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압(5)
고려-몽골군 연합 사령부가 있는 바스키에, 카라코룸에서 보낸 밀사가 도착했다.
“휴전 협정을 맺고자 합니다.”
“건방진 말이군. 무조건 항복이라면 모를까, 휴전 협정?”
한 번 그렇게 냉소적으로 답해놓고, 리안은 물었다.
“그래, 조건 정도는 들어보지.”
밀사는 지도 자료를 들이밀었다. 그걸 내려다보던 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풋, 하고 비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몽골과 고려 간 국경 재조정? 아니, 당신네 공화국 정부는 현실 파악이 안 되는 건가? 우리 고려가 서쪽으로 영토를 좀 확장할 수 있으면, 공화국과 제국 간 중재라도 서 줄 것이다…… 뭐 그런 생각인가?”
지도에선 몽골고원 쪽으로 영토를 다소 확장한 고려가 공화국과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남쪽으로는 고비 사막을 기준으로 몽골 제국과 알타이 자유 공화국의 국경선이 그어졌다.
“이미 당신네한테 남부 국경을 지키는 병력 따윈 없어. 울제이 칸이 이미 옹긴을 향해 진군 중이다. 그리고,”
리안은 종이 하나를 밀사의 얼굴에 던졌다. 불쾌한 얼굴로 종이를 받아 든 밀사는, 그 위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간다.
바스키 북쪽, 주요 도시 중 하나인 우르가도 점령당했다. 카라코룸을 죄어 오는 포위망은 이제 동쪽과 남쪽뿐만 아니라, 북쪽에서도 덮쳐오고 있다.
“서부 국경의 사회주의 분파가 진격해오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야. 그랬으면 동서남북 완벽한 포위망이 만들어졌을 텐데. 뭐, 지금이 당신들한테 남은 마지막 기회야. 무조건 항복하든지, 아니면 아직 포위망이 형성되지 않은 얇은 틈을 이용해서 도시를 비우고 빠져나가든지.”
밀사는 마지막 자존심을 끌어올려 대답했다.
“우리 공화국군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저항할 겁니다.”
“그런 건방진 이야기는 더 안 하는 게 좋아. 우리야 당신을 반역자 중 한 사람으로 처형하고 그대로 카라코룸을 밟아버리면 그만이니까. ‘최후의 한 사람까지’는 듣기엔 참 멋있는 말이지만, 그렇게 말할 만큼 병력이 아직 많이 남아있나?”
밀사는 대답하지 못한다. 병력이 죄다 분쇄되거나 연합군의 포위망이 갇혀 움직이지 못하는 건 그도 잘 알고 있다.
“무조건 항복, 혹은 망명. 그게 내가 당신네 통령과 정부 관리들에게 줄 수 있는 자비의 한계야. 가 봐. 나는 또 당신네 부대의 항복을 승인해야 하니 좀 바쁘거든.”
***
밀사의 보고를 들은 공화국 정부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침울했다. 고려의 영토적 야심을 이용한 휴전 협정이야말로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다이온 연방’을 둘러싸고 칸발리크에서 벌어지는 각축. 그에 대한 정보 수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면 그런 오판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누굴 탓하랴.
루우 테무르는 약간의 영토 확장이 아니라 몽골 전체를 삼키길 원한다. 미리안은 고려의 제국주의적 확장을 저지하길 원하며, 게레센제는 카간의 권위를 확보하고 싶어한다.
그렇기에 칸발리크의 모든 정파가 카라코룸을 갈구한다는 사실을, 공화국 정부는 최후의 순간에서야 이해했다.
“고려 국경지대까지 몰아붙이면, 위협을 느낀 고려가 자연히 내전에서 발을 뺄 거라 하지 않았던가! 군사를 담당하는 당신들의 예측은 어느 것 하나 맞은 게 없어!”
그렇게 노성을 질러대는 무에투켄 통령의 얼굴엔, 더는 자애로운 노 정치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범 알타이 인민동맹? 알타이 민족을 아우르기는커녕 몽골 하나도 제대로 장악하질 못했어! 이젠 아예 군 병력은 증발해버리고, 기존의 영토도 전부 상실하지 않았는가! 당신들은 대체 뭘 하는 사람들이야!”
범 알타이 인민동맹 출신 관료들은 싸늘한 눈길만 보낼 뿐이었다. 간판으로 앉혀 둔 노인네가 건방지다는 생각 밖에는 없었다.
