무에투켄을 죽인 선에서 만족하고 빨리 귀환해야 할 것이다.
범 알타이 인민동맹 소속 위험 인사인 토칸을 처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태사 미리안의 카라코룸 입성이 더욱 중요할 테니까.
그러니까 추격은 없을 것이라 안심하며, 토칸은 하던 생각에 마저 빠져든다.
솔직히 군사적 문제나 정치적 조율에 대해 토칸은 잘 모른다. 그는 늘 그가 잘 모르는 이유로 벌어진 상황에 휩쓸리듯 살아왔다.
실험체로 끌려간 것도 이단이 된 것도.
범 알타이 인민동맹에 가입한 이후엔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마저도 이젠 잘 모르겠다.
인민동맹은 수면 아래로 모습을 감췄고, 증오스런 카간을 겨냥한 공화국은 멋대로 세워졌다 멋대로 침몰했다.
부하들더러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바짝 엎드려 있으라’고 대피시킨 것이 그나마 다행일까.
자신은 대체 뭘 원해서 이 추태에 가담해 함께 놀아났는지.
공화국 수립, 군주제 폐지…… 그리하여 토칸 자신의, 토칸처럼 실험체로 죽어간 사람들의 복수를 하고 싶었던 걸까. 다시는 그들과 같은 희생자가 생기지 않길 바라는 숭고한 이상이었을까?
돌이켜보니 그건 아니었다.
칸발리크에서 ‘혁세주교’를 이용해 여러 가지 공작을 펼쳤을 때, 시레문의 비행선이 폭발했을 때, 그는 전에 없던 환희를 느꼈다.
그리고 자신과는 완전히 반대되던 주견하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자신은 그저 이리저리 날뛰며 파괴 충동을 뿌려대는 데 만족하는 것 아닌가, 하고.
“……나도 그늘에서 살아가지 말고, 주견하처럼 전면에 나섰어야 했나.”
그랬다면 그도 정치적인 힘을 쥘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원하지 않았는데도 ‘성과’만으로 어느 정도 지위가 주어졌던 걸 생각해보면, 원했을 경우엔 더 높은 위치까지 올라갔겠지.
정치적인 힘을 쥐었다면 자신의 파괴 충동을 좀 더 건설적인 방향으로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반쪽짜리 실패한 공화국이 아니라, 제국 전역에서 공화 혁명을 일으켰을지도 모르고, 더 나아가 일시적인 카간 암살이 아니라 철저한 군주제 철폐도 가능했을 것이다.
“일의 방향을 내가 원하는 쪽으로 틀려면, 역시 정치적인 힘이 필요해.”
그렇게 말해놓고 한참을 침묵하다, 토칸은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애초에 ‘원하는 방향’이라는 걸 제대로 잡을 인간이 아니다, 나는.
그런 힘을 얻었어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리저리 날뛰어대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런 힘까지 얻었으니 더 큰 파괴를 일으켰겠지.
“자, 몽상은 됐고. 이젠 어쩌지?”
견하는 칸발리크 참극의 대가를 이 목으로 치르길 원한다. 그래서 그렇게 달려들었지. 물론 토칸도 순순히 죽어줄 생각은 없고, 그 열세인 상황을 벗어날 방법도 없었기에 도망쳤다.
도망은 쳤는데, 뭘 해야 할까.
아니 일단 어디로 가야 할까.
몸을 일으킨다.
기껏 주견하에게서 도망쳤는데 여기서 얼어 죽을 수는 없다. 토칸은 먼저 몸을 녹일 곳을 찾아,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
“결국 태사가 카라코룸에 입성했어.”
루우가 슬며시 미소 띤 얼굴로 말하자, 그녀 앞에서 함께 다과를 먹던 지나도 싱긋 웃었다.
“현지에서는 ‘카라코룸의 봄’이라고까지 하는 모양이에요.”
“과장된 칭찬이야. 카라코룸이 봄이라 할 만할 날씨가 되려면 두 달은 더 있어야 해.”
지나는 키득, 하고 웃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한다.
