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압(9)
“연인이니까 더 잘 알겠지만, 타이시는 이용당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냥 호락호락 당해주고만 있는 사람은 아니야.”
“알아. ‘허용해주고 있는’ 거지.”
리안의 갑작스러운 소환 명령.
의도를 짐작할 수 없는 이 명령을 앞에 놓고, 황제와 감찰국장은 태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짐이 황제까지 되긴 했지만, 여전히 타이시는 무서워. 타이시에게 우정을 느끼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야.”
무시무시한 정치가야, 라고 루우는 덧붙인다.
“그 두뇌, 그 결단력, 그 의지. 언젠가는 짐도 그 경지에 이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선 어림도 없어. 그건 견하 너도 마찬가지지.”
그렇게 말하고선 루우는 싱긋 웃었다.
“연인이니까, 그런 연인의 모습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나?”
소년의, 아니 이제 슬슬 남자라 불러야 할까. 어쨌든 그의 얼굴이 살짝 빨개진다.
“아무리 폐하의 하문이어도 답하고 싶진 않은데.”
루우는 됐다는 듯한 태도로 손을 내저었다.
견하의 빨개진 얼굴을 보고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쨌든 이런 식으로 견하 안에 남은 ‘인간성’을 확인하고 안도한다.
연인을 향한 사랑. 이것만큼은 잃는 날이 오지 않기를.
루우는 말을 돌린다.
“그 속내를 다 읽어낼 순 없겠지만, 짐작은 해볼 수 있지. 지금 타이시 곁에는 효윤이도 있어. 그런데 굳이 너를 부른다는 건…… 효윤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거야.”
“효윤이가 할 수 없는 일은 드물 텐데.”
전투력으로는 배영훈이 이끄는 기갑사 부대에, 최효윤이 데리고 간 태주갑 이하 이단 부대도 있다. 군사적 참모로서는 김천열이 곁에 있다.
“능력 문제라기보다는 성격 문제겠지. 효윤이도 눈앞에서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적은 인정사정없이 찢어발기지만…… 뭔가 좀 더, ‘못된 계략’을 꾸미는 데에는 네가 능숙하지 않을까.”
“못된 계략이라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견하는 말을 멈추고 생각한다.
그런 계략이 필요한 상황인가?
“전쟁장관과 외무장관한테서 들은 바로는, 지금 누나가 이끄는 부대가 카라코룸 남쪽에서 울제이 칸의 부대와 대치 중이라던데?”
카라코룸 시가전은 중지된 상황. 견하는 그 틈을 타 알타이 자유 공화국 요인들이나,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 카라코룸을 빠져나가는 건 아닌가 우려하고 있다.
특히 그…… 토칸이라는 놈은 확실히 죽여야 하는데.
“대치 국면의 돌파구가 필요한 걸까?”
“그게 어떤 돌파구일지도 짐작이 안 되는데.”
고려 본국으로 돌아온 지금, 견하는 재연과 함께 「화림 계획」의 완성에 힘을 쏟는 중이다. 리안이 카라코룸을 접수하면 서서히 실행에 옮길 예정이라, 일정이 조금 촉박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쨌든 그 바람에 국외 문제는 완전히 리안에게 맡겨두느라 신경 쓰지 못했다. 실책이라면 실책. 리안이 알아서 잘하겠거니, 하는 게 아니라 견하 나름대로 정보를 수집했어야 하는데.
카라코룸 장악 자체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면, 이젠 직접 가서 리안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현장을 둘러보는 수밖에 없다.
루우도 같은 결론을 내린다.
“여기서 짐작이 안 된다면 가보는 수밖에.”
끄덕이는 견하에게, 루우는 말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섣부른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아.”
그것은 리안의 신경을 거스르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고, 전투에서 무리하게 나서지 말라는 충고이기도 했다.
장갑과 긴 소매로 감춘 왼팔을 쓰다듬으며, 견하는 대답했다.
“주의하지.”
***
기차와 트럭을 정신없이 갈아타며,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카라코룸을 향해 간다.
리안의 사령부로 불려간 견하는 그 공기에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리안은 그를 연인으로 부른 게 아니다.
리안의 신경이 팽팽한 만큼, 사령부 내의 공기도 바짝 긴장되어 있다.
“감찰국장.”
성도 이름도 포함하지 않은 호칭. 그 부름에 견하는 발뒤꿈치를 딱 붙이며 자세를 바로 했다.
