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압(15)
울제이, 볼로드, 무에투켄. 셋 중 하나는 없애야 한다는 리안의 말은 단순한 시험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세 사람 중 하나는 죽이는 방식으로 매듭을 풀고자 한다. 그래서 견하는 가장 무난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도 적합한 무에투켄의 이름을 살생부에 올렸다.
“무에투켄의 죽음은, 일단 도움은 될 거예요.”
“내가 카라코룸을 장악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
그 정치적 명망을 이용하기 위해 내세운 인물이라고 해도, 무에투켄이 자유 공화국의 구심점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특정 정파의 리더가 아니라 그저 명망 높은 사람을 옹립했다는 것은, 자유 공화국이 여러 정파의 혼합물임을 말해준다.
물론 그중에서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세력이 가장 크기야 하겠지만, 우월한 세력으로 자리 잡진 못했을 것이다.
이런 경우 옹립된 명망 높은 사람은 여러 정파가 적절한 선에서 균형을 맞추게끔 하며, 그들을 하나의 이름 아래 묶는 역할을 한다.
그런 무에투켄을 죽인다면 아무리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 공화국의 목숨을 붙잡고 늘어져도 금세 지리멸렬해지고 말 것이다.
그러면 반란군을 섬멸하고 카라코룸을 완전히 제압하는 것도 수월해질 테고.
“뿐만 아니라, 울제이가 계속 반란군과 접촉하면서 우리를 방해하는 상황도 끝낼 수 있겠죠.”
카라코룸 남쪽에서 미리안이 지휘하는 부대와 울제이가 지휘하는 부대의 대치는 계속되고 있다.
둘 다 ‘도저히 참아줄 수 없는 선’만 간신히 넘지 않은 채, 카라코룸을 장악할 기회만 엿본다.
미리안 쪽에선 울제이가 시민군의 무장해제를 강제하거나, 반란군이 울제이 밑으로 들어가면 ‘최후의 선’을 넘은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울제이 쪽에선 미리안이 반란군을 완전히 짓밟기로 결정하고 카라코룸을 향해 공세를 시작할 때 ‘최후의 선’을 넘은 것으로 간주할 테고.
양측이 최후의 선을 넘지 않는 것은, 순전히 지금 내전을 또 다른 내전으로 발전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리안이 약간의 타협도 없이 허동주를 몰아붙여 끝내 죽였다는 사실도 이런 교착 상태의 원인이 되었다. 미리안은 협박하면 물러나는 여자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싸워보자고 달려드는 여자니까.
그녀도 몽골 내전이 더 큰 혼란상에 빠져드는 건 바라지 않겠지만, 그런 상황이 왔을 땐 혼란 속에서 날뛰길 망설일 성품도 아니다.
여기에 더해, 게레센제의 모호한 태도가 울제이의 행동에 제약을 가했다.
아마 리안과 견하가 획책했던 칸발리크에서의 모략, 동명에서 루우가 했던 연설 등이 제대로 기능한 모양이다.
울제이로선 답답한 노릇이겠지만, 뭐, 억울하진 않겠지. 그 야심은 어느 정도는 사실일 테니까.
울제이 칸 때문에 반란군을 단숨에 무너뜨리지 못하는 이쪽 입장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눈 가리고 아웅으로 몰래 반란군을 지원하는 건 분명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도 잡을 수 없는 데다 저쪽은 ‘이미 항복을 받아냈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항복을 인정할 수 없으며 반드시 죄를 물어야겠다는 건 이쪽의 고집이다.
여하튼 이 대치 국면을 해소하고, 카라코룸에 확실히 리안의 깃발을 꽂기 위해선 무에투켄이 죽어야 한다.
울제이도 무에투켄이 죽으면 반란군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질 테고, 지리멸렬해진 반란군과 새로운 교섭 루트를 찾으려 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도 포기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수가 없겠지.
그렇지만 어떻게 무에투켄의 위치를 파악하고, 죽일 것인가?
구체적인 실행 방법은 막막했다.
