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압(4)
“남부전선보다 빨리, 라고 하신다면…… 역시 정치적인 문제입니까?”
김천열도 그 정도 눈치는 있다.
이 몽골 내전이 끝나면 주도권 싸움이 시작된다. 누가 몽골의 미래를 결정할 것인가를 정하는 싸움. 주도권은 당연히 내전에서 큰 활약을 벌인 쪽이 많은 지분을 요구하게 된다.
적이 수도로 삼은 카라코룸을 함락하면, 적을 멸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울 뿐만 아니라, 몽골의 제2 도시를 탈환했다는 위광 역시 얻을 수 있다.
이 내전에 임하는 자들 중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자는 없을 터.
따라서 공격 측도 방어 측도, 칸발리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런 정치적 문제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어요. 카라코룸의 내응자와 함께 시간을 맞춰서 안팎으로 공략해야 합니다. 그래야 카라코룸 공략을 수월하게 할 수 있을뿐더러, 내응자들이 개죽음당하지 않게 할 수 있어요.”
반란군 장악 지역 서부에서 다시 불타오른 봉기. 이들이 한편으로 적의 세력을 분산시킨다.
그리고 카라코룸 내부에서도 봉기의 기운이 끓어오르고 있다.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그 기운을 적절히 통제하다가, 외부의 공격과 발맞춰 터트릴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잘 통제할 수 있을까.
이런 종류의 봉기는, 결국 민중이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우발적이고 충동적이기까지 하다. 혁명가들은 이를 체계적으로 통솔해 효율적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싶어하지만, 그 어떤 선전선동의 대가라고 해도 민중 봉기를 완벽히 통제할 수는 없다.
때문에 결국엔, 혁명가들이 민중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혁명가들을 끌고 다니게 된다.
카라코룸 시민들의 분노가 터져 나오면, 알타이 자유 공화국은 전선보다도 그 봉기 진압을 우선하게 될 터.
시민군의 무장이야 안 봐도 뻔한 노릇이니, 누군가 외부에서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시민들의 어마어마한 피만 흐르고 끝날 것이다.
리안은 그런 사태를 막고 싶었다.
“카라코룸 내부의 봉기가 허무하게 짓밟혀버리면, 우리가 카라코룸을 공략할 때 들어갈 수고가 몇 배로 늘어나요.”
일단 반대파의 저항을 분쇄했으니 치안 유지 등에 들어갈 병력도 모조리 도시 방어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시민들의 피맛을 본 군대이니 아마 항복 없이 처절하게 저항하겠지.
“‘시민들이 죽어갈 때 당신들은 우물쭈물하며 뭘 하고 있었나’, 이런 질문을 받으며 카라코룸에 입성할 수는 없어요.”
카라코룸을 리안의 영향권 아래 두려면, 진정 해방자로서 입성해야만 한다.
“그렇군요. 내부의 봉기와 외부의 공격으로 포위…… 어쩌면 반란군 정부가 ‘이제 끝’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관용을 바라며 항복해온다면 더욱 이상적인 결말이고요.”
“네. 그러니…… 언제 터질지 모를 카라코룸 내부의 민중 봉기에 늦지 않게, 군을 카라코룸 근교까지 전진시켜야 해요.”
혹은 고려-몽골 연합군이 카라코룸에 근처에 나타나는 게 민중 봉기의 기폭제가 될지도 모른다.
김천열은 숨을 깊이 들이쉬며, 시선을 다시 지도로 돌렸다.
“이런 방법은 어떻겠습니까?”
시르겐 나우르, 쿠데에 아랄, 바스키, 부르칸 칼둔, 이 네 개의 주요 거점을 모조리 점령하고 카라코룸으로 전진하면 한여름이 다 되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거점들을 지키는 적 주력을 격파하기보다는, 포위만 해두는 겁니다. 그리고 포위에 필요한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두고 나머지 병력은 오직 카라코룸을 향해 전진시키는 거죠.”
굳이 모든 적을 섬멸할 필요는 없다. 반란군의 유일한 구심점은 카라코룸에 있다. 카라코룸을 함락시키는 것만으로도 적들은 줄줄이 항복해 올 것이다.