“명령을.”
“뭔가를 죽여야만 돌파구가 생길 것 같다. 의견을 듣고 싶군.”
직접적인 그 명령. 견하는 오랜만에 척추를 타고 흐르는 차가운 감각에 전율한다.
“후보는, 선정해두셨습니까.”
“울제이 칸, 볼로드 타이시, 무에투켄 통령. 셋 중 적어도 하나는 없애야 일이 진행될 것 같은데.”
“각하께서도 이미 생각해두셨겠지만, 죽음은 최종수단입니다. 죽여도 ‘뒤탈이 없다’고 판단되지 않으면 죽일 수 없습니다.”
“그렇지.”
“셋 모두 죽이고 나서 뒷감당이 어려운 상대입니다.”
“죽이기 어렵다고는 말하지 않는군.”
“어렵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요.”
훗, 하고 그제야 리안은 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견하는 긴장을 풀지 않는다.
무엇을 원하는가. 그의 연인…… 아니 상관은.
“뒷감당이 어렵다, 그건 발각되었을 때를 말하는 건가?”
“그것도 그렇지만…… 설령 발각되지 않는다 해도 누가 했는지 ‘짐작’하지 못하진 않을 겁니다. 용의자는 손쉽게 좁혀지겠죠.”
그러면 그게 고스란히 정치적 타격, 아니 타격까지는 아니라 해도 부담으로 이어진다.
정치적 부담은 정치적 운신의 폭을 좁힌다. 다음에 필요한 행동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데. 하나씩 예를 들어볼까.”
“먼저 울제이 칸. 지금 대치 중이라고 들었는데, 죽이면 확실하게 각하가 용의자가 됩니다. 그의 죽음은 키타이 전역에 불필요한 분란을 일으킬 수가 있어요. 키타이가 한족 통제력을 잃고 전복되어도 좋지 않고, 키타이의 울제이 충성파들이 반기를 들어도 역시 좋지 않습니다.”
“좋아. 언젠가는 제거한다 쳐도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다음?”
“볼로드 타이시는 황제가 칸발리크에서 유지하고 있는 연락망입니다. 적극적이진 않지만 우리 황제를 지지하고 있죠. 이 사람을 죽여도 각하가 용의선상에 오르는 일은 없겠지만, 어쨌든 고려 편인 사람을 죽이면 우리에겐 손해입니다. 죽이는 것보단 실각 수준으로, 향후 유용성을 생각해 살려두는 게 좋다고 봅니다.”
볼로드의 영향력이 어쨌든 칸발리크 정계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죽이고 나서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가 없다.
리안은 이번엔 별다른 평을 덧붙이지 않았다. 조용히 ‘그다음’이라고 말할 뿐.
“무에투켄 통령은 일단 죽이는 데 수고는 많이 들고 돌아오는 이익이 적습니다. 구심점으로서의 인망은 이번 내전을 끝으로 사라지는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후환을 없앤다’고 말할 가치도 적죠. 무엇보다도 늙은이입니다. 우리가 손을 쓰지 않아도 자연히 죽어줄 겁니다.”
“흠.”
리안의 눈동자가, 똑바로 견하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제야 견하는 리안이 ‘세 사람’에 관해 물어본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세 사람에 대한 의견을 말하는 ‘견하’를 관찰하는 것이다.
좀 더 지혜로운 답변은 없었을까 후회하는 사이, 리안의 입이 열린다.
“굳이 골라야만 한다면?”
견하는 ‘예?’하고 되물으려던 걸 간신히 억눌렀다. 그런 얼빠진 대답은 원하지 않으리라. 대신 잠깐 생각에 잠긴다.
“……그렇다면, 저는 무에투켄 통령을 고르겠습니다.”
“왜지?”
“지극히 사적인 감정에 의한 겁니다. 저는…… 그런 테러를 일으킨 집단을 단 한 놈도 살려두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으니까요.”
리안의 눈에 약간의 놀라움이 스친다.
“잔혹하지만 인간적인 이유군.”
리안은 ‘그건 희생된 칸발리크 시민들 때문이야, 아니면 아버지를 잃은 루우 때문이야’라고는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명령을 하달한다.
“무에투켄의 관저에 침투해. 효윤이를 비롯해서 태주갑 중령 이하 이단 부대까지 통솔하도록.”
