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압(11)
“외부에서의 정치적 압력으로 우리 태사와 고려군이 철수할 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깡패는 간신히 퉁명스러운 어조를 억누른다. 철수? 언제하는 거요? 그런 질문으로 초조함을 드러내선 안 된다.
해야 할 질문은 따로 있다.
“‘정치적 압력’이라고 한다면?”
“칸발리크에서 돌아가는 상황일 수도 있겠고, 고려 내에서 태사나…… 우리 폐하의 뜻에 반대하는 움직임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건 이상한 이야기다.
깡패도 고려 내부 사정을 대충은 안다.
황제의 노골적인 몽골 황위 계승 야망을 내심 반대하는 세력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내며 방해하는 여론은 형성되기 어렵다.
고려 국민 대다수가 동군연합, 그것을 통한 자국의 위신 상승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국입헌당, 고려국민당, 공산당과 사회민주당 모두가 황제 지지를 선언한 상황. 즉 표면적으로 고려는 상하가 일치단결하여 이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세부적인 차이는 있겠지. 그러나 외교 정책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태사 본인이 직접 카라코룸 공략에 나섰다. 카라코룸 관련 정책이 향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몰라도, 이 도시를 장악한다는 큰 방향 자체가 ‘고려 내에서 일어난’ 움직임에 방해받을 수는 없다.
따라서 초점은 ‘칸발리크’에 맞춰야 한다.
하지만 그래도 이상한 이야기다. 왜냐하면…….
“카라코룸 내에서도 우리가 펼친 공작으로 울제이의 입지를 흔들고 있습니다만?”
“그러니까 ‘만약’이라는 겁니다. 울제이와 현 카간은 근본적으로 상대를 불신할 수밖에 없기에 끈끈한 동맹 관계로 나아갈 가능성은 거의 없죠. 하지만 울제이에 대한 ‘공작’이 누군가의 소행이라는 눈치 정도는 채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누군가’는 누구인가, 하는 생각으로 이어지겠군요.”
“그리고 이 상황에서 가장 이득을 보는 쪽이 배후에 있을 것이다, 는 생각은 하겠죠.”
울제이의 입지가 약화되면 이득을 보는 건 명백히 고려와 미리안이다. 몽골의 사회주의 세력도 덤으로 이익을 보고.
“카간은 분명 울제이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겠지만, 일단은 고려군에 ‘울제이에 대한 협조’를 공식적으로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몽골인의 문제는 몽골인이 해결하겠다는 식으로 말이죠.”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새삼 이 주견하라는 자가 얼마나 영리한지 감탄한다. 자기네가 편리한 쪽으로 대화를 몰고 가면서도, 어쨌든 동의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태사가 카라코룸에 상주할 수 없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지금 몽골에 파견된 고려군도 어느 순간에는 교대를 위해 귀국해야 합니다. 설령 카라코룸을 여러분의 ‘자치’와 태사의 영향력이 동시에 작용하는 특별행정구역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해도…… 그걸 위해선 태사가 동명으로 한 번은 가야 합니다.”
“틈이 생기겠군요.”
견하 역시 ‘깡패 동무’라는 사람에게는 감탄하고 있다. 말 그대로 어딘가의 주먹패 같은 느낌이지만, 머리는 엄청나게 좋다. 뭐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위험한 삶을 살아갈 수 없었을 테지.
“그 ‘틈’이 생긴 사이에, 울제이나 칸발리크에서 뭔가 음모를 꾸밀 테고?”
“칸이든 카간이든 우리 황제 폐하의 영향력을 몽골에서 배제하고 싶어하니까요.”
고려의 군사력과 경제 규모를 생각하면, 그리고 내전이 막 끝나 그 원조가 간절한 몽골의 입장에선 ‘단교’로까지 이어질 극단적 행동을 취하진 않으리라.
하지만 저항 정도는 하겠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몽골 내에서 고려의 영향력이 모조리 제거되어 있을, 그런 은밀하고도 점진적인 저항을.