“태사와 감찰국장, 두 사람 모두 일단 귀국해야 할 텐데 말이죠. 졸업 요건을 채우지 않아도 졸업장은 주는 신분이라지만, 입학식에는 참석하는 게 모양이 좋으니까요.”
지나는 지금 제1대학교 입학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 4학년이 될 리안이 재학생 대표로, 견하가 입학생 대표로 입학식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흠, 뭐 정 일정이 안 맞으면 짐이 입학생 대표로 나서는 방법도 있는데.”
“폐하께서 나서시는 경우에도, 적어도 태사는 귀국해야 하는 데다…… 신하인 태사가 선배인 재학생 대표로, 주군인 폐하가 입학생 대표로 나오면 분명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을걸요?”
“음…….”
그런 걸 또 일일이 해명하기도 번거롭다. 번거로울 일은 애초에 안 만드는 것이 좋다.
“뭐, 그건 두 사람이 도저히 입학식 일정에 맞추지 못할 때 다시 생각하도록 하고. 그나저나 지나 너, 표정이 꽤 밝은데.”
“어? 그런가요?”
견하의 부탁으로 지나는 그가 몽골에 가 있는 동안, 황제 루우의 보좌관을 겸했다. 감찰국의 실무는 나제홍이나 이익서, 기타 다른 직원들이 나눠 맡았다.
견하가 귀국하면 그동안 관찰한 황제의 언행을 모조리 보고해야 하지만, 그와 별개로 루우와 지나는 꽤 친해졌다.
“그래. 상관이 카라코룸에서 활약한 소식이 적잖이 뿌듯했던 모양인데.”
지나는 루우의 짓궂은 물음에 베시시 웃기만 한다.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이 되는 그녀와, 대학생이 되는 루우는 겨우 한 살 차이가 날 뿐이지만…… 왠지 모르게 소녀의 그런 풋풋함이 루우도 미소 짓게 했다.
“어쩌면 폐하의 말씀이 옳을지도 모르겠어요. 이번에 무에투켄을 주살한 일…… 전에 역적 허동주를 주살했을 때가 떠오르거든요.”
“그게 너한테는 꽤 큰 의미였나 보군.”
“그렇죠. 그 덕분에 내전도 끝났고. 저도, 제 가족도 살아남았으니까.”
어두운 이야기다. 처음엔 견하도 철저히 이용할 목적으로 그녀를 감찰국에 끌어들였을 테고, 지나도 그걸 알고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발버둥 쳤겠지.
주견하의 최측근이 된 지금 시점에서 돌아보면 그랬던 적도 있었구나 싶지만…… 그때 그녀에겐 절박한 문제였을 것이다.
“그나저나 폐하께서도 꽤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화제를 돌리려는 듯, 지나는 갑자기 그렇게 되물어온다.
“짐이?”
지나는 끄덕인다.
“뭐 이제 몽골에서의 골치 아픈 일이 하나 끝났으니까.”
거짓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 이유인 것도 아니다.
세계대전 이후의 카라코룸은…… 루우의 아버지, 시레문 카칸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도시다.
도시에 이런 감정이입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카라코룸은 마치 루우에겐 없는 형제 같다는 생각도 든다. 감회가 없을 수는 없다.
아버지에 대한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던 것 같은 느낌도 들고.
하지만 이건 지나에게 들려줄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루우 개인의 가슴 속에 묻어둬야만 할 이야기다.
그래서 루우도 화제를 옮긴다.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인 문제로.
“고려군의 카라코룸 주둔, 카라코룸의 특별 행정 구역 편성 문제에 관해 힘을 써달라고 제국최고회의에서 나가서 한 번 정도는 호소해야겠지.”
“네. 형식적인 문제라고 해도, 그걸 보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황제와 태사를 비롯한 각 정파들의 합의가 이미 마련된 상황에서, 루우가 하는 말은 제국최고회의 의원들을 향하는 게 아니다.
제국최고회의에 황제가 나가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런 상황 자체를 보고 들을 ‘주변국’들을 향해 하는 말이다.
특히 게레센제와 울제이에게.
숙부들도 우리가 이렇게 나오면 뭔가 반응을 보이겠지.
