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압(1)
볼로드와의 회담은 그저 지금까지와 같은 우호, 조속한 내란 평정을 다짐하는 성명만 발표하는 것으로 끝났다.
루우까지 동명의 황궁으로 돌아가면 칸발리크에는 이제 더 볼일이 없다. 그랬기에 그녀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리안은 배영훈 중령의 기갑사 부대를 이끌고 시물투에 있는 김천열 대장의 사령부로 북상한다. 본국에서 추가 편성된 기갑사 부대 역시 시물투로 향했다.
시물투는 고려와 몽골의 국경, 흥안령 산맥을 넘은 철도가 처음으로 닿는 대도시다. 1929년 고려 내전 때, 몽골계 주민들을 보호한다며 서북부로 침투했던 부대의 사령부가 여기에 있었다.
지금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고려-몽골 연합군, 그중에서도 김천열이 담당한 동부 전선의 사령부가 자리 잡았지만.
효윤은 다시 리안의 최측근 경호로 돌아갔고, 태주갑 중령을 비롯한 이단들도 효윤을 따라 리안을 수행 중이다.
리안이 시물투로 향하는 동안, 견하는 황제 루우를 수행해 고려 본토로 돌아갔다.
열차 안에서, 리안은 효윤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누웠다.
잠을 자진 않았다. 그 대신 칸발리크를 떠나기 전, 루우와 만나 나눴던 대화를 곱씹어 본다.
***
“이제 귀국 하셔야지.”
오랜만에 루우 앞에 선 리안은 그런 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루우는 조금 기운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너무 오래 나와 있었어. 남은 일들은 잘 부탁해, 타이시.”
황제의 귀국이었지만 짐은 간소했다. 그 또래 소녀들과 비교해도 상당히 소박한 짐이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은 뿌리치고 스스로 짐을 챙기는 루우를 바라보다 말고, 리안은 곁에 있는 의자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왜 거부한 거야? 카간 자리.”
루우의 손길이 순간적으로 멈칫한다. 리안은 심드렁한 태도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지만, 그 찰나의 정지, 그 안에 담긴 감정의 동요만큼은 놓치지 않았다.
무신경한 애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면모도 있었나, 조금 놀라워하면서.
루우는 다시 손을 움직인다.
“짐이 아직 그 자리에 오르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고려의 황제 자리는 올라도 되는 자리고?”
“고려 황제만으로도 짐에겐 버겁다는 뜻이야. 짐은 더…… 성장할 시간이 필요해.”
리안은 몸을 돌렸다. 루우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래서 숙부를 ‘중간 단계’로 설정해둔 건가? 네가 충분히 준비될 때까지 맡아두라고?”
“공석으로 둘 수는 없잖아?”
이제는 루우도 리안을 똑바로 바라본다. 짐은 전부 챙겼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꽤 긴 시간의 대치는 푸념 섞인 리안의 말로 끝났다. 루우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멀리 돌아가는 것 같았지만 결국 키타이와 낭키아스 모두 몽골 제국의 속령임을 다시 확인했지. 다이온 연방에도 참여하게 될 거야. 고려 뿐만 아니라 4개국 모두의 국가 원수가 된다, 그런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지 않았어?”
혹은, 이라며 리안은 폭풍처럼 말을 쏟아냈다.
“게레센제나 울제이에게 카간 자리를 양보하면서, 자신은 ‘아버지처럼 칸발리크를 해방시켰지만, 부당하게 숙부들에게 자리를 빼앗긴 소녀’를 연기하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 좀 더 몽골의 민심을 확고하고 잡고 카간 자리로 나아가려고?”
그건 루우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볼로드와…… 견하도 했던 계산이다.
하지만 루우는 지금 여기서 견하를 방패로 삼고 싶지 않았다.
견하와 리안이 다투게 되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고.
“그래. 그런 계산도 없진 않았어.”
하지만 리안은 루우의 그 수긍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루우의 말 너머, 그녀가 감추고 있는 마음을 엿보기라도 하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다.
“말해 봐.”
다시 추궁한다.
그거 이상의 뭔가 있잖아.
“날 똑바로 보고.”
