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압(10)
견하는 대원수 리안의 방 근처에 자신의 방을 배정받았다. 길게 머물진 않겠지만, 고려 태사의 최측근에게 그냥 일반 막사에서 지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리안의 방에서 자신의 방까지, 그 짧은 길을 걸어가는 견하의 표정이 급변한다.
환희.
숨길 수 없는 환희가 미소로 번져 나오는 것이다.
-이번 일로 확실히 태사부의 세력은 강화된다.
리안이 가까운 시일 내에 제국입헌당 당수에서 물러날 일은 없을 테고, 따라서 제국입헌당의 규모 확대는 그대로 태사 미리안의 힘이 된다.
몽골에 대한 고려의 영향력 확대. 이는 내전과 대공황으로 지친 고려 국민들에게 ‘승리’를 맛보여줄 테고, 33년으로 예정된 총선거에서 제국입헌당에 유리하게 작용하겠지.
-설령 전에 누나가 말했던 대로 잠시 태사 자리에서 물러난다 해도, 제국최고회의 의장 자리를 쥐고 있다면 당의 힘이 필요하다.
어쨌든 강력한 제국입헌당의 세력을 등에 업었다면, 설령 안세규가 태사 자리에 올라도 무서울 것 하나 없다.
오히려 안세규가 미리안이나 제국입헌당의 눈치를 봐야겠지.
게다가…… 그 혜택은 제국입헌당 당원이자 태사부 소속인 주견하 자신에게도 돌아온다.
-특히 이번에 몽골 사회주의자들을 감찰국으로 끌어들이면, 감찰국의 세력도 확대된다.
물론 이들의 성향이 기존 ‘천손민족협회’ 출신들과 충돌하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된다.
하지만 그건 일단 끌어들이고 나서 조율해야 할 문제다. 세력이 커지는 것 자체는 환영할만한 일이다.
이제는 황제 루우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창구로 이용해 견하가 직접 몽골 문제에 개입할 수도 있을 터.
뜻하지 않은 곳에서 자신의 야망을 밀어붙일 수단이 쏟아져 들어온다.
어찌 환희하지 않을 수 있으랴.
리안이 이번 일을 통해 어떤 결과를 거두길 원하는지, 그걸 모르진 않는다. 그러나 기회가 왔을 때 잡지 않을 수도 없고, 솔직하게 기뻐하지 않을 수도 없다.
자, 그럼 남은 문제는 실제로 저들과 어떻게 교섭하느냐인데.
리안과 울제이의 협상이 결렬되고, 카라코룸의 전투는 한층 격렬해졌다고 한다.
리안이 지휘하는 연합군은 ‘시민군’과 함께 최후의 제압 작전을 수행하고 있지만, 적 역시 ‘최후의 저항’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말은 정해졌다. 알타이 자유 공화국은 망하고, 카라코룸은 리안의 군대가 접수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을 것이다. 시가전 자체의 어려움도 있지만, 아무리 세력이 작은 적이라도 격렬하게 저항하면 제압에 그만큼 수고가 많이 든다.
도시 전체가 전장인 상황에서, 시민군 측 대표 혹은 몽골 사회주의자들의 대표와 만나려면 어느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
혼자 갈 수는 없다. 도시를 가로지를 때 벌어질지도 모르는 돌발 상황에 대처하려면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물론 교섭 과정에서 견하를 보조해줄 사람도 필요하고.
“지나나 재연이, 혹은 이익서를 데려왔으면 딱 좋았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들은 지금 고려에 있다. 고려 내부에서 영향력을 키울 뿐만 아니라 「계획」의 실행을 위해서도 매일 한 걸음씩 전진하고 있다.
그런 그들을 여기까지 불러서 일을 맡기기는 어렵고, 견하가 현지에서 해결하는 수밖에.
“그러고 보니 마침……”
리안부터 찾아가느라 얼굴을 못 봤군.
칸발리크에서 헤어진 후 또 오랜만에 본다. 견하는 효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내가?”
“그래. 같이 가줬으면 하는데.”
효윤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된다. 리안의 최측근에서 경호를 맡고 있지만, 그거야 태주갑 중령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맡길 수도 있다.