그 반응이 어떨지는 함부로 예측할 수 없지만, 정면에서 반발하긴 힘들 것이다.
이제 몽골의 정세가 안정 국면으로 돌아섰으니, 키타이와 낭키아스에서 지속되는 한족 봉기 진압에 집중할 때다.
그 진압에는 고려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고.
“볼로드 타이시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어. 카라코룸 문제에 대해 칸발리크 정계는 어떻게 반응하는지, 정보를 수집해둬야겠지.”
***
울제이의 반응은 당혹 그 자체였다.
“형님은 나에게 카라코룸 함락을 부탁하지 않았던가?”
그럴 심산으로 자신을 칸발리크로 끌어들이고, 전쟁성 장관에게 군의 사령관까지 맡기지 않았던가.
그러나 게레센제는 도움이 필요했던 결정적 순간에 침묵해버렸다.
만약 울제이와 미리안이 대치한 국면에서 게레센제가 미리안에게 ‘경고’ 비슷한 거라도 보냈다면 상황은 아주 달라졌을 것이다.
그게 부담된다면 울제이에게 적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카라코룸을 접수하라는 명령이라도 확인하듯 내려줬다면, 미리안은 크게 곤란해졌겠지.
하지만 게레센제는 그 어느 쪽도 고르지 않았다.
그는 그 결정적인 순간에 울제이가 카라코룸을 바라만 보게 했다.
게레센제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가?
그 순간 카라코룸을 울제이가 점령했을 때 거둘 이익과 손해를 저울질했던 걸까? 미리안이 카라코룸을 점령하든 울제이가 점령하든 카간 자신은 ‘혼란을 수습한 카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울제이가 영웅이 되느냐, 미리안이 영웅이 되느냐’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게레센제는 울제이가 영웅이 되도록 내버려 두진 않을 듯하다.
“아니, 차라리 잘 됐다.”
울제이가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카라코룸을 함락시켰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게레센제는 어떻게든 울제이의 공을 축소하고 자신의 공을 부풀렸겠지.
따라서 괜히 기력 소모해가며 카라코룸 공략에 매달리기보다는, 일단 이 정도 선에서 물러서자.
게레센제 카간의 신하로서 거둔 첫 공 치고는 이것도 작은 건 아니다.
이걸 기반으로 삼아서, 칸발리크 정부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늘려나가자.
“이번에 내가 지휘한 장병들 일부는 확실히 포섭해볼 수 있겠군.”
그들 중에는 이번에 게레센제가 보인 행보를 답답하다 여기는 이도 있을 것이다. 대체 왜 진격을 멈춘 거지? 고려 태사가 와서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데, 카간께선 왜 아무런 말씀도 없으신 거지?
일단은 별 불만이 없는 듯 얌전히 굴면서, 조용히, 착실하게 세력을 불려 나간다. 형이나 루우 테무르가 좋아하는 여론전도 이번 기회에 배워둘 필요가 있다.
외세의 눈치만 보는 카간, 이라든가.
정쟁에 희생된 불운한 영웅 울제이 칸, 이라는 식으로.
“때에 따라선……”
볼로드와 접촉해볼 수도 있겠다. 볼로드가 루우 테무르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있다면 어떤 시점에든 반드시 게레센제와 충돌한다. 그 상황 자체를 이용해서 볼로드와 협력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
“그것도 그렇지만.”
울제이는 키타이에 두고 온 자신의 참모들을 떠올린다. 그 그리운 얼굴들은 몽골 본토에 차출되고 남은, 부족한 병력과 물자로 어떻게든 한족의 봉기를 억누르고 있다.
“그 노고를 치하하고, 본격적으로 한족 봉기 진압에 나서야겠지.”
어찌 되었든 키타이는 자신의 영지다. 물질적, 정치적 기반이다. 따라서 카라코룸이 함락된 현시점에서, 울제이의 최우선 과제는 몽골 국내의 안정이 아니라 키타이 문제의 해결이다.
칸발리크 정계, 키타이 한족 봉기, 두 가지 문제의 병행.
“자, 누구에게든 힘든 싸움이다. 엄살 피울 틈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