“울제이의 영향력이 커질 위험성 각오하고, 일단 고려군 축출을 우선할지도 모릅니다.”
“그다음은 우리겠군요.”
“네. 어찌 되었든 칸발리크의 기존 정치가들에게 당신들은 ‘위험한 불순분자’들이죠. 개혁보다는 당신들을 제거하는 게 안전하다, 그렇게 내다볼 수도 있어요.”
대표적으로 현 타이시인 볼로드가 그렇다.
일단은 좌익을 제거하고, 울제이 문제는 그다음에 생각해보자는 식으로 행동할 수도 있다.
“‘틈’을 이용해 울제이나 칸발리크가 뭔가 행동을 취한다면 우리 고려 입장에서는 쓴맛만 좀 보면 됩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피를 흘리겠죠.”
“이번에 울제이 칸이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방식을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어떤 구실을 붙여서든…… 상당한 규모의 학살이 되더라도 ‘시민군’이나 그 동조자를 처리하려 들겠죠.”
“우리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음을 저들도 눈치챘을 겁니다. 울제이와 타협할 여지도 없어요.”
깡패 동무의 이마에 주름이 진다. 깡패는 왼손으로 그 주름을 긁었다.
“그러면, 고려 측에서 내놓을 ‘제안’은 뭡니까.”
“우리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저와 태사께서 속해 있는 고려의 여당, 즉 제국입헌당에서는 일시적으로 ‘이중 당적’을 허용할 계획입니다. 외국인의 입당도요.”
이중 당적. 즉 제국입헌당 외의 당에 소속되어 있더라도, 제국입헌당 당원으로 들어오는 걸 허락한다는 말이다.
“고려 제국입헌당의 당원이 되어라?”
“그렇게 하면 누구도 여러분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죠. 여러분을 공격하면 그건 곧 제국입헌당, 즉 고려의 집권여당을 공격한 셈이고, 고려의 행정부는 이를 선전포고조차 없는 기습으로 간주할 테니까요.”
몽골 사회주의자들의 생명을 지키기에 이보다 확실한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 점은 깡패 동무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 뒤에 숨겨진 의도를 모른 척할 수는 없군요.”
“네. 우리는 당신들을 통해 몽골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길 원합니다.”
보호자는 보호의 대가로 자기 뜻을 어느 정도는 강제하고자 한다. 몽골과 카간의 보호자를 자처한 루우 테무르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말이다.
“그렇게 이용당하는 것보단, 우리가 죽음을 각오하고 저항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죽음이 많은 걸 남긴다고들 하지만, 죽으면 시체 이외에 무엇이 남습니까? 칸발리크는 여러분의 시체 위에서 마음껏 자기들 정책을 펼쳐나가면 그뿐입니다. 혁명가가 생존을 우선하는 게 뭐가 나쁩니까? 살아 있어야 혁명도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선문답 같지만 그 안에선 치열한 신경전이 오간다.
견하는 다가올 위협과, 제안을 받아들였을 시 얻을 이익을 제시하며 깡패 동무를 유혹한다.
반면 깡패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견하의 제안에서 뭔가 더 얻어내려 한다.
견하는 속으로 혀를 찬다. 다른 이익을 제시하는 수밖에.
“우리가 여러분을 이용하듯, 여러분도 제국입헌당 안에서 우리를 이용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당신네 총선거는 내후년…… 그러니까 33년에나 있을 예정 아닙니까. 외국인에게 의원 자리를 내줄 리도 없거니와, 설령 그렇다 해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우리가 영향력 있는 당원으로 자리 잡긴 어렵지 않을까요.”
“고려 내에서가 문제가 아니죠. 여러분은 ‘제국입헌당’이라는 이름을 달고 몽골 정계에 정식으로 입성할 수 있습니다.”
공산당이나 노동당의 이름으로 쿠릴타이 입성은 어렵다. 그렇다면 우회 루트를 택하는 건 어떤가? 엄연히 동맹국의 ‘집권 여당’인데, 그 몽골 지부를 ‘불법화’할 수는 없을 터.
