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압(2)
김천열이 지휘하는 고려군 사령부가 있는 시물투. 여기에는 반란군과 대치한 몽골군 동부 전선의 사령부도 함께 있다.
그런 시물투에 태사 미리안이 탄 열차가 도착한다.
리안을 마중 나온 김천열 대장은, 그녀가 내리자마자 무겁게 가라앉은 마음을 가득 담아 말했다.
“송구합니다. 입만 산 자라 평하셔도 감수하겠습니다.”
김천열은 진심으로 죄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물론 리안은 재작년 고려 내전에서 자신이 확보한 첫 사단장을 강하게 질책할 생각은 없었다.
“장군이 장담한 대로 되지 않은 건, 앞으로 그런 근거 없는 전망은 내세우지 말라는 정도로 마무리 지을 수 있겠죠.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에요. 원인 분석은 되었나요?”
계획은 원래 처음 세웠던 의도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이라지만, 그게 계획이 망가져도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망가졌으면 왜 망가졌는지, 이제 앞으로는 어찌할 것인지, 대책을 세워두지 않았다면 그거야말로 호되게 질책해야 한다.
물론 김천열은 전혀 무능하지 않다. 무능했다면 그 내전을 헤치고 나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터.
대략적인 원인 분석은 이미 되어 있다.
“적이 기습적으로 기갑사 전력을 여기 동부 전선에 집중시킨 것은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모두 서부에서 일어나는 접전이지만, 여기서 동부냐 남부냐는 몽골의 국토를 기준으로 하는 말이다.
“그 점은 대응책까지 이미 마련해뒀으니까요.”
그렇게 대답하며 리안은 슬쩍 한구석으로 턱짓한다. 대장은 대원수의 그 턱짓이 겨냥한 곳을 바라본다. 배영훈 중령이다.
“시험적으로 태사 직속 기갑사 부대를 창설하셨다 들었는데, 배 중령이……?”
리안은 그 질문엔 끄덕임으로 답하고, 설명을 덧붙인다.
“작년에 실전 데이터도 얻었고, 덕분에 약간 개량을 거친 모델이 본국에서 올 거예요. 지금 있는 부대원들의 기갑사도 교체하거나 개수하고, 추가로 기갑사 탑승 훈련을 받은 이단들도 합류하겠죠.”
김천열은 눈에 띄게 안도한다.
“그렇다면 적 기갑사 전력에 대한 대응은 그걸로 충분하겠군요.”
“기갑사 문제는 저도 알고 있을 거라고 하셨으니까, 장군이 분석한 원인은 ‘기갑사 이외의 요소’겠죠?”
“그렇습니다. 가장 큰 방해 요인은, 여기 시물투 사령부의 명령체계가 무척 혼란스럽다는 점입니다.”
“혼란스럽다? 몽골군 쪽에서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는 건가요?”
“협조 자체는 잘 되고 있습니다만, 역시 ‘체면’에 따른 ‘절차’가 항상 문제입니다.”
동맹군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 ‘협조는 잘 되고 있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손발이 안 맞는 건 협조가 잘 안 되는 것이다. 상대방이 고의로 그러했든, 아니든.
“절차?”
리안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한다. 절차라는 한 단어에서 여러 가지 상황을 유추해낸다. 대체 어떤 절차상의 문제가 김천열과 고려군의 발목을 잡고 있는가.
“‘명령이 아니라 협조 요청’인 상태 자체가 문제인가요?”
“그 부분에 대해선…… 말을 아끼고 싶습니다, 각하.”
그 정도 대답이면 긍정이다.
시물투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견하는 자기가 추진하는 계획에서 리안이 일정한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는 듯했다. 그래서 조금은 어울려주는 기분으로, 또 조금은 자신도 필요하다고 여겨서 시물투로 온 것인데…….
“제가 와야만 했군요.”
고려군은 어디까지나 ‘지원군’의 입장이다. 김천열이 설령 나폴레옹 황제를 뛰어넘는 용병술의 천재였더라도 지금과 비슷한 결과밖에는 내지 못했을 것이다.
