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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234화 (234/541)

제압(8)

옹긴 북쪽에서, 칸과 태사가 만났다. 울제이는 통역을 데려왔지만, 리안은 그런 건 필요 없다는 듯 유창한 몽골어를 구사했다.

“태사께선 대체 무엇을 노리시는 겁니까?”

울제이는 사회주의자 대표단과 회담할 때처럼, 제대로 된 의전도 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기엔 두 사람의 대치가 너무나도 팽팽했으니까.

“노리다니요?”

날카롭게 치뜬 눈만큼 날카로운 되물음.

미리안은 울제이가 선택한 어휘의 무례함을 지적한다. 울제이는 사과도 뭣도 없이 그 지적을 무시하고 말을 잇는다.

“이른바 시민군이라 자칭하는 주민들, 그리고 반란 정부의 무장만 해제하면 모두 끝날 일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진격을 가로막는 건 내전을 장기화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효과도 없습니다.”

“우리를 돕기 위해 일어선 시민의 자발적 봉기를 적대시하는 게 더 비효율적이란 생각은 안 하시는지?”

“시민? 태사가 말씀하시는 시민들은 ‘비무장 민간인’을 말하는 겁니다. 언제 폭도로 돌변할지 모르는 무장 집단이 아니라.”

“칸께선 현실적인 문제를 간과하시는군요. 반란 정부의 폭력적 약탈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무장도 못 한다는 겁니까? 무장을 해제하면, 저들을 지켜줄 방책은 있어요?”

“이미 태사와 내가 저들을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항복한다는 저들의 수장은 여전히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는데요. 칸의 말씀이 맞다면 벌써 나타나서 스스로 죄를 청해야 할 것 아닙니까?”

“태사께서 비켜주시든가, 아니면 저들이 무장을 해제해야 무에투켄도 소굴에서 기어 나오겠죠!”

“지금 기어 나오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꼭, 내가 아니라 ‘울제이 칸께만 항복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런 이유는 없습니다. 태사께서 지나치게 강경하신 데다, 반란 정부는 그들 나름대로 ‘시민군’의 보복을 두려워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리안은 그녀 특유의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말씀해보시죠. 무슨 거래를 한 겁니까? 반란 정부의 어떤 계략에 놀아나고 계시는지?”

“놀아나다니요……!”

서로 비아냥만 주고받을 뿐, 대화에 진전이 없다. 애초에 둘 다 뭔가 타협을 보겠다는 생각으로 나온 게 아니다.

상대가 어떤 꿍꿍이인지, 읽어보러 나왔을 뿐.

울제이는 흥분을 가라앉힌다. 리안의 말은 의도가 뻔한 도발이다. 격한 감정을 드러내면 감추고 있던 의도도 함께 드러날 위험이 크다.

그래서 울제이는 원론적인 이야기로 말을 돌리기로 한다.

“내전이 끝나고 국가가 정상화되려면 시민은 무기를 들고 일어서는 게 아니라 생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생업으로 돌아갈 터전을 지키려면 시민은 무기를 들고 일어서야죠.”

리안은 준비됐다는 듯 맞받아친다. 울제이는 코웃음쳤다.

“태사께서 언제부터 민주주의의 이상에 눈뜨셨는지 모르겠군요.”

“모르셨습니까? 고려 제국은 내전을 통해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났는데. 저 역시도 민주적 선거를 통해 선출된 공무원입니다?”

말은 잘하는군.

리안과 루우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을 모르는 울제이에겐, 미리안 역시 루우의 첨병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냉소를 담아 묻는다.

“태사께서 이유를 물으셨으니, 저도 이유를 좀 물어보죠. 태사께선 어떤 의도로 저 ‘시민군’을 감싸고 도시는 겁니까?”

“시민을 지키는 건 군인의 의무 아닙니까? 저 역시 군인으로서 명예롭게 저들을 지키고 있습니다만?”

“좀 더 솔직해져 봅니다, 우리. 태사는 카라코룸에 ‘해방 영웅’으로 입성하고 싶으신 것 아닙니까? 향후 칸발리크에서 우리 몽골에 원활한 ‘내정간섭’을 하기 위해?”

리안의 표정이 굳었다.

울제이는 ‘도발이 효과적이었나?’라고 순간 생각했지만, 곧 그 생각을 철회했다.

“너는 어찌 감히 그런 말을 하는가?”

울제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너’라니! 이 무례한……!”