물론 포위된 적들이 가만히 있진 않을 테고, 맹렬히 포위망 돌파를 시도하며 ‘선’으로 이어지려 하겠지만…… 그건 아군 보병과 공군의 분전을 빌어보자.
“살짝 도박이긴 하지만, ‘시간’을 아끼려면 별다른 방법이 없겠네요.”
“적이 동, 서, 남으로 포위된 지금, 우리 고려군과 몽골군은 수적 우위에 서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작전이 가능하리라 봅니다.”
“……좋습니다. 시작해봅시다.”
고민하면 더 좋은 생각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그 고민을 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부족했다.
***
다행스럽게도 미리안, 김천열의 지휘를 일부러 방해하려는 움직임은 없다.
현 카간인 게레센제에게 잘 보이긴 해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려 측이 앙심을 품게 해서도 안 될 테니까.
미래 몽골의 주인이 누가 될지도 모르는데, 지혜로운 인간이라면 쓸데없는 원한을 늘리진 않는다.
그리고 카라코룸을 점령하고 조국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건 모든 군인이 동의하는 바이고.
기갑사 C-31 모델의 활약으로, 시르겐 나우르 남동쪽에서 치러진 전투도 승리로 끝났다. 또 한 번 전선을 돌파한 고려와 몽골 연합군은 시르겐 나우르에서 시가전에 돌입하지 않고 우회를 택했다.
주력은 그대로 서쪽, 쿠데에 아랄로 향한다. 다만 이 과정에서 비행장은 반드시 장악해야 했다. 이러한 쾌속 진격을 가능케 하려면 공군의 도움이 절실했으니까.
쿠데에 아랄에서는 주력을 둘로 나눈다. 그대로 북쪽의 부르칸 칼둔과 쿠데에 아랄을 한꺼번에 공략할 듯한 움직임을 보인다. 이로써 적 역시 부르칸 칼둔과 연계하기 위해 배치를 북쪽으로 돌리게 된다.
이 틈을 노려 연합군은 도시의 남쪽으로 우회, 당황한 적이 추격해오는 걸 무시하고 계속 서쪽으로 나간다. 부르칸 칼둔을 공략할 듯 북쪽으로 움직였던 연합군 역시 남쪽으로 내려와 쿠데에 아랄의 적을 포위.
연합군은 단숨에 바스키에 도달했다.
이미 상당한 병력이 쿠데에 아랄과 시르겐 나우르에 포위됐고, 이들을 포위망에서 구출하기 위해 또 많은 병력이 동쪽으로 이동한 상황. 그걸 비껴가듯 연합군은 남쪽으로 슬쩍 돌아 바스키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미리안은 동명과 시물투를 바삐 오가며 필요한 조치들을 했다.
제국최고회의에서 고려군의 해외 주둔 기간을 연장하기로 결의했을 땐 무척 씁쓸한 기분이었지만, 어쨌든 고려군의 투입 기간뿐만 아니라 병력 규모도 늘렸다. 무기도 ‘수출’ 형태로 몽골군에 보급하기로 했으니, 경제에도 조금은 보탬이 되겠지.
대원수이자 제국의 태사이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그렇게 증강된 병력이 신속하게 몽골 국내로 진입했다. 어찌보면 위험할 수도 있는, 길게 늘어진 전선이 그런 병력으로 보강됐다.
적들을 포위해서 사실상 무력화하거나, 최소한 발을 묶어두는 데 성공했기에 바스키의 수비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다.
병력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는, 방어 태세를 준비할 손이 모자란다는 이야기다.
그대로 기갑사 C-31을 앞세워 시가전에 돌입.
어설프게 구축된 방해물들을 부수거나 뛰어넘으며 기갑사는 도시의 관공서 밀집 지역으로 향했다. 방어측 사령부도 여기에 있을 테니까.
뒤이어 보병이 돌입. 도시의 각 구역을 확실하게 장악해 나간다.
점심 무렵에 시작된 도시 공략은, 해가 중천에서 약간 기울었을 무렵에 종료.
사령부의 장교들은 항복한다는 현명한 판단을 했고, 연합군은 그런 그들을 구금하면서도 최대한 예의를 갖춰주었다.