단신으로 적의 방어선을 돌파해 카라코룸 황궁에 숨어 있을 무에투켄을 참살한다? 아무리 견하가 강력한 이단이라도 중화기가 겹겹이 배치된 방어선을 뚫고 들어갈 수는 없다. 효윤과 함께 돌진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무에투켄을 비롯한 공화국 주요 인사들에겐, 기본적으로 이단인 경호원들이 깔려있을 터.
같은 이단과의 전투는 견하에겐 부담이 크다.
그렇다면 ‘기갑사’ 하나. 예를 들어 이번에 새로 개량된 C-31에 탑승할 수 있다면, 아주아주 무리해서 돌파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리안은 어째서인지 기갑사 탑승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
아니, 이유는 대충이나마 짐작된다.
그걸 탈 때마다 자신은 이상해진다.
왼팔을 쓰다듬는다. 이 옷소매 아래에 있는 팔은 자신의 것이지만, 확실히 ‘인간의 구성품’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자신은 인간이 아닌 건가? 혹은 인간이 아닌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는 건가?
파멸인 같은 사례를 참고할 수도 없으니 그저 홀로 이 변화를 견뎌야 한다.
이상할 정도로 무덤덤하다. 당혹감조차 들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이런 상황을 걱정하는 리안이나 효윤, 루우를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잡생각은 그만두자.
지금 견하에게 필요한 건 ‘무에투켄을 잡아낼 방법’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
견하의 고민은 오래지 않아 다른 방향에서 해결책이 나왔다.
이번에는 몽골 사회주의자들 쪽에서 고려군에 연락을 취해온 것이다.
견하는 효윤과 함께 접선 장소로 나갔고, 전처럼 ‘깡패 동무’와 만났다.
“자유 공화국 통령 무에투켄이 탈출 준비를 한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견하는 효윤과 얼굴을 마주 봤다. 깡패가 가져온 소식에 대한 반가움을 굳이 감출 필요는 없었다.
그 표정들을 보며 깡패는 제대로 된 소식을 가져왔다 여겼는지 씩 웃는다.
“황궁 뒤쪽, 그러니까 북서쪽으로 도시를 빠져나갈 생각인 것 같은데…… 우리가 전력을 집중해도 고작해야 반란군의 전력을 분산시키거나, 경호 병력 일부의 발을 묶어두는 정도일 겁니다.”
“즉, 무에투켄의 목을 베는 건 우리의 일이다?”
“그렇죠.”
아주 좋은 시점에 들어온 합동 작전 제안이다. 저쪽도 미리안이 이끄는 정규군이 울제이의 눈치를 보느라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을 답답하게 여겼을 테고, 그래서 나름 활로를 찾아봤겠지.
“실행은 언제쯤입니까?”
“모레.”
상당히 여유가 있다. 내일 하루 바짝 준비하면 최상의 상태로 습격할 수 있겠지.
깡패 동무는 황궁과 그 주변의 지리 정보, 경호 병력의 면면과 무장 상태, 무에투켄을 따라나서는 공화국 측 주요 인사들에 대한 정보들까지 상세히 알려주었다.
말을 마치고 나서는 잘 정리된 서류까지 건네준다.
상당히 유용한 동맹이다.
받은 서류를 넘겨보다 견하도 고개를 갸웃하며 웃었다.
“반란군 내부에 상당히 쓸모 있는 정보원을 심어두셨나 보군요.”
“그런 것도 있고, 이런 상황이면 ‘자발적인 정보원’도 나타나기 마련이죠.”
리안이나 견하가 현 상황을 답답하게 여기듯, 무에투켄 정권 내부에도 현 상황을 답답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조급해진 이들 눈에는 울제이가 자신들을 이용하기만 할 뿐, 실질적인 도움은 줄 수 없을 것처럼 보이기도 했겠지.
그리고 그런 이들이 살길을 찾아 이쪽으로 찾아오기 마련이다.
사회주의자들이나, 고려의 미리안이 그들의 목숨을 구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견하는 쓰게 웃었다.
“그나저나, 이런 식으로 도시에서 도망쳐서 어쩔 셈인 걸까요?”
“고려 및 몽골 정부와 적대하면서까지 이들의 망명을 받아줄 나라는 없겠죠. 알티샤흐르든, 카자흐든, 그보다 멀리 있는 카잔이든.”