씩씩거리던 무에투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가 공화국 통령 자리에 앉은 건 어떤 이상이 있어서가 아니다. 이는 조금이라도 안목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지적했던 바다.
그저 주변에서 떠받들어 주니까, 정치인으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자연스레 붙는 최소한의 존경을 자신의 ‘실력’으로 착각하고 냉큼 수락해버렸다.
더 나이가 들어 죽기 전에, 한 나라의 수장이 되어보고 싶었다. 자신보다 새파랗게 젊은 볼로드가 타이시 자리에서 거들먹거리는 꼴을 더 보고 싶지 않았다. 이제 와서 타이시 자리에 도전해보기엔 너무 늙기도 했고. 그래서 남들이 주는 쉬운 자리를 받아들였다.
마땅히 제국의 원로인 자신이 차지해야 할 자리인데, 어리석은 카간이 간신배를 앉혀 놓아서 나라 꼴이 이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실력이 모자라서 선대 시레문의 눈에 들지 못했다는 생각은 절대로 떠올리질 못한다.
위기의 순간, 그는 자신의 본질을 드러냈다. 무에투켄은 그런 늙은이었다.
온화한 원로 정치인이라는 껍데기는 모조리 벗겨졌고, 무능한 반역자라는 이름만 남게 되었다.
절망 속에서, 무에투켄은 자신에게 남은 길을 하나하나 검토해본다.
끝까지 저항하다 자결하거나, 체포 당한 뒤 재판을 거쳐 처형당한다.
혹은 이대로 카라코룸을 버리고 도망친다. 그래서 카자흐나 카잔, 아니면 북극을 지나 아즈텍으로 망명할 수도 있겠지.
망명이 받아들여질지도 의문이지만, 어찌어찌 망명한다 쳐도 비참한 삶이 기다릴 뿐이다.
연금조차 나오지 않는 늙은이로 살다가 어딘가 골방 한구석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겠지. 아니, 방이 있다는 것도 축복이다. 거리를 떠돌다 불량배들에게 맞아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운이 아주 좋아서, 무에투켄을 멸망한 공화국의 지사(志士)로 대우해주는 괴짜의 후원을 받는다고 치자.
그래도 남은 평생, 무에투켄은 암살자의 위협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고려에서도 실패하긴 했지만 반역자 신수덕을 죽이러 암살자를 보내지 않았었나. 자신도 몽골 제국엔 반역자인데 내버려 둘 리가.
그러나 무에투켄과 공화국 각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카라코룸에서 벌어지는 시위가 마침내 무장봉기로 나아간 것이다.
***
알타이 자유 공화국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는, 간헐적이지만 꽤 오래 이어져 왔었다.
공화국 정부는 공화국 정부대로 대규모 봉기로 발전할까 두려워 적극적인 무력 진압을 하지 못했었다. 파업 같은 경우 두들겨서 다시 공장으로 돌려보냈지만, 학생이나 다른 시민들까지 나와서 거리에서 행진하는 건 위협하는 수준으로 그쳐야 했다.
불만이 조금이라도 누그러지도록 물질적 혜택을 풀어놓을 수도 없고, 그저 제풀에 지치길 바라며 내버려 둘 뿐.
혁명가들 역시 공화국 정부가 ‘최종 결단’을 내리지 않도록, 시위의 수준을 조절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아예 공화국 정부를 뒤엎자거나 ‘카간 만세’, ‘제국 만세’등의 위협적 구호가 나오지 않도록 철저히 감독했다.
이 ‘감독’ 작업에는 극단적 모험주의자들을 정부보다 먼저 두들겨 패는 일도 포함되었다.
어디까지나 시위는 ‘알타이 자유 공화국’이라는 큰 틀 안에서, 노동 및 식량, 경제를 담당하는 정부 몇몇 인사에 대한 비판으로 전개되었다. 군의 작전 실패에 대한 규탄도 이어졌다. 이는 공화국 정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시위였으니까.
하지만 몽골-고려 연합군이 바스키에 입성했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시위의 양상은 달라졌다.
지금까지 금지되었던 구호들이 제한 없이 풀려났다. ‘카간을 맞이하자’, ‘반역자들에게 죽음을’, ‘해방자 고려 만세’ 등 각양각색의 구호가 정부청사 코앞에서 솟아올랐다.
