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229화 (229/541)

제압(3)

칼날이 맞부딪친다. 전쟁은 새로운 병기를 많이 만들어냈지만, 여기서 또 한 번 고대의 전쟁과 본질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았음을 증명한다.

전략과 전술의 깊은 곳에서, 전투는 결국 개인의 기량과 무기의 우수함을 겨루는 것이다.

“……?”

몇 번 합을 나누고 거리를 벌린, 공화국 측 이단이 의문 섞인 숨을 내뱉는다.

“얼굴이 없다?”

“얼굴이 없다니?”

“얼굴이나 조종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기갑사를 조종하는 이단도 결국 사람이다. 철모나 군복이 얼굴이나 손발을 가리지 못하듯, 기갑사의 일정 부분도 노출될 수밖에 없다.

시야 확보 문제도 있고, 전투의 공기를 피부로 직접 느껴야 한다는 이단들의 요구도 있었다. 아무리 기갑사에 탑승하면 감정이 마모된다고 해도, 감각마저 마비되는 것은 아니니까.

미신에 가까울지도 모르지만 직접 눈과 귀, 피부로 느껴야만 시시각각 변화하는 전장의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고려측 기갑사는 조종석이나 이단이 보여야 할 부분이, 두터운 장갑으로 뒤덮여 있다.

“구멍 같은 건 없나? 시야 확보에 필요할 텐데.”

“현 상황에선 식별되지 않는다.”

그런 구멍이 있다면, 까다롭긴 하겠지만 칼날을 쑤셔 박아 적 이단을 무력화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누군가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무인(無人) 기갑사인가?”

“아니, 고려의 기술이 그 정도까지 진보하진 않았겠지.”

어떤 소설에는 명령대로 움직이는 자동인형이 나온다고 하지만, 그건 아직은 상상의 영역이다.

아니 애초에 기갑사는 이단의 기를 동력 삼아서, 이단의 힘을 증폭시키기 위한 기계 아니었던가?

이단 없이 활용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 이단이 탑승하지 않은 기갑사는 만들어진 목적에서 어긋난 것이다. 말 자체가 되지 않는다.

잠깐 잡담이 지나간 후, 다시 접전. 공화국 측 기갑사는 조금씩 타격을 입고 있지만 고려 측 기갑서는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듯하다.

“역시 저 조종석을 감싼 장갑 탓인가.”

몇 번 조종석을 노려봤지만 공격이 먹히지 않는다. 어지간히도 단단하게 만든 것 같다.

조종석뿐만 아니라, 기존 기갑사들의 약점으로 지적되어 왔던 관절부에도 상당한 보강이 이루어졌다. 그러면서도 움직임은 그다지 둔하지 않았다.

흘끗, 주변을 둘러보자 이번엔 포 대신 화염방사기를 단 기갑사들이 보인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철조망을 구겨버린다. 그러고 나선 불꽃으로 참호를 지져대고 있다.

그대로 비명조차 내뱉지 못한 채 익은 고기가 되어버리는 병사도 있고,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참호나 포대 밖으로 뛰쳐나가는 병사도 있다.

별다른 감정은 여전히 느끼지 못하지만, 전황이 심각하다는 건 알 것 같다.

“전차는 아직인가?”

“전차를 기다릴 수도 없고, 온다고 해도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진 않다.”

날씨도 전차의 기동에 적절하지 않다. 그래서 적들 쪽에도 전차가 보이지 않는다.

“적의 돌파를 일부 허용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전선 후퇴도 감수해야 한다. 더 큰 피해를 입기 전에 포격을 요청해 적을 저지하는 수밖에.”

병사들이 후방으로 퇴각하는 동안 기갑사 부대는 적의 공격을 받아내면서 천천히 물러난다. 본래 전선이 밀고 밀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전선 후퇴가 패배의 서막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적 기갑사도 숫자가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추격해오기보다는 확보한 전선의 ‘구멍’을 넓히려 할 것이다. 그리고 보병의 진입을 기다리겠지.

그러면 공화국군에선 이 부분에 포격을 날려 적의 진격을 저지하고, 더 나아가 원래의 전선을 탈환하면 된다. 탈환하지 못하더라도 더 밀리진 않는다.