‘계집이 감히’라는 말은 간신히 삼킨다. 리안은 자신의 도발을 간단히 되받아 쳐냈다. 보통이 아니다. 여기서 욕설이라도 퍼부었다간, 저 여자는 그걸 구실로 온갖 공격을 해오겠지.

그게 물리적인 공격일지 혹은 다른 공격일지는 모르겠지만.

“‘너’를 ‘너’라고 칭하는 데 무슨 문제가? 왕작(王爵)이 아무리 높다 한들 황제의 태사보다 높지는 않을 터.”

여전히 소녀 같은 얼굴을 갸우뚱하며, 묻는다.

“아니면, 하극상이라도 할 텐가?”

울제이는 혀를 찼다. 이제 그는 독립국 키타이가 아니라 엄연히 몽골 제국의 제후왕이다. 게레센제 카간에게 가서 충성을 맹세하고, 내무장관과 전쟁장관직을 수락했던 게 이런 족쇄가 될 줄이야.

그렇다면, 전쟁장관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주지.

“하극상이라니, 어폐도 이만저만이 아니군요, 태사. 몽골과 고려 두 나라가 동맹국이고, 상호 공직자의 급을 인정해주고 있다곤 하나, 내가 그쪽에 항의하는 걸 하극상이라 불러선 안 되겠지요.”

그렇게 말하곤 눈을 들어 리안 뒤에 선 장성들을 본다. 고려군 장성들도 있지만, 현재 리안 휘하에 있는 몽골군 장성들의 얼굴도 보인다.

“전쟁장관으로서 명령합니다. 장군들은 즉시 내 사령부로 오시오. 카라코룸 공략을 위한 재편성에 들어가겠소.”

하지만 장군들의 표정은 싸늘했다.

울제이의 얼굴에 당황이 스치고 지나간다. 리안이 그런 얼굴에 던지듯 말한다.

“전쟁장관이긴 하지만 참모총장은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카간의 명령을 받고 왔소. 내가 내리는 재편성 명령은 카간의 뜻이오.”

“글쎄. 카간께서 그 정도로 막대한 권한을 칸에게 내리시진 않았을 텐데. 칸이 쥔 지휘권은 기껏해야 지금 이끄는…… 남부 전선 병력 아닌가?”

“그러는 태사야말로 외국인일 뿐 아닙니까.”

리안은 돌아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손을 뒤로 뻗었다. 그녀 뒤에 서 있던 장군 하나가 서류를 건네준다.

“단순 외국군 지휘관이라고만 볼 순 없겠지. 카간께서 쿠릴타이 추대를 받으실 때, 어떤 약속을 하셨는지 못 들으셨나?”

“고려 황제께서 ‘몽골과 카간의 보호자’라고 해서……!”

“‘보호자’라는 말은 형식뿐인 게 아니오, 칸. 우리 폐하의 외교가 그렇게 허술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리안은 종이를 앞으로 내민다. 위엄이라곤 없는 간략한 명령서. 하지만 거기에 찍힌 건 틀림없는 고려 황제의 옥새다.

“불과 얼마 전 일이긴 하지만, 나는 고려에서 파견된 군사고문단의 대표로 임명됐지. 쿠릴타이에 참관할 ‘제국최고회의의 대표’이기도 하고요.”

물론 리안은 고려 제국이 몽골의 내정을 간섭하며 종속시키길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서슴없이 이용하는 인간이다.

“군사 고문이라고 해서 내 명령권에 간섭할 권리는……”

“동맹국이 잘못된 군사적 판단을 내린다고 판단하면, 고문단의 대표로서 ‘적절한 조언’을 드리는 게 전부죠.”

리안은 자기 뒤에 서 있던 몽골군 장성들을 돌아본다.

“장군들께서도 ‘제 조언’에 동의하시는 것 같은데요.”

대놓고 비웃는다.

저 비웃음은, ‘나한테서 장군들을 빼앗아갈 만큼 인망도 없는 것 같은데’라는 뜻을 감추지도 않고 흘려대고 있다.

그 말이 맞다.

미리안이 외국인이라면, 울제이 역시 어디까지나 ‘키타이의 칸’이다가 들어온 자. 그러고선 단숨에 내무장관과 전쟁장관 자리를 꿰찼다.