군신의 관계라고만 하면 불손한 태도라고 할 수도 있다.
정치적 관계라고만 하면 지나친 견제 행위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주 본 리안의 눈은 조금 달랐다.
친구…… 혹은 지금까지 2년의 난세를 함께 헤쳐 나온 동지의 눈.
세상은 두 어린 계집애가 과분한 지위와 권력을 누리기엔 너무나도 거친 곳이었다.
새삼 그녀가 얼마나 든든한 전우였는지를 떠올리게 된다.
루우의 입에서 가벼운 한숨이 나왔다.
감출 순 없겠지.
“태사는, 아버지가 그립다고 생각해 본 적 있어?”
그거였나.
리안은 안쓰러움에 자신의 팔꿈치를 움켜쥐었다.
루우는 단순히 카간위를 계승하지 못하겠다는 게 아니었다.
‘아버지의 계승자가 되기엔’ 준비가 덜 된 것이다.
루우의 마음속 아버지는 마냥 사랑하는 다정한 아버지도 아니었고, 준엄하지만 존경할만한 가장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도 그녀의 용서를 받지 못한 존재로…… 영영 박제되어 버렸다.
그런 마음을 변화시킬 가능성조차 완전히 죽어버렸다. 아버지에 대한 일말의 애정을 품고 있다 해도, 그건 이제 가슴에 턱 걸린 응어리로만 평생 남게 될 것이다.
“……내 아버지 본인이 그립다기보다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그리웠다고 할 순 있겠지. 어머니도 마찬가지고. 백부님이 날 잘 보살펴주시긴 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를 완전히 대신할 순 없었으니까.”
리안도 망설임 끝에 그렇게 답했다.
황제라는 가면을 쓴 소녀는 바닥을 내려다본 채, 떨구듯 말했다.
“아버지에 대해 어떤 감정을 품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리안은 그런 루우에게 다가갔다. 껴안아주는 것도, 그저 어깨를 다독여주는 것도 위로의 방법이었겠으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양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고개를 들게 한다.
생각보다 볼살이 부드럽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마음 다잡아, 황제.”
갑작스런 접촉에 당황한 루우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구른다.
“우리는 고아야. 괴롭지. 그런데 그 괴로움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방법은 없어. 마음 어딘가에 구멍이 뚫려도, 그건 그냥 그런대로 살아가든지, 아니면 다른 보강재로 대충 막고 살든지 해야 돼.”
리안의 경우에는, 효윤과 견하라고 해야겠지. 여기에 루우도 더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남은 평생,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그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스물하나가 된 리안에게도 버거운 일이다.
생일이 다른 친구들에 비해 늦어, 얼마 전에 열여덟 살을 넘긴 루우에겐 더 버겁겠지.
새삼 참 어리구나, 어린데도 많은 걸 감당하며 사는구나, 그런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렇지만 황제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는 것만큼은 멈추지 않는다.
나는 황제의 태사로서, 당신의 어좌 바로 아래에 끝까지 버티고 서 있겠다는 듯이.
이윽고 루우는 끄덕였다. 그제야 리안은 루우의 얼굴을 놓아주었다.
루우는 어색한 손짓으로 자기 볼살을 만지다,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그 어색한 웃음은 한결 편해 보였다.
***
“가끔은 말이지, 소녀 가장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허벅지 쪽에서 들려오는 뜬금없는 말에, 효윤은 ‘예?’하고 되물었다.
“가족 같은 사이잖아, 우리들.”
우리들…… 이라고 하면 리안과 효윤, 견하를 말하는 걸까.
“견하도 너도, 손이 참 많이 가는 동생들 같아서, 내가 너희를 책임지고 돌봐야 할 소녀 가장이라도 된 것 같다는 거야.”
그리고 모두들 고아다. 정말 그들을 가족이라 할 수 있다면, 제일 나이가 많은 리안이 가장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루우도 마찬가지야.”
“루우도요?”
그러고 보니…… 그렇다. 이번에 그녀 역시 가족을 잃었다.
“그래, 황제라기보다는, 역시 너희들처럼 돌봐줘야 할 여동생으로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말이 늘어지는가 싶더니, 호흡이 고르게 변한다.