그리고 미리안과 김천열은 사령부를 시물투에서 바스키로 옮겼다. 카라코룸의 동쪽 관문에서 공략을 지휘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몽골의 옛 수도에 닿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
비슷한 시기에 울제이 역시 새너두-옹구차트 전선을 압박하던 모든 적을 분쇄하고 북상 중이었다.
“카라코룸에 먼저 입성해야 하는 건 알겠지만, 동부전선 쪽에 비하면 위험성이 너무 크군.”
일단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부족했다. 적지 않은 병력이 한족 봉기를 제압하는 데 동원됐다.
그리고 고려군도 적극 투입하기로 결심한 미리안과 달리, 게레센제도 울제이도 낭키아스나 키타이의 병력을 동원할 생각이 없었다.
게레센제는 게레센제대로 낭키아스의 기반을 계속 보존하고 싶어 했으며, 울제이는 형을 위해 자기 기반을 깎아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카간이 있는 수도권, 즉 새너두와 칸발리크 근방의 적들을 반드시 ‘분쇄’해야 한다는 군부의 요구도 시간을 잡아먹는 요인이었다.
어쨌든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나서 이대로 서북쪽 카라코룸까지 가는 길은 뻥 뚫린 것과 다를 바 없었지만, 동부전선은 이미 바스키에 육박하고 있다.
“탕구트 놈들이 조금만 더 협조적이었어도……!”
탕구트의 국토인 감주와 숙주 일대에서 별도의 부대를 북상시킬 수 있었다면 훨씬 빨리 카라코룸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탕구트는 몽골군이 자국 내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했다.
몽골 내전에 굳이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탕구트 내부에서 일어나는 소란 탓이 더 컸다.
탕구트는 세계대전 이후, 역대 한족 왕조들의 수도인 장안을 넘겨받았다. 이른바 ‘관중’ 분지도 함께.
이 지역의 인구와 생산력은 고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역량이 남아 있었다. 최근 탕구트 정부가 농토 환경 개선 등의 노력을 기울이면서 확실히 성장하고 있기도 했다.
문제는 낭키아스나 키타이에서 시작된 한족 봉기의 불꽃이, 이 지역에도 튀었다는 것.
옛 태평천국의 영토를 갈라먹은 모든 나라가 그러하듯, 탕구트 역시 세계대전의 전리품이자 경제적 요지를 잃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이 반란 민족들을 진압하는 데에만 몰두했다.
이 와중에 몽골군의 진입을 허용하면, 그 틈을 타 혼란만 더 커질 수 있었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괘씸하군. 여기서 협력해준다면 우리도 한족 봉기 진압에 자연스레 협력해줄 텐데.”
아니면 그런 생각조차 못 할 만큼 상황이 급하게 돌아간단 말인가?
조금은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서둘러 카라코룸의 반란군을 진압하고, 남쪽으로 돌아가 이번 한족 봉기를 완전히 박살 내놓아야 한다.
키타이나 낭키아스에서 ‘한족 독립국가’가 떨어져 나가도 문제지만, 티베트나 탕구트, 대예 등이 지배하는 곳에서 그런 게 생겨도 문제다.
그때는 오히려 해외의 한족 독립국가들이 키타이나 낭키아스의 동포들을 지원하겠지.
“일단은 옹긴을 목표로 전진한다.”
옹긴은 카라코룸 남쪽에 있는 도시다. 바스키보다는 좀 더 카라코룸에 가깝다.
옹긴까지 진군할 수 있다면…… 좀 더 빠른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반란군 정부의 항복을 받아낸다든가.
“그 경우엔 고려 태사에겐 알리지 않는다.”
비밀로 한 채, 단독으로 카라코룸에 입성.
미리안은 상당히 분개하겠지만, 어쨌든 그녀는 지원군이다. ‘카간의 신하’인 울제이가 적의 항복을 받고 카라코룸을 평정하는 데에는 명분상 아무런 하자가 없다.
“먼저 이쪽에서 항복을 권유해보는 것도 좋겠지.”
당장은 항복을 거부하며 결사 항전을 외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미리 권유를 해두면, 정말 항복할 생각이 들었을 때 그 권유를 떠올릴 것이다.
“우리가 옹긴까지 진출하면 적의 생각도 좀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