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압(13)
“그대의 말은…… 일반적인 충성의 개념과는 동떨어져 있군.”
“신의 불손을 탓하시며 파면하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허나 폐하,”
폐하는 신의 진솔한 답변을 원치 않으셨습니까? 그런 말을 하는 볼로드 앞에서 게레센제는 말을 잃었다.
“혹여나 신이 폐하를 고려의 황제 폐하를 위한 징검다리 정도로 여긴다고 생각하신다면, 그 역시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반역이라 말씀하셔도 기꺼이 듣겠습니다. 그러나 신이 그런 생각을 품은 것은, 신은 몽골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게레센제는 어찌하면 좋은가.
답은 간단하다. 게레센제도 이미 잘 알고 있다.
게레센제 본인이, 루우 테무르보다 더 몽골에 이익이 되는 지도자임을 증명하면 그걸로 끝이다.
볼로드는 그가 더 나은 군주라 판단하고 충성하겠지. 그게 몽골에 대한 충성이 될 테니까.
이제 세상은 중세가 아니다. 중세적 가치가 여전히 중요한 규칙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해도, 중세가 아님은 너무나 명백하다.
“신은 그리하여 다시는, 지난 세계대전같은 참극은 반복하지 않을 겁니다. 이 나라가 그런 곤경과 굴욕에 처하지 않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 누구도 감히 이 나라를 멸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도록, 너무나도 상식에서 벗어나 망상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도록 똑똑히 모든 자들의 뇌에 새겨넣을 것입니다.”
다소 격해진 말투를, 볼로드는 완벽하게 바로잡는다. 공손히 예를 갖춘다.
게레센제는 별다른 말을 더 하지 않고, 손짓으로 물러갈 것을 고했다.
이 대화로 두 사람은 서로의 속내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특히 게레센제는 왜 볼로드가 그런 행동을 하는지, 형이 왜 볼로드를 정치적 동반자로 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게레센제는, 여전히 어떻게 그와 합치를 볼지 마음을 굳히지 못했다.
그를 내칠지도 결정하지 못한다. 아까 떠올린 답은 실행에 옮기기엔 너무도 막연했다.
그래서 게레센제는, 새너두를 떠나 자신이 직접 카라코룸을 공략한다는 선택지를, 고르지 않았다. 그는 새너두에 머물며 정치권 장악에 더 힘을 쏟기로 했다.
***
“……우리는 이제 ‘다이온’이라는, 이상적인 동아시아 평화체제의 성립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국주의적 정복의 과정에 있는 게 아닙니다. 대공황을 수습하기 위해 우리가 꾸준히 실행에 왔던 관세동맹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이 연방 안에서 우리는 더 큰 자유와 안전을 동시에 누릴 것입니다.”
황제 루우는, 복구된 방송 설비 앞에서 전국으로 퍼져나갈 라디오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적극 동조하는 자도 있을 테고, 반대하는 자도 있겠지. 혹은 황제의 옥음이라면 일단 눈물부터 흘리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반응을 보이든, 영향력 자체는 크다. 어쨌든 황제의 연설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연설은 특히 더 그랬다.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이 어설프게 시작된 이래, 일반 국민을 향한 연설에서 처음으로 ‘다이온’이 언급된 연설이었기에.
이번 연설을 위해 루우는 정말 열심히 연습했다. 특히 아주 약간 남아있던 몽골식 억양을 완전히 빼버리기 위해 가정교사까지 고용해서.
원래 루우의 고려어는 고급 어휘까지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유창했지만, 그만큼 심혈을 기울여 이 연설을 준비했다는 말이다.
“허나 다이온 연방이 싹을 틔우기도 전부터, 우리의 이상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킬 음모를 꾸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려와 몽골, 동아시아 각국의 ‘보호자’인 황제로서 말합니다. 이러한 이기적 행동은 즉각 중단되어야 합니다. 다이온은 동아시아 각국의 집단 안보 체제입니다. 우리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큰 집입니다. 자유와 평화를 누리기 위한 요새입니다. 결코 누군가의 이기심을 충족시킬 도구가 되어선 안 됩니다…….”