효윤은 가만히 리안의 얼굴을 살폈다. 작고 귀여운 입술에서 들숨과 날숨이 조용히 오간다.
잠이 든 모양이다.
고된 업무에 지친 그녀를 깨울까 싶어, 효윤은 혼잣말 한마디 중얼거리지 못하고 머릿속으로만 리안의 말을 되뇌었다.
***
1931년 새해가 되었다.
황제의 신년사가 라디오에 실리고, 영화관에서도 영화가 상영하기 전에 스크린에 오른다. 신문은 말할 것도 없고.
지난 한 해, 대공황으로 어두운 시절을 보낸 국민들을 치하하고 위로하는 메시지를 담은 신년사였다.
그러면서 지금 벌어지는 일과,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우방인 몽골에서 벌어진 끔찍한 테러.
그로 인해 유례없는 참상을 겪는 몽골인들을 도우러 고려의 군인들이 나섰다.
고려 군인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한편으로,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멀쩡한 나라를 전란으로 몰고 간 반란 세력을 규탄한다.
사람들은 그 반란 세력에 ‘허동주 반군’을 겹쳐보고, 역시 분노한다.
그 분노에 비례해, 우리는 평화를 위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자부심을 느낀다.
신년사에는 태사 미리안이 직접 군을 지휘해 몽골 반란군을 진압하러 갔다고, 그 용기와 헌신을 찬미하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권력의 중심부 내에서 어떤 이합집산이 이루어지는지 잘 모르는 사람들은, 태사와 황제가 화합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무척 안정되어 있다고 판단한다.
신년사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황제가 테러리스트들에게 부모를 잃었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는 견하와 감찰국의 공작이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황제에 대한 동정심이 번진다. 황제가 순수한 고려인이 아니라 몽골인 혼혈이라는 점을 탐탁지 않아 하던 의견도, 그 동정심에 파묻혀 버렸다.
동정 다음은 분노다.
우리의 황제를 아프게 한 자는 고려 국민의 적이다. 여론은 일치단결하고, 황제의 원수를 갚으러 간 태사에 대한 지지로 재생산된다.
잠시 시들해졌던, 고려의 황제가 몽골 카간 자리를 겸해야 한다는 여론에도 불이 붙는다. 정책은 그런 여론을 등에 업고 다시 추진력을 얻는다.
이제 견하는 기다린다.
몽골 내전이 진압되고, 다이온 연방이 공식적으로 출범할 날을.
그날이 오자마자 필요한 조치를 한꺼번에 취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 과정을 철저히 점검하며.
잠깐 여유가 생기자 견하는 자신과 효윤, 루우의 제1대학교 진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김천열이 자신의 병력에 적응하고, 그 병력이 자신의 지휘에 익숙해지도록 기강을 잡았듯이, 울제이도 자신이 맡은 전선의 지휘체계를 확립하며 시간을 보냈다.
참모본부 및 일선 지휘관들, 고려 측 지원부대들과 계속해서 의견을 나누고, 혹시 모를 혼선이나 빈틈이 없도록 깔끔하게 다듬어 나간다.
그런 절차가 끝나고 나서는 연습을 거듭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한다.
자신의 기존 키타이 참모들 수준에 이르렀다는 판단이 서자마자, 울제이는 군대라는 이름의 전쟁기계를 작동시켰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서울 정도로 ‘적확한’ 공격이, ‘필요했던 곳’에 가해진다.
병사의 목숨 하나도 계산해서 소모하겠다는 듯한 그 공격으로, 마침내 알타이 자유 공화국의 전선은 물러서기 시작했다.
겨울은 공화국군에도 똑같이 가혹했다. 조건이 같다면 지휘관의 역량이 승패를 가른다.
카라코룸 및 서부에서 일어난 소요 사태로 공화국 정부는 제대로 된 지원도, 지휘도 하지 못했다.
울제이는 그대로 그 자신과 형에게 영광을 가져다줄 거라고 생각했다.
고려군 소속인, 이제껏 없었던 대규모 기갑사 부대가 동쪽에서 움직이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