여기에는 사회주의 계열에 속하는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기존 범 알타이 인민동맹에 소속되어 있던 사람들도 일부 가담했다.
범 알타이 인민동맹은 몽골인과 고려인을 비롯한 ‘범 알타이 민족’의 결속을 강조해왔는데, 지금 고려인과 몽골인의 동맹을 구현한 쪽은 공화국이 아니라 제국 아닌가.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배운 대로 ‘진정한 알타이 민족의 조국’을 향해 전향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공화국의 미래가 없다는 걸 내다보고 배신의 구실을 찾아 거기에 가담했다.
우르가가 연합군에 항복했다는 소식까지 전해지자, 시위대는 시민군으로 변모했다.
이제는 무력으로 정부를 끌어내리고, 해방군을 맞이할 때다.
구호가 바뀔 무렵부터 무에투켄과 정부 관료들의 인내심은 바닥났다. 이제는 유혈 진압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하지만 시위대는 마치 준비해뒀다는 듯 무기를 꺼내 들었고, 도시 곳곳을 장악하며 정부의 모가지를 죄어들어갔다.
시민군뿐이라면 정부도 큰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진압했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마치 ‘봉기와 때를 맞추기라도 하듯’ 연합군의 맹렬한 공세가 시작됐으니까.
시위를 무력 진압하기는커녕, 시민군과 연합군 사이의 연결을 막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두 군대가 연결되고, 고려에서 온 물자가 시민군에 보급되면 그땐 정말로 끝장이었다.
물론 버틴다고 해도, 끝이 얼마 남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
옹긴 남쪽 근교까지 진군한 울제이의 사령부에, 공화국에서 보낸 또 다른 밀사가 찾아왔다.
“항복이라?”
기쁨의 웃음을 감추며 울제이는 되물었다.
“그래, 조건은?”
“‘무조건 항복’입니다. 다만……”
‘다만’이라는 말이 붙은 시점에서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지만, 밀사는 표현만 약간 바꿔 이를 모면하려 했다.
“우리 공화국의 무에투켄 통령과 정부 관료들의 망명을 허락해주시는 자비만을 바랄 뿐입니다.”
자비를 구걸하는 형식이지만, 자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아마 이대로 돌아가 최후의 항전을 준비할 것이다.
여기서는 자비를 베풀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듬뿍 안겨줘야겠지.
“카간께 상주해보겠네. 자비는 내가 아니라 카간께서 베푸실 테니까. 하지만 카간께서 자비를 베푸시려면 일단 그대들이 정말로 항복한다는, 믿을만한 증표가 필요한데…… 어떤 절차로 항복할 생각인가?”
“옹긴을 비우겠습니다.”
“옹긴을? 거기까지 그대들 통령인가 뭔가 하는 자가 나와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겠다는 건가?”
“저희도 카라코룸에 칸께서 무혈 입성하도록 배려해드리고 싶습니다만…… 이미 카라코룸은 전장입니다. 고려 태사의 군대가 맹공격을 퍼붓고 있고, 도시 내부에서도 시민들이 들고 일어서서, 도저히 항복이고 뭐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고려군이……. 벌써 도달했는가.
초조감이 다시 한번 울제이의 뒤통수를 기어오른다.
“그럼 우리가 옹긴에서 멈추면 안 되겠군. 내가 고려군의 공격을 저지해주지. 그러면 충분한가?”
“이미 저희는 항복하고 싶어도, 도시 하나 안정시킬 무력이 없습니다. 칸의 군대가 카라코룸으로 들어와 폭도들을 제압해주신다면…… 정상적으로 항복 절차를 진행할 수 있겠습니다만.”
울제이는 밀사의 말에 뭔가 꿍꿍이는 없는지 재 본다. 고려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도시 내부에서 일어난 소란을 제압하면서 한숨 돌리고 나면…… 말을 바꾸려는 수작은 아닌가?
하지만 곧 울제이는 끄덕임으로 밀사의 요청에 답했다.
“알겠네. 우리 군이 폭도들을 진압해주지. 그대들 정부에선 항복을 준비하게. 카간께서 반드시 자비를 베푸시도록, 내가 힘을 써 보지.”
물론 울제이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자신의 군대가 카라코룸에 입성한 순간 폭도며 반란군이며 가리지 않고 진압할 생각이었다.
카라코룸 해방의 영웅은 자신이 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