“북극 상공을 가로질러 아즈텍으로 가기도 그럴 테고…… 아즈텍이 이들을 받아들여 줄 만큼 여유 있는 상황도 아니죠. 그렇다면 역시.”
“네. 잠깐 국외로 피신해 있을 예정이라 해도, 결국 울제이에게 의존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곤란하죠.”
해외로 망명해도 곤란하다. 신수덕이 살아서 해외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흘리지 않아도 될 피를 얼마나 흘렸던가.
신수덕이 사주한 동명역 쿠데타, 허동주 잔당의 민간인 학살, 그 게릴라의 토벌작전…… 그리고 그 보복을 위해 아즈텍에 파견되었다 전사한 요원들에 이르기까지.
만약 지금 무에투켄이나,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라 하는 자들이 망명에 성공한다면 같은 일이 벌어질 게 뻔하다.
‘내전’이 진행 중인 지금 제거해야 뒤탈이 없다. 가혹한 것 같아도 그게 희생자를 줄이는 방법이다.
뭐 설령 놓쳐도 그대로 몽골에 들어올 수 없게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다. 어찌 되었든 수십 년이 지나면 그들도 그저 역사 기록의 일부가 될 테니까.
하지만 살아서 울제이 밑으로 들어간다면?
견하가 천손민족협회 잔당을 자신의 휘하에 넣은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견하는 천손민족협회 잔당에 철저한 패배감을 맛보여 주고, 허동주를 죽여서 그 사상을 꺾고, 신수덕을 내쫓은 업적을 자신의 카리스마로 삼았다.
그 결과 천손민족협회 잔당들을 철저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무에투켄,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주요 인사들이 ‘산 채로’ 울제이 밑으로 들어가면 ‘패배감’은 맛보았을지 몰라도 절대로 무력해지진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번 패배는 ‘긴 여로의 일부’로 여겨지겠지. 무에투켄이나 주요 인사가 죽질 않으면 ‘사상’은 꺾이지 않는다. 울제이에겐 그들을 통제할 카리스마가 부족하다.
그런 그들이 울제이를 통해 칸발리크 정계로 진출하기라도 한다면…… 그보다 위험한 일이 또 있으랴.
“정말, 울제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어처구니없는 몽상가라고 밖엔 평할 수 없겠죠.”
울제이가 자유 공화국 지도부를 실컷 이용한 뒤에 토사구팽할 속셈이라면 또 모를까.
그러나 울제이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는 이상 최악의 상황은 생각해 둘 필요가 있다.
자신을 몽상가로 여기는 몽상가는 없다. 모든 몽상가는 자신이 대단히 현실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울제이는 지금도 칸발리크 정계에서 싸워나가는 중이죠. 그런 싸움에선 동맹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고. 울제이가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나 자유 공화국 인사들과 손잡고 자기 파벌로 끌어당기면 어쨌든 덩치는 키울 수 있으니까요.”
군대든 국가든 당이든 일단은 ‘숫자’다. 질은 그다음의 문제다.
“울제이의 성품이나 행적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들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을 겁니다. 실제로 유용하기도 하겠죠. 칸발리크에서 각종 시위나 운동을 조직할 때 써먹기도 좋고, 무엇보다도 몽골 민족주의의 최전선에 서 있는 자들이니까.”
그렇기에 지금 키타이나 낭키아스에서 일어나는 한족 반란 진압에도 활용할 수 있다. 이들의 독특한 ‘알타이 민족주의’는, 이른바 전쟁 범죄 민족인 한족을 가축보다 높은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잔혹한 진압 작전의 선봉에 세울 수도 있겠지.
“그러나 저는 절대로 그런 사태를 용인할 수 없습니다.”
견하의 눈에 깃드는 살기에, 깡패 동무의 눈이 가늘어진다.
“칸발리크 테러를 보고도 그런 자들을 받아들인다는 사고도 이해할 수 없거니와, 그런 자들이 대가를 치르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향후 비슷한 일을 얼마든지 저지를 겁니다. 인간의 ‘이’는 웬만해선 바뀌지 않는 법이니까요.”
잠깐 침묵. 견하는 표정을 다잡는다.
“이번에 죽입시다. 확실히. 남김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