그 사이에 적의 신형 기갑사에 대처할 방법을 생각해야겠지만.

“……적 기갑사가 바짝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 숫자로? 역으로 포위될 위험은 생각하지 않는 건가?”

숫자가 적으면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후방에 있을 아군과 연결을 유지할 수 없다. 대규모 보병 부대가 진입해서 ‘선’을 만들어주고, 그 뒤에 점령지라는 ‘공간’을 확보해줘야 한다.

기갑사 부대 단독으로 깊숙이 진입하면 보병 부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공화국 보병이 원래 전선을 회복하고 후방을 끊어버린다.

“위험을 감수한다면, 위험하게 만들어줘야지.”

다들 다시 교전을 각오한다.

그러나 고려의 기갑사들은 그들의 예상과 다른 행동을 보였다.

각자 흩어진다.

“……?”

감정이 억제된 물음이 무전을 타고 흐른다.

공화국 기갑사들은 고려의 기갑사들을 추적하지만 전부 따라잡진 못한다. 고려 기갑사들은 패주하는 공화국 보병들을 짓밟으며 추월해서 어디론가 간다. 똑같이 아군을 짓밟으며 갈 수는 없었기에 공화국 기갑사들의 속도는 느려진다.

“사령부나 포병을 노리는 걸 수도 있다.”

일부는 우회해서 빠르게 후방 부대로 향한다. 포병 앞에 기갑사가 나타나면, 물론 직접 사격도 가능은 하겠지만 보통은 일방적으로 유린당한다.

사령부야 더 말할 것도 없고, 고위 장교가 죽기라도 하면 그 타격은 복구 불가다.

급하지만 담담한 어조로 사령부에 경고를 전하며, 공화국 측 기갑사들도 흩어졌다.

***

공화국 기갑사들의 예측대로, 고려군 기갑사는 사령부, 혹은 포병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직접 그 안으로 뛰어들어 휘저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적 기갑사도 그 정도는 예측해뒀을 테고, 방어력이 높아지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잘 안 죽게 되었다’는 의미다. ‘잘 죽일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눈보라를 헤치며 달린다.

중간중간 보이는 적의 후방 거점들, 기관총 포대 같은 건 무시하고 계속 달린다.

이윽고 기갑사 하나가 포병부대를 발견한다.

거기서 기갑사는 지형과 눈보라를 이용해 모습을 감추고, ‘하늘 위’에 있는 아군에게 통신을 날렸다.

***

아직 내릴 눈이 많이 남았다는 듯 두꺼운 먹구름. 그 아래 지형지물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조종사는 그저 함께 탑승한 이단이 불러주는 좌표로 폭격기를 몰아갈 뿐이다.

폭탄을 한계까지 가득 싣고서.

이단은 지상에서 아군 기갑사로부터 올라오는 신호를 듣는다. 그대로 조종사에게 전달한다.

마침내 목표한 곳에 도착하자마자, 먹구름 아래에 무엇이 있건 간에 실린 모든 폭탄을 투하한다.

거센 바람으로 인해 목표에서 빗나갈 걸 우려해 최대한 많이 실은 폭탄이 먹구름 아래로 사라진다.

폭음, 그리고 먹구름을 비추는 섬광을 본 것 같지만, 조종사는 머뭇거리지 않고 기수를 돌려버렸다.

***

“아쉽게도 적 사령부를 날려버리진 못했지만, 포병은 거의 무력화했습니다. 덕분에 후속 보병 부대가 무사히 전선을 돌파, 적을 포위 중입니다.”

“대원수 계급에 태사, 제국최고회의 의장. 참 도움이 많이 되는 직책들인 것 같아요. 그렇죠?”

리안의 말에 김천열은 미소 지었다. 그녀가 와 준 덕분에 일이 잘 풀리고 있다.

권한이 커지면 동원 가능한 자원도 많아진다. 많은 자원을 동원할 수 있으면 시원시원한 작전도 가능해지고.

“기갑사로 그런 작전이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상 병력과 항공기의 직접 교신은, 현 기술로는 어렵다고만 여겼으니까요.”

“C-31에서 특별히 신경 쓴 게 바로 그거죠. 이단을 이용해 어떤 악천후나 거리에서도 가능한 통신. 그리고 그 통신을 바탕으로 공군과 육군의 빠른 연계 작전.”