“전선을 돌파하라는 말씀이신가요?”
“카라코룸에 대한 최종 공세를 시작할 거야. 이제 우리가 바람 한 번 불면 적의 방어선은 날아갈 지경이라…… 물론 공세는 울제이의 동의 없이 진행돼.”
“격하게 항의할 텐데요.”
“항의는 하겠지만 울제이는 움직이지 못해.”
그렇게 말하며 리안은 신문을 내밀었다. 견하는 그 신문을 받아든다. 몽골어로 적힌 신문이지만, 1면에 찍힌 문구 정도는 띄엄띄엄 읽을 수 있었다.
“악랄한 모함이네요.”
쿡, 하고 리안은 드디어 장난스럽게 웃었다.
“글쎄? 엄밀히 말하면 모함은 아니지. 이게 모함이라고 느낀다면 울제이는 자기 자신도 속이는 희대의 사기꾼이야.”
“그렇다면 ‘밝혀지면 곤란한 진실’이라고 정정하는 게 좋겠군요.”
팽팽하던 공기가 느슨해진다.
리안은 견하의 옆에 나란히 서서, 손을 잡았다.
“기갑사 부대는 내줄 수 없어. 기갑사에 탑승하는 것도 허락할 수 없고. 아무리 비상 상황이 온다 해도…… 기갑사에 탑승하기보다는 차라리 퇴각해. 알겠지?”
리안의 말은 명령이면서, 동시에 부탁이다.
견하는 슬쩍 시선을 피한다.
“효윤이나 루우한테 들으셨나 보네요.”
“주견하.”
리안은 견하의 얼굴을 붙잡고, 자기 쪽을 똑바로 바라보도록 했다.
“나는 너를 좋아해. 그러니까 이건 단순한 잔소리가 아니야. 당연한 걱정이지.”
“……알아요.”
이 세상에서, 이제 그녀 말고 이토록 그를 걱정해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알았으면 됐어.”
그대로 견하의 머리를 끌어당겨, 가슴팍에 안는다.
견하는 약간 당황했다가, 허리를 숙인 어정쩡한 자세 그대로 리안의 등에 팔을 둘렀다.
“그 밖에도 처리할 일이 있어.”
“뭔데요?”
“어디까지나 만약을 대비한 건데, 여기 사회주의 계열 당원들을 감찰국 직원으로 삼아서 피난시킬 준비를 해줘.”
게레센제든 울제이든 볼로드든, 하는 짓을 봐선 도저히 개혁에 응할 사람들이 아니다. 카라코룸을 온전히 리안의 소유로 만들 순 없고, 어쨌든 몽골군이 들어오기는 할 텐데 이 작자들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다.
잠시나마, 피난시키긴 해야 한다.
“태사부 소속이 되면, 이들에 대한 공격은 고려에 대한 공격이 되니까.”
“보호막으로는 확실하네요.”
잠깐, 말없이 숨을 들이마신다. 리안의 향기를 폐포 구석구석에 순환시키겠다는 듯.
견하는 고개를 들었다.
“한 단계 더 나가보죠.”
“어떻게?”
“어쨌든 고려에 계속 망명 상태로 있는 건 저들도 받아들이기 힘들 거예요. 돌려보내긴 해야죠. 제국입헌당 당원 신분으로.”
“제국입헌당 몽골 지부 같은 걸 만드는 건가.”
“이중 당적 같은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거야 누나의 말만 있다면 간단하게 해결될 것 같은데요. 어쨌든 ‘사회민주당’이니 ‘공산당’이니 하는 이름을 달고 몽골 정계에 나서는 것보다, ‘제국입헌당’이라는 이름으로 정계에 나서는 게 낫겠죠.”
리안이 뒤를 봐주는 게 명백해지니, 카간이라 해도 함부로 건들지 못한다.
“몽골의 개혁은 이들에게 맡겨두는 거예요. 게다가 이렇게 하면, 누나가 전에 말했던대로 ‘타이시 볼로드를 대체할 정치인’도 거기서 뽑아낼 수 있죠.”
리안은 견하의 말을 되새겨본다. 리안은 당의 이름만 빌려줄 테니 이것 때문에 고려의 내정간섭이 심해질 일은 없을 것이다.
“획기적인 세탁이네.”
리안은 그렇게 말하며 견하의 코에 자신의 코를 맞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