카간 자리를 향한 노골적인 권력욕이 좋게 비칠 리 없다. 울제이의 뛰어난 지휘를 받은 장군들은 조금씩 그를 따르고 있지만, 그 영향력이 몽골군 전체에 미치기엔 아직 시간이 부족하다.

무엇을 탓해야 할까.

루우 테무르? 자기 자신? 미리안? 아니면 시레문 사후 아직도 제대로 확립되지 못한 군의 명령체계?

울제이는 일어선 그대로, 돌아섰다.

“카간께 이 문제를 아뢰겠소. 태사가 얼마나 작전을 비효율적으로 망쳐두었는지도 똑똑히.”

울제이가 내세울 수 있는 수단은, 지금으로선 이것뿐이다. 카간의 권위가 자신에게 분명히 힘을 실어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기대하지.”

리안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울제이가 칸발리크에 연락을 취하는 동안 가만히 있을 그녀가 아니다.

***

“이를테면…… 칸발리크 내에 있는 저희 조직망을 이용해 울제이 칸에 대한 ‘정치 공세’를 펼친다든가.”

무당 동무는 그렇게 말했다.

리안의 눈에 흥미가 차오른다.

“‘정치 공세’라면 어떤……?”

“이쪽 방면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고, 또 인민들 사이에서도 쉬쉬하긴 하지만 퍼져 있는 이야기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거죠.”

“울제이 칸이 차기 카간 자리를 노린다는 것 말이죠?”

“예.”

‘깡패 동무’에게 듣기론 미리안의 부하인 주견하도 상당히 영민하다던데, 역시 그 부하에 그 상관인가. 하긴 그 정도는 되어야 단순히 ‘연인’에 머무르지 않고 중요한 직책을 차지할 수 있겠지.

“내가 사회주의자들 좀 겪어봐서 아는데, 당신네들의 이른바 ‘지하신문’ 상당히 효과적이더군요. 인기가 많아서 그런가.”

“그렇게 칭찬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대충 이런 내용이려나? ‘울제이는 이번 카라코룸 공략을 기회로 영웅이 되는 것을 넘어, 카라코룸을 기반으로 카간이 되려 한다’.”

“좀 더 자극적인 문구를 뽑아볼 수도 있습니다. ‘울제이 칸, 제2의 아릭부케가 되려 하는가?’”

핫, 하며 미리안은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어찌나 호쾌했던지 무당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하고 만다.

아릭부케.

뭉케 카간과 쿠빌라이 카간의 동생.

그리고 그 자신도 카간이 되길 꿈꿨던 자.

역사적으로 칸발리크에 비해 카라코룸이 뒷전이었던 것은, 바로 이 남자가 일으킨 사건 때문이다.

큰형, 뭉케 카간이 죽었을 때.

송나라를 정복 중이던 쿠빌라이는 자신의 기반을 토대로 쿠릴타이를 열고 카간을 칭했다.

아릭부케는 몽골 본토를 기반으로 카라코룸에서 따로 쿠릴타이를 열었으며, 그 역시 카간을 칭했다.

두 사람이 벌인 내전은 결국 쿠빌라이의 승리로 끝났지만, 쿠빌라이 카간은 그 후로도 계속 정통성에 도전을 받았다.

쿠빌라이의 마음이 몽골 본토의 카라코룸이 아니라 칸발리크로 기울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카라코룸은 몽골 본토의 ‘또 다른 수도’라는 이미지와 함께, 카간에 대한 ‘도전자’의 기반이라는 이미지가 뒤섞여 있다.

죽은 시레문 카간은 ‘항전기 임시 수도’로서 적극 개발하려고 했지만, 도전자의 이미지는 이번 반란으로 다시 한번 사람들의 뇌리에 새겨졌다.

“시레문 카간에게 뭉케 카간의 면모를, 게레센제 카간에게 쿠빌라이 카간의 면모를, 울제이 칸에게 아릭부케의 면모를 덮어씌우는 겁니다.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죠.”

게레센제 카간이나 정치권의 입장에선 지금과 별다를 것 없는 상황이지만, 민중마저 그런 인상을 받으면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게레센제 카간이 울제이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소환한다거나.

볼로드 타이시가 울제이에 대한 경계심을 높인다거나.

적어도 울제이가 카라코룸을 독점할 상황만큼은 모두가 막으려 들 것이다.

“알겠습니다. 내가 좀 더 치열한 대치 국면을 만들어서 주의를 끌어보죠. 그 ‘공작’, 성공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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