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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242화 (242/541)

제압(16)

밤.

무에투켄을 비롯한 공화국의 주요 관리들은 몰래 비밀 탈출로를 걸어 황궁, 아니 공화국 수립 이래 통령궁이라 바꿔 부른 곳 밖으로 나선다.

정정해야 할 말은 통령궁 뿐만이 아니다.

주요 관리들…… 이 아니라,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도망치지 않고 남은 관리들’이다.

이들이 아직도 무에투켄 곁에 남은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어설픈 모조품 공화국이라 해도 자신의 이상을 다 바친 나라이니만큼 끝까지 함께하고자 하는 자들이 있다. 무에투켄에 대한 개인적인 의리를 지키고자 하는 자들도 있다.

그 외에도 배신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쓸모를 입증하지 못한 자들, 아직 다른 꿍꿍이를 품고 이 상황과 무에투켄을 계속 이용해보려는 자들도 남았다.

이도 저도 아닌, 타성에 젖어서 따르고 있을 뿐인 자들도 있고.

어쨌든 분명한 건, 빠져나갈 사람들은 다들 진즉에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자리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무에투켄은 남은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고, 누가 오지 않았는지 생각해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훗날을 기약합시다. 이 늙은이는 이대로 고국을 떠나면 다시 돌아올지 알 수 없으나, 여러분은 아직 젊습니다. 반드시 돌아와 뜻을 펼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래도 통령답게 나지막하고 짧은 연설로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으려 한다.

그 말에 누군가는 그나마 예의를 갖춰 끄덕이고, 다른 누군가는 그냥 외면해버린다. 그런 사람들은 아마 어떻게 앞날을 헤쳐나갈지 열심히 머리 굴리고 있겠지.

무에투켄도 그런 속내쯤은 들여다볼 수 있었지만, 굳이 탓하지 않았다.

이 상황에 따라 나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거다. 이런저런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도 어떻게든 보듬고 도망쳐서, 망명 정부라도 꾸리게끔 해야 한다.

“……각하, 계속 움직여야 합니다.”

“음.”

마치 탈출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이 통령궁 부지 밖으로 나서자마자 폭도들의 공격이 시작된다.

그동안 대치만 하고 있던 골목마다, 통령궁 앞 광장에서, 마치 통령궁을 조여오듯 거칠게 총알을 퍼부어온다.

“이건……! 정보가 샌 건가?”

경호 책임자가 악문 잇새로 그렇게 중얼거리자, 무에투켄은 그에게 손을 내젓는다.

“이 상황에서 밖으로 소문이 새어 나가지 않는 게 더 이상할 걸세. 그래도 우리의 구체적인 경로까지 눈치채진 못했을 테니, 빨리 탈출하지. 시간이 지나면 저들도 대략적인 탈출 경로를 좁혀낼 수 있을 테니까.”

무에투켄의 말이 맞다. 이건 시간 싸움이다. 어찌 되었든 이 도시를 탈출하면 무에투켄의 판정승.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무에투켄을 추격하면 폭도들의 완전한 승리.

“……남겨두고 가는 사람들이 마음에 걸리는군.”

무에투켄이 낮게 중얼거리는 말. 그 말은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기도 힘들었지만, 누군가 들었다고 해도 그게 진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늙은 통령이 뒤에 남은 병사들의 운명을 생각하며 눈물을 삼키는지, 아니면 시간벌기라는 쓸모를 다하길 바라는지.

병사든 간부든 뒤에 있는 통령궁을 지키기 위해 최후의 저항을 한다. 죽음을 각오한 자도 있고, 그냥 인생이 그런 거라며 남은 자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통령 없는 통령궁을 지키는 중이라는 걸 알면 어떤 기분이 들까?

비참할까, 분노할까, 절망할까, 좌절할까, 부정할까.

“차라리 잘됐습니다. 우리의 탈출을 안 병사들이 동요하게 두는 것보다는, 정신없이 적의 공격을 상대하도록 두는 게 낫습니다.”

측근 한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지금 상황에선 현실적인 말이기도 했다. 그들의 희생 혹은 개죽음을 발판삼아 탈출해야 한다.