척준경 프로젝트의 결과물, 허동주의 첫 기갑사들은 1929년의 생산품이라는 이유로 C(척준경)-29라는 이름이 붙었다. 여기서 이단의 소모 문제를 손본 모델을 C-30이라 하고 운용하다가, 바로 얼마 전에 C-31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조종석 및 관절부 장갑 강화, 무기의 다변화, 이단의 능력을 이용해 무선 통신을 개량. 이 모든 것이 C-31 모델에 적용된 성과였다.

“이단을 많이 양성할 수 있다면 전차나 장갑차, 더 나아가 함선에도 태워서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수가 그렇게 많지 않으니 그게 좀 아쉽네요.”

이단을 인위적으로 양성한다는 프로젝트는 일시 중단된 상태다. 견하가 겪는 부작용이나 칸발리크에서 있었던 파멸인 테러를 생각하면 더 진행하기가 어렵다.

대신 혈통에 의한 선천적 이단을 발굴하는 작업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전차나 장갑차 엔진이 몽골의 극한 기후에도 가동하게끔 하는 과제도, 현장 지휘관들의 임기응변으로 어찌어찌 해결되어 가는 듯합니다. 이대로라면 곧 대규모 기갑 기동전도 가능하겠죠.”

어쨌든 국토를 방위해야 하니 극북방위군이 있긴 하지만, 아즈텍은 고려의 가상 적국이 아니다. 몽골은 세계대전 이래의 동맹국이고. 따라서 고려는 구 태평천국 영토에서의 대규모 반란, 혹은 독립국가 출현을 상정하고 전쟁 전략을 마련해왔다.

전차 엔진의 개발도 키타이의 평원이나 장강 유역을 전장으로 가정하고 이루어졌기에, 이렇게 가혹한 추위를 만나자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터졌던 것이다.

“기갑사도 전차를 비롯한 기갑집단에 함께 묶어서 작전을 펼치면 꽤 볼만 할 거예요.”

“기갑사는 전차의 궤도에 비해 유연한 기동이 가능하니까요. 전차의 굳건함에는 여전히 미치지 못하겠지만, 전차가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을 기갑사가 보완해준다면 그 기갑집단은 무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전차, 장갑차. 지난 세계대전에서 그 유용성을 인정받은 병기들이다. 여기에 더해 자주포나 자주대공포의 개념도 도입되기 시작했다. 고려에서는 ‘기갑사’까지 기갑집단에 포함시키는 새로운 교리를 마련하자는 움직임도 있다.

마침 ‘기갑사’라는 이름도 기갑집단에 어울리기도 하고. 기갑사 자체는 ‘기계’에 제2제국 시절의 병종인 ‘갑사’를 붙여서 만든 이름이긴 하지만.

“이번에 활용하신 걸 보니 정식으로 ‘포기갑사’를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대공기갑사’도 가능하겠죠.”

리안은 약간 들뜬 듯한 김천열을 향해 씩 웃었다.

“이미 연구가 진행 중이에요. 대량 생산돼서 실전에 투입되는 건 별개의 문제지만, 다양한 가능성은 시험해봐야죠.”

김천열은 과연 그렇군, 하는 얼굴로 끄덕였다. 좋은 아이디어는 꼭 누군가 먼저 생각하고 있는 법이다.

“대공기갑사 같은 게 나오면 적 항공전력에 취약한 문제도 상당이 해결될 겁니다.”

그렇게 말을 덧붙이고, 다시 지도로 눈을 돌린다. 잡담은 눈치껏 해야 한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지금부터.

승리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여기 시물투부터 카라코룸 사이엔 시르겐 나우르, 쿠데에 아랄, 바스키를 돌파해야 합니다. 쿠데에 아랄 북쪽에는 부르칸 칼둔도 있는데, 이 역시 북쪽에서 우리의 진격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입니다.”

김천열을 따라 리안도 심각한 얼굴로 지도를 들여다본다.

“우리의 목표는 카라코룸의 신속한 공략이에요.”

잠깐 말을 멈췄다, 잇는다.

“그냥 신속한 게 아니라, ‘남부 전선을 지휘하는 울제이나 게레센제보다 빨리 입성한다’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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