몽골군 입장에서도 타국 장성의 ‘요청’을 빙자한 ‘명령’에 마냥 예, 예, 하며 따르긴 곤란하다. 내전 중 고려군의 꼭두각시로 처신했다는 평가를 피하려면, 자신이 고려군의 ‘간곡한 부탁’에 응했음을 증명할 문건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김천열도 원활한 협조를 얻기 위해선 몽골군 장성들의 체면을 적절히 세워줄 필요가 있었겠지.
동맹군끼리 서로 존중하기 위해 마련된 이 ‘행정적 절차’가, 생각 이상으로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다. 이로 인한 작전상의 차질이 적에겐 시간을 벌어 준다.
어떤 작전이 고려 혹은 몽골군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 김천열이 ‘전통적으로 요구되는’ 절차를 준수했는가 검토하는 동안, 기껏 패퇴시킨 반란군은 재정비를 마친다.
물론 김천열 대장 한 명으로 지휘체계를 일원화시킬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고려-몽골 연합사령부 같은 걸 창설할 수도 있고, 실제로 지난 세계대전 때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하지만 태평천국이라는 ‘적국’을 상대하던 세계대전과, 한 나라에 안에서 일어난 ‘반란’을 상대하는 지금은 다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전면개입’에 가깝긴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전면전에나 어울리는 거창한 기구를 만들 형편도 아니다. 몽골과 고려 양국 장성들은 현 상황에서 최대한 절차를 간소화하려고도 해봤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적보다 한 박자 늦는다.
“그 외에도…… 지금 우리 황제 폐하와 몽골 카간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도는 것도 한 이유죠.”
김천열은 이번에도 리안에게 동의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표정으로 그 답을 대신했다.
“어쨌든 그래서, ‘대장’ 이상의 권위가 필요했다는 말씀이죠?”
“네. 적어도 ‘원수’ 이상의…….”
대원수인 리안이 오면 계급에 따른 권위 문제는 확실히 해결된다. 외국군이라 해도 계급은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몽골군 내 웬만한 장성들도 대원수인 리안의 지휘를 받는다면 체면은 선다.
“우리 폐하께서는 지금 몽골의 ‘보호자’이시니, 제가 그 ‘보호자’의 명을 받아 몽골군을 지휘한다는 명분을 내세울 수도 있고요.”
리안 자신의 계급, 그리고 황제의 권위. 이렇게 두 차례에 걸쳐 리안을 중심으로 한 지휘체계는 강화된다.
그리고 리안이 김천열의 제안을 지체없이 승인하는 형태로, 보다 효율적인 지휘가 가능해질 터.
“좋습니다. 일단 지휘권부터 인계받도록 하죠. 그것까지 생략해버릴 순 없으니까요.”
***
참호, 두텁게 쌓은 포대.
날씨는 건조하기 짝이 없어 습기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가차 없는 추위도 찾아왔다.
자유 공화국군은 참호 한구석을 아궁이 또는 벽난로처럼 깊이 파고 불을 피운다. 그 주변에서 교대로 몸을 녹이거나, 땀에 젖은 양말을 벗어서 말린다.
자유롭다는 공화국은 전혀 자유롭지 않다. 미래 어느 순간에 올 자유를 위해 지금 누려야 할 자유를 바치라 한다.
물론 군인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악질적인 고용 계약을 맺는 것이라, 목숨과 자유의 가능성 자체를 날려버려도 고용주의 책임은 아니라는 조항이 은근슬쩍 끼어 있다.
장교부터 일반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그 악랄함을 모르는 자는 없다.
다만 이를 갈면서도, 도망쳐봤자 갈 곳이 없어서, 도망칠 자신이 없어서, 혹은 어딘가에 있을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지킨다는 핑계를 대며 붙어있을 뿐이다.
“눈보라가 그칠 생각을 안 하는군.”
건조한 날씨가 이어지던 중, 오랜만에 눈보라가 몰아친다. 이렇게 눈이 내리면 습기도 습기거니와 나중에 치우는 데 애를 먹지만, 전투 역시 중단된다.
“그래도 저쪽도 눈보라 맞는 건 마찬가지지. 이쪽으로 돌격해올 엄두를 못 낼 테니 좋지 않나?”
“우리가 이 눈보라 속에서 얼어 죽기 전에 전쟁이 좀 끝났으면 좋겠는데.”