탈출 경로는 황궁 건물 밑으로 이어진, 중세 시절에 만들어졌다가 여러 차례 개축한 터널이었다.

돌벽과 돌바닥의 냉기 속에서 허연 입김을 내뿜는다. 그 입김을 보며 무에투켄은, 이곳이 수도이던 먼 옛날에도 이 통로를 이용한 황족이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저 자신의 처지를 어디에 비교해볼까 싶어 해 본, 부질없는 생각이다.

여기가 칸발리크나 동명이었다면 비밀 지하철을 통한 탈출로도 있었겠지. 하지만 카라코룸의 지하철은 계획상으로만 존재한다.

시레문 카간이 살아있었을 때 그 계획을 실현하는 공사가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그것도 공화국 선포 및 내전 발발과 함께 흐지부지되었다.

이제 카라코룸의 주인이 되는 자가 그 사업을 재개하든지 접어두든지 하겠지.

냉소적으로 생각을 끊어내며 무에투켄은 무거운 걸음을 옮긴다.

***

효윤과 태주갑, 그리고 그 휘하 병력을 거느리고 견하는 황궁의 동북쪽을 우회했다.

‘깡패 동무’가 가져다준 정보를 활용, 시민군이 공세를 시작하며 적의 전력을 묶어두는 사이 빽빽한 건물들 사이의 ‘틈’을 타고 이동한 것이다.

일단 교전이 시작되자 사령부의 리안과 김천열도 능청스러운 연기를 시작했다.

“카라코룸 내 ‘소요’가 일어났다?”

“정확히 어떤 종류의 소요인지는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만.”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건 당연하고, 사태를 진정시켜야겠죠. 울제이 칸의 말대로 ‘항복’을 받든 뭘 하든 하려면 일단 카라코룸의 상황이 안정되어야 하니까요.”

“그렇다면 병력 ‘일부’를 움직이시겠습니까?”

“그 정도는 울제이 칸도 탓하지 않겠죠. 물론 통보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사소한’ 일입니다. ‘우리 선에서 해결’하죠.”

이렇듯 유리한 조건들이 겹친 덕분에 견하는 별다른 방해 없이, 딱 시간에 맞춰서 황궁 밖으로 빠져나오는 무에투켄 일행을 포착할 수 있었다.

망설일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이단들은 각자 무기를 소환하고, 이단이 아닌 군인들은 챙겨온 화기로 무에투켄 일행을 겨눴다.

습격이 시작되자마자 저쪽에서 몇 사람이 쓰러졌지만, 저들은 이미 각오했었다는 듯 요인들의 몸을 내리누르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대응을 해 온다.

공화국 측 경호원 중에서 이단이 나와 총알을 막아낸다. 더는 화기가 통하지 않는다고 봐야겠지.

견하와 효윤을 비롯한 이단들이 적들 사이로 파고들어, 백병전을 개시한다.

견하는 검과 촉수를 능수능란하게 바꿔가며 적의 공격을 받아친다. 그러면서 적의 전력을 재본다.

실력 자체는 엇비슷하다. 그러나 기습과 동시에 부상을 입거나 죽은 사람이 꽤 된다. 게다가 저들은 요인들을 보호하며 싸워야 하지만, 자신들은 기회를 봐서 요인을 한 번 푹 찌르고 빠져나가면 그뿐이다.

황궁 부지에서 막 벗어난 이곳에는 정부 요인들이 숨을 만한 곳도 마땅치 않았다.

이런 이유로 전체적인 상황 자체는 적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무기를 들고 있던 손을 날리고, 멍하니 그걸 바라보거나 비명을 지르는 적의 목을 날린다. 묶은 머리카락 끝이 적의 피를 훑으며 또 하나의 칼날이라도 된 양 빙글 돈다.

효윤은 그 압도적인 돌파력을 제대로 발휘하며 적들을 하나하나 거꾸러뜨린다. 전투력 자체만 놓고 보면 루우에게도 뒤지지 않을 듯하다.

견하와 시선을 교환한다.

땀과 호흡, 그 사이로 아주 잠깐 시선이 오가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등을 지킬 수 있다.

이렇게 함께 사지를 헤쳐 나온 것도 어느새 2년. 두 사람의 전투 감각이 워낙 좋기도 했지만, 그 시간을 함께한 유대도 전투의 효율성을 높인다.