업무 보조는 워낙 리안이 수재다 보니 효윤의 도움이 없어도 무리가 되진 않고, 무엇보다도 김천열을 비롯한 사령부의 장성들이 리안의 참모가 되어주고 있다.
“갈 수는 있겠는데, 왜? 정확히 어떤 일인데?”
“예전에 재연이와 교섭하러 갈 때처럼, 옆에서 좀 도와줬으면 하는 거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가 하고 효윤은 생각에 잠겼다가, 그때 일을 떠올리자 웃었다.
“그때 네가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땐, ‘쟤가 도대체 어쩌자는 건가’싶었어.”
견하도 마주 웃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솔직히 나도 협상이 결렬되면 어쩌나, 조마조마했어.”
“그런 것 치고는 배짱 두둑하던데?”
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견하의 그런 면모는 매몰차면서도……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도와줄 게 있나? 그냥 옆에서 무게 잡는 거면 몰라도.”
“만약을 위해서야. 그냥 무게만 잡아주는 게 아니라 정말로 전투에 말려들 수도 있으니까.”
효윤은 그렇겠다며 끄덕였다. 이단이 강력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총과 화포가 위험하지 않은 건 아니다.
전투 현장은 최대한 피하겠지만, 돌발 상황에서 적어도 두 사람은 필요하다. 서로에게 주의를 준다든가 하는 식으로.
물론 ‘반란군’과의 전투도 전투지만, 견하가 말하는 ‘만약’은 따로 있었다.
견하가 몽골 사회주의자, 혹은 시민군 대표를 만나 할 제안은 리안이나 견하에겐 참 좋은 이야기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반대로 말해, 제안을 받는 상대방에겐 마냥 좋은 건 아니라는 말이다.
이쪽에 적당히 장단점이 섞여 있어야, 저쪽에서도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가 된다.
견하의 제안을 저쪽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지금으로선 명확히 알 수 없다.
사실 견하가 건넬 제안은 ‘도저히 카라코룸에서 버틸 방법이 없으니, 고려 쪽으로 망명해라’라는 말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
그냥 망명도 아니고, 고려의 여당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라는 것이다. 망명은 받아들여 주겠지만, 우리 통제하에 있어라. 그런 제안을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시민군, 그리고 그들을 지휘하는 몽골 사회주의자들이 원하는 건 카라코룸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걸 전부 포기하고 도시를 빠져나오라는 건…… 호의적인 제안이라기보다는 약속 파기로 여기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저들은 여차하면 견하를 인질로 잡아, 리안이 여기서 자신들과 계속 함께 싸워줄 것을 강제하려 들 수도 있다.
물론 순순히 인질로 잡힐 견하는 아니기에, 그러한 시도는 피바다라는 결말을 맞이하겠지만.
그러나 서로 피를 보게 되면 견하에게도, 몽골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좋지 않다.
견하는 견하대로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과 「화림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될 테고, 몽골 사회주의자들은 중요한 협조자를 잃게 된다.
따라서 적당히 무게를 잡아줄, 효윤 같은 사람이 같이 가줘야 한다.
“어떻게 설득할지 생각은 해 봤어?”
효윤의 물음에 견하는 피곤한 목 근육을 풀듯, 고개를 양쪽으로 천천히 번갈아 기울였다.
“필요성을 잘 말해봐야지.”
리안이 여기에 상주할 수는 없다. 그녀는 고려의 태사다. 따라서 일단은 본국으로 돌아간 뒤 카라코룸을 관리할 누군가를 파견할 것이다.
그 사이에, 아주 잠깐의 틈이 생긴다.
울제이 정도면 그 틈을 이용해 몽골 사회주의자들을 일소하고, 겸사겸사 리안의 영향력도 제거하며 카라코룸을 장악할 수 있다.
그 틈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설령 그런 일이 발생해도 몽골 사회주의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의 제국입헌당 가입이 필요하다.
그렇게 설득할 생각이다.
“견하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만, 이용당하는 쪽도 이용당한다는 사실 자체는 눈치챈다는 걸 잊지 마.”