“우리는 여러분을 이용해 몽골 내정에 간섭할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우리를 이용해 합법적으로 쿠릴타이에 들어가 영향력 확대를 꾀할 수 있죠. 어떻습니까, 이런 구상은?”
견하의 제안은 단순히 몽골 사회주의자들에게 제시하는 이득에서 머물지 않는다.
몽골 사회주의자들에겐 고려의 공산당이나 사회민주당에 입당한다는 선택지도 있기 때문이다. 그 선택지는 망설임의 요소가 더 적다.
다만 이들은 고려의 집권 여당이 아니기 때문에, 몽골 쪽에서도 부담 없이 이들의 정계 입성을 막을 수 있다.
한편으로 견하는 몽골 사회주의자들이 고려 내 범좌익에 가담해 ‘엉뚱한 자들이 성장할 가능성’을 없애려 한다. 그래서 고려의 공산당이나 사회민주당 제시할 수 없는 이익을 이들 앞에 보여준다.
“새로운 당의 건설과 조직화에 들어갈 자금, 그리고 여러분이 쿠릴타이에 들어가기까지 칸발리크에 가해질 정치적 압박. 그 모든 걸 약속드리죠.”
“그런 약속은 우리가 제국입헌당에 들어가면 당연히 따라와야 하는 조치요.”
그건 그렇다. 그 정도도 약속해주지 않는다면 방치나 다를 바 없다.
견하는 여기서, 씩 웃었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우리는 ‘내정 간섭’의 일환으로 볼로드 타이시를 실각시킬 계획입니다. 당연히 ‘다음 타이시’가 필요하겠죠.”
견하는 내심 루우를 지지해주는 볼로드의 지위를 유지하고 싶지만, 리안이 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아니 볼로드가 있는 한 이 몽골 범좌익 세력과의 연계를 이어나갈 수가 없다.
아쉽지만, 버리는 수밖에.
“그 말은……”
견하에게 좀 더 확실한 말을 떠보는 깡패 동무의 눈이, 미묘하게 커진다.
“다음 타이시는 여러분들 중에서 선출하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독립성’에 대한 보장도 되지 않겠습니까?”
깡패는 태연함을 가장하려 한다.
물론 그 흥분을 완전히 감추진 못한다. 혁명가의 삶 속에서, 그가 속한 당이 ‘정권’을 잡도록 해주겠다는 제안은 너무나도 매혹적이었기에.
그게 설령 자신들이 자본가에 제국주의자라 매도하는 집단의 제안이라 해도.
***
새너두의 행궁 안.
카간과 타이시의 첫 독대가 이루어지고 있다.
“형님과는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눠봤겠지?”
“예.”
피하지도 민망해하지도 않고 볼로드는 그렇게 답했다.
그 대답은 마치 신하의 숙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선대 주군이 죽으면, 신하는 그 후계자를 섬길 뿐이다. 그 후계자가 죽으면 또 다른 후계자를…… 신하의 육체적 한계가 허락하는 한 말이다.
볼로드는 아직은 젊었던 시레문 밑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고, 그의 든든한 정치적 파트너로서 성장해 타이시에 이르렀다.
시레문이 죽자 이젠 게레센제를 섬긴다.
“진솔한 이야기였나?”
모든 군주가 그러하듯 게레센제도 신하의 마음을 꿰뚫어 보길 원한다. 그 충성 맹세가 가식이 아니라 진심이길 원한다.
그러나 카간 즉위를 둘러싼 과정에서 겪었던 일들은, 볼로드의 진의를 의심하게 한다.
볼로드는 자신을, 루우 테무르의 즉위를 위한 ‘징검다리’ 정도로만 여기고 있진 않은가.
“진솔했기를 바랍니다. ……돌아가신 카간의 크고 깊은 뜻을 신(臣)이 어찌 한 조각이라도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예상했던 대로, 볼로드는 그런 모호한 대답을 한다.
게레센제는 볼로드와의 사이에 놓인 테이블 위로 시선을 옮겼다.
“흥미로운 신문을 입수했네.”
“……합법적인 신문은 아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