“맞아. 이대로라면 저쪽이든 우리든 다 얼어 죽겠어.”
툴툴거리며 대화를 나누는 공화국 측 병사들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적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하고, 어떤 정신 나간 녀석이 참호 밖을 돌아다니나, 하고 고개를 든 순간.
기갑사의 칼날이 병사 하나를 찍어누르고, 그대로 시체를 흩어버리며 다른 병사를 베어버린다.
“적습!”
추위 속이라곤 하지만 감각마저 둔해진 것은 아니다. 어떻게 왔는지, 정말로 적인지 묻기 전에 적의 공격에 대응한다.
공화국군은 어마어마한 사격을 퍼붓는다. 그러면서 아군 기갑사가 와 주길 기다린다.
이렇게까지 참호선에 가까이 접근한 적을 포격으로 쫓아낼 수는 없다. 일단 기갑사엔 기갑사로 대처한다. 백병전으로 시간을 끄는 사이, 전차들이 와서 공격해줘야 한다.
보병들 몇이 끔찍하게 죽어 나갔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더 피해가 커지기 전에 기갑사들이 도착했다.
“적에게도 기갑사가 있었나.”
“들은 적 없어.”
기갑사에 탑승한 이단들 사이에 무미건조한 통신이 오간다.
“그럼 고려군이겠군.”
놀라거나 감탄할 시간은 없다. 아니, 애초에 기갑사에 탑승하면 이상할 정도로 차분해진다. 그들은 이런 상황에 대비해 받은 훈련만을 떠올리며 대처한다.
“기갑사의 기습은 전선돌파를 위한 것.”
“따라서 아군 전차가 도착할 때까지 돌파를 저지해야 한다.”
기갑사는 어디까지나 이단의 몸을 연장한 것이다.
이단은 루우 같은 예외적 존재가 아니면 백병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단이 한 번 참호에 뛰어드는 것만으로도 피바다를 만들기엔 충분하다.
그러나 이단도 같은 이단의 칼에 맞거나, 예기치 않은 포격에 죽는 건 일반인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단의 육체를 보호하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고안된 게 기갑사다. 전투방식 자체가 크게 달라지진 않는다.
공화국 측 기갑사 부대는 적 기갑사와 백병전을 벌이기 위해 바짝 접근한다.
그런 공화국 기갑사 중 하나가, 중심부부터 터져나간다.
“……?”
경악보다는 희미한 의문에 가깝다. 기갑사의 중심부에는 이단의 조종석이 있다. 그 조종석을 노리는 공격은 확실히 기갑사 대응 전술 중 하나다.
하지만 보통은 적 이단이 거대한 냉병기로 조종석을 베어버리는 방식일 텐데?
이렇게 폭발하는 공격이라면……?
굉음과 불길, 연기 너머로 포연을 걷어내는 적 기갑사의 모습이 보인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아니다. 누구나 할법한 생각이지만, 다른 대체품이 있으니 시도하지 않았을 뿐.
팔에 냉병기 대신 화포를 붙인, 고려 측 기갑사가 움직이고 있다.
“본래는 포병이 운 나쁘게 적 전차를 마주쳤을 때 쓰는 전법일 텐데.”
하지만 전차 이상의 기동력을 보일 수 있는 기갑사라면, 사용 양상이 조금 달라진다. 이런 식으로 상대 기갑사를 움츠러들게 할 수 있다.
화포를 든 기갑사 뒤쪽, 다른 기갑사가 포탄을 장전하고 있다. 이렇게 2인 1조로 움직이는 기갑사의 수는 적다.
희생을 감수하면서 접근해 백병전을 치를 수 있지 않을까.
포격. 섬광. 튀어 오르는 흙. 이번엔 공격을 막아내지만, 창을 든 기갑사의 팔 하나가 날아간다.
“전투불능은 신속히 후방으로. 나머지는 적과 교전한다.”
이제는 포격에 아군도 휘말려들 수 있는 거리까지 적이 다가오자, 고려 측 기갑사는 증기 빠지는 소리를 내며 포신을 분리한다. 등 뒤에 달고 있던 칼날을 팔에 장착한다.
마치 보병이 착검돌격을 준비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