견하는 끄덕였다. 중요한 충고다. 흔히들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움직이면 ‘나는 똑똑하고, 상대는 멍청해서’라 착각하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상대는 멍청해서가 아니라, 그런 선택 말고는 더 나은 대안이 없기에 내 계획대로 움직여주는 것뿐이다.
상대는 무척 똑똑하기 때문에 기회만 생기면 내 계획에 반기를 들 거라 보는 게 옳다.
견하가 그들을 이용해 몽골 정세에 개입하려는 속내 정도는 이미 다 읽혔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양쪽 모두가 만족할만한 말을 해서 그들을 설득할까.
견하의 고민이 깊어진다.
***
시가전은 곳곳에서 일시적인 교착 상태로 접어들었다.
화포를 통한 무지막지한 제압이나, 공군의 폭격을 기대하긴 어렵다.
반란군 측은 말할 것도 없고, 도시를 ‘온전한 상태’로 갖고 싶은 리안이나 시민군 측도 그 사용을 꺼린다.
전차나 기갑사를 이용하면 비교적 쉽게 상대방이 설치한 방벽을 무력화하고 전진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리안이 지휘하는 기갑 전력 대부분은 남쪽으로 돌려졌다.
기세등등한 울제이의 군세를 가로막기 위해서.
고도인 카라코룸을 둘러싸고, 혁명에 혁명이 겹쳤다. 내전에 내전이 겹쳤다.
내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로의 이익을 위해 갈라서서 노려보는 그 모습을 본다면, 어떤 애국자가 한탄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래도 산발적인 교전은 벌어진다.
박격포와 기관총을 통한 제압 시도는 여전히 계속되고, 희생자도 나온다.
무엇보다도 교전 시 잔혹성은 더하면 더했지, 전혀 모자라지 않았다.
신 앞에서 모두가 형제임을 가르치던 네스토리우스파 교회가 불탔듯, 인간이 인간을 사냥감으로 보고 살육하는 일이 매일 반복된다.
애초에 서로를 같은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반란군은 시민군을 도축할 짐승들 정도로 여기고, 시민군은 반란군을 사람 껍데기를 쓴 학살자 정도로만 생각한다.
어느 쪽이 정답이라 말할 순 없지만, 어쨌든 견하나 효윤 입장에선 ‘우리 편’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전장에서 중요한 건 아군의 생명이지, 범인류적 윤리가 아니니까.
씁쓸함을 안고, 그런 전장 근처를 바싹 스치듯 지나, 견하와 효윤은 접선 장소로 향했다.
몽골 사회주의자들은 견하와 안면이 있는, ‘깡패 동무’를 접선 장소로 내보냈다. 상대도 이 협상이 좋은 분위기로 흘러가길 바란다는 말일 터.
“상황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침투조를 투입해서 적 후방을 교란할 작전을 짠다고도 하지만, 투입 루트를 찾는 것부터 잘 될지 어떨지 모르죠. 찾는다 해도 성공할지 어떨지도 모르고.”
‘깡패’는 인삿말처럼 기밀을 늘어놓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밀을 가장한 기만일 것이다. 어떻게든 ‘적’에게 흘러 들어가도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고.
그래서 견하도 적당한 인사말로 받는다.
“성공했으면 좋겠군요. 빠르게 적을 제압해서 카라코룸 장악을 기정사실로 만들면, 울제이가 저렇게 날뛸 수는 없을 테니.”
“그야, 고려의 태사께도 좋은 일이 되겠죠.”
인사말은 그쯤에서 그친다. 다들 다음에 이어질 본론을 누가 꺼낼지 눈치를 본다.
“‘중요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만일’을 대비한 제안이라는 걸 먼저 명심해주셨으면 합니다.”
깡패 동무의 눈썹이 기묘하게 뒤틀린다. ‘만일’이라고는 하지만 저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만일’의 가능성을 높게 치고 있다는 뜻.
또한 상대방이 ‘실행될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이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그건 ‘실행되었을 경우 이쪽은 재미없는’ 이야기라는 뜻이기도 하다.
“들어는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