루우는 울제이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진 않는다.
다이온 연방이 얼마든지 삐걱대도 상관 없는 미리안이야 울제이와의 극한 대립도 마다하지 않지만, 지금 루우는 울제이와의 정면충돌을 피해야 한다.
그래도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듣겠지. 루우는 울제이의 지금 행동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우회적이고 온건한 태도지만, 울림은 큰 경고다.
상당히 긴 연설을 마치고 나온 루우의 이마엔, 땀이 촉촉이 맺혀 있었다.
연설의 길이도 길이었지만, 그보다도 상당히 긴장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태사는 연설할 때 전혀 떨리지 않는 걸까.”
연설을 마치고 방에서 나오는 루우 앞엔 한재연과 유지나가 서 있었다.
그들은 오랜만에 황제와 만나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일을 보고하러 왔다. 그런 일들은 지금 몽골에 나가 있는 견하를 대리하는 것이기도 했다.
루우의 물음에 대한 답은 지나가 했다.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전에 전당대회 때 연설하는 걸 보면 연설의 귀재 같은 느낌마저 드니까요. 하지만 폐하도 잘하시던 데요?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떨리셨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음. 아니, 역시 태사가 대단한 사람인 거야. 그게 허세가 아니라면 말이지만. 나는 간신히 허세로 얼버무렸을 뿐이고.”
대충 그런 잡담을 나누며, 세 사람은 걸음을 옮겼다.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 그 하위 계획 중에서도 「화림 계획」…… 다시 말해 ‘카라코룸 천도 계획’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
이번엔 재연이 대답한다. 이 문제를 오래 담당해온 사람이기도 하니까.
“네. 지금 태사가 그 공략 작전에 참여하고 있는 것도, 저희 국장이 거기 가 있는 것도 모두 그 계획의 일환입니다.”
“카라코룸을 점령한다. 이후 고려군이 ‘평화유지군’이라는 명목으로 일부 주둔한다. 현지의 ‘시민군’과 협력해 도시의 치안을 유지한다. 전후 도시의 행정은 시민이 주도하는 특수한 공동체 조직과 거기서 선출한 의회가 맡는다. ……계획 자체는 그럴싸하네.”
어떤 대표를 선출하든 고려의, 태사 미리안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순 없다. 직접 통치는 어려우니, 한동안은 이런 식의 간접적 지배로 만족해야겠지.
“그 후에는 칸발리크 정부와 협상을 벌여 특수행정구역으로 만든다. 이른바 ‘자유도시’? 음, 그쪽은 아직 계획이 잘 안 잡혀 있던 것 같은데.”
“예. 아무래도 특이한 사례다 보니. 해외의 특수행정구역들을 참조하고는 있지만…….”
“선례도 중요하지만, 참고할만한 선례가 없다면 우리가 직접 시행착오를 거쳐 가며 만드는 수밖에 없지. 아니면 그 ‘시민’들, 그러니까 배후에는 몽골 사회주의자들이 있겠지만, 그들에게 좀 더 의지해보는 것도 한 방법이고.”
아마 초기 바라트 연방에서 나왔던 노동자 공동체 같은 게 구현되지 않을까 싶지만, 칸발리크 정부의 견제와 고려의 적절한 통제가 있다면 제멋대로 폭주하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과제가 아직 남아있어.”
황제가 목소리를 낮추자 재연과 지나의 표정도 더욱 진지해진다.
“너희 국장은 ‘권력’ 문제에만 집중해서 카라코룸을 연방의 새로운 수도로 정한 모양이지만, 권력 이전에 중요한 게 있어. 아니, 그것도 결국 권력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네. 민심의 문제니까.”
그 어떤 체제에서라도 민심은 중요하다. 민주주의 체제는 말할 것도 없고, 독재 체제에서도 민심을 무시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가 가진 여러 안전장치가 없는 만큼, 독재자는 ‘민심’말고는 의지할 게 없으니까.