으깨지거나 베이거나 꿰뚫리면서 적들은 쓰러져간다. 수가 줄어들면 공화국 요인들을 지킬 여유도 줄어든다.

조심스레 우회해서 접근한 일반 병사들이 요인들을 사살한다.

나중에라도 신원을 확인해야 하니 얼굴을 쏘지 말라고 주의를 충분히 줬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요인들의 가슴이나 배 주변에 총을 갈겼다. 숨이 끊어지지 않은 자는 다소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았으리라.

적들의 저항이 좌절의 몸짓으로 바뀌어 간다.

마지막 남은 이단이 견하와 대치하다 뒤에서 날아온 총에 머리가 뚫려 죽었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이단인 만큼, 그 뒤에 지키고 있던 노인도 가장 중요한 자일 것이다.

견하는 다가서며 묻는다.

“당신이 무에투켄인가?”

적 경호원들이 다른 요인들의 경호마저 포기해가며 지키려 했던 만큼, 굳이 묻지 않아도 그 정체는 분명했다.

그저, 혹시나 하는 생각에 확인해 볼 뿐이었다. 이 자는 무에투켄이 아니고, 난전 중 이미 죽은 몸뚱어리들 사이에 있다든가.

혹은 ‘깡패’가 물어다 준 정보가 잘못되어, 신수덕처럼 자신들이 모르는 경로로 이미 탈출해 버렸다든가.

노인은 감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더니, 답을 내놓았다.

“그렇다.”

견하의 눈이 노인의 얼굴을 확인한다. 사진으로 미리 봐 뒀던 무에투켄의 얼굴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더 이상의 문답은 불필요하다.

마지막 예우조차도.

이쪽은 다른 시체들 신원 파악 후 곧바로 이 자리를 이탈해야만 한다.

그러면 내일 아침 공화국 측에서 이들의 사망을 확인하고, 뒤이어 울제이는 일을 그르쳤음을 알게 되고, 늦어도 며칠 뒤에는 리안이 적의 저항을 무너뜨리고 카라코룸에 입성하겠지.

견하는 검을 든 팔을 뒤로 빼며 자세를 갖춘다. 의연하게 앉아 있는 노인의 가슴을 겨냥한다.

적의 우두머리를 죽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허동주에게 그러했듯이, 단숨에 가슴을 찌르고 그 목숨을 끊는다.

끊어야, 했는데.

뒤쪽,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의 검은 그림자가 노인을 덮친다. 단검으로 푹푹푹 찔러대는 소리가 나고 피가 바닥에 점점이 튄다. 무에투켄은 이런 죽음은 대비하지 않았는지, 비명인지 한탄인지 모를 소리를 내다가 축 늘어졌다.

당황한 견하가 멈칫하고, 병사들이 총구로 그림자를 겨누고만 있는 사이, 일을 마친 그가 몸을 일으킨다.

고개를 돌리자 견하도 아는 얼굴이 보였다.

토칸.

단검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끄트머리를 칼날처럼 변화시킨 짧은 촉수였다.

견하는 사살하라는 손짓을 했다. 그 자신도 그대로 달려들면서.

만약 견하가 흔한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면 거기서 병사들을 대기시키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눠봤을 것이다.

대체 왜 토칸이 무에투켄을 죽였는지, 앞으로는 어쩔 셈인지 물어봤겠지.

하지만 주견하에게 토칸은 새로 나타난 사냥감일 뿐이다. 사냥감의 동기나 장래는 중요하지 않다.

목을 물어뜯는 게 사냥개가 할 일이지.

토칸도 그런 예상은 충분히 하고 있었기에, 견하가 발을 내딛자마자 빠른 속도로 어둠 속을 달려 도망쳤다.

***

상상 이상으로 무능한 자였다.

무에투켄이 옹립될 당시에 대단한 기대를 한 건 아니지만, 이제 도저히 봐줄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실망의 대상은 무에투켄 뿐만이 아니었다.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지도부라는 작자들도 모조리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토칸은 도망치면서도, 지도부 인사들을 어떻게 도륙 낼지 궁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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