독재자가 민심을 끌어들이지 못하면 ‘통제’하려 드는 건 그래서다. 그러다 그마저도 못하면 파멸로 가는 거고.
“고려의 황제가 몽골의 카간이 된다. 고려가 몽골을 비롯한 동아시아 각국을 ‘다이온 연방’이라는 이름 아래 병합한다. 물론 여기에 다들 열광은 하겠지. 그런데 수도는 ‘몽골 내륙에 있는’ 카라코룸이다. 이건 어떻게 받아들일 것 같아?”
고려 본토를 버리고 스스로 ‘몽골화’되러 가는 건 아닌가, 그런 의심이 사람들 사이에 솟아나진 않을까?
“한 소장이 차용한 ‘알타이 민족’ 개념, 장기적으로 보면 분명 쓸모는 있을 거야. 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야. 그런 조작된 민족 관념이 사람들 사이에 파고들려면 수십 년 정도로도 부족해.”
백 년 단위로 잡아야 한다. 아니면 뭔가…… 계기가 있거나.
“이런 과제들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충분한 설득력으로 국민을 이해시켜야 해. 그 전에 카라코룸 천도는 무리야.”
“그 문제에 관해선…… 지원자들을 중심으로 고려인의 카라코룸 집단 이주를 생각해봤는데요.”
“좋은 아이디어긴 한데, 한 소장, 그거야말로 ‘식민’이라는 단어의 뜻을 그대로 옮긴 게 아닐까.”
식민. 그 말 자체를 그대로 풀어보면 ‘백성을 심는다’는 뜻이다.
식민지. ‘백성을 심는 땅’이다. 애초에 식민지의 원리 자체가 그렇다. 해외의 넓은 땅을 정복하고, 거기에 자국민을 이주시켜 개척하게끔 한다.
“그 경우엔 몽골인들이 식민지 취급을 당했다고 반발할 우려가 있어.”
신중하게 접근해볼 문제야. 황제는 그렇게 말을 끝맺었다. 재연은 끄덕인 뒤, 차후 해결해야 할 과제로 머릿속에 넣어뒀다.
그 후, 황제에게 묻고 싶었던 것을 질문한다.
리안과 견하와 루우 사이를 오가면서, 그 미묘한 신경전과 친밀함 사이에서 비롯된 의문을.
“폐하, 외람되지만…… 지금 진행되는 과정이 모두 폐하의 뜻이 부합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이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지나가 주의를 주려 하지만, 루우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녀는 계속 말해보라 턱짓한다.
“「화림 계획」은 이대로 진행되면…… 엄밀히 말해서 카라코룸은 폐하의 도시가 아니라 태사의 도시가 됩니다. 저는 폐하께서 이 점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분명한 방침을 원한다.
동군연합이든 다이온이든 어쨌든 그 구심점은 루우다. 그녀가 없다면 이 계획 자체가 실행되지 않는다.
어찌 보면 그녀가 즉위함으로 인해 이 계획이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견하는 루우를, 리안의 권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동료, 아니 심하게는 도구로 여기는 건 아닐까.
루우가 그걸 알게 된다면…… 언젠가 큰 갈등의 불씨가 될 것이다. 그걸 두고만 볼 순 없다.
루우는, 피식 웃었다.
얼핏 쓴웃음 같기도 한 웃음이었다.
“그 문제에 대한 짐의 답은 이래. ‘모든 걸 다 가질 순 없어’. 설령 황제라도 말이지.”
나라와 나라가 통합하는 과정이다. 온갖 불협화음이 있을 예정이다.
“적당한 선에서 양보하고 타협하지 않으면 이 통합은 불가능해. 몽골인들에게도, 고려인들에게도, 심지어 한족에게도 불만이 어마어마한 통합일 거야. 당장 이상적인 국가를 이뤄서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게 불가능한 건 말할 것도 없으니, 초점은 ‘불만을 어떻게 줄여나갈까’에 맞춰야겠지.”
그 과정에 있다면, 카라코룸 정도는 태사 미리안의 도시로 내어줘야 한다.
“짐은 그 정도는 이미 양보할 생각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