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12)
통역을 사이에 둔, 다소 박자가 느린 대화가 이어졌다.
“우호의 기초는 양국의 공통점을 찾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볍게 차를 들면서, 볼로드는 먼저 말을 꺼냈다. 옳은 말이다. 그 뒤에 감춰진 의도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공통점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궁금하군요. 이제부터 탐구해 나가야 할 공통점일까요?”
시치미를 떼듯, 그렇게 되물어본다. 볼로드는 양국의 ‘공통과제’가 아니라 ‘공통점’이라는 말을 썼다.
앞으로 함께 해결해가야 할 일이 아니라, 이미 함께 하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볼로드, 몽골의 재상은 몸을 조금 앞으로 숙이며 말한다.
“쿠릴타이가 열리기 전, 저는 돌아가신 선대 카간의 뒤를 당연히 그분의 자식이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고려의 황제는 볼로드의 추대를 거부했다. 마침 고려에서 온 주견하가 루우를 대신해 볼로드와 의논, 게레센제를 일단 카간으로 즉위시키자는 결론을 내렸다.
볼로드는 루우가 정확히 어떤 이유로 카간 자리를 거부했는지, 그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다.
견하에게 물어봤을 땐 ‘게레센제가 칸발리크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거래를 했다’는 설명을 들었지만……
그 이상의, 이유가 있을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애가 그리 간단하게 카간 자리를 포기할 리가 없다.
그건 회담이 끝나면 루우에게 직접 들어봐야겠지.
볼로드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그리하여 카간 자리는 선대 카간의 동생이신 게레센제 카간께로 이어졌습니다만, 저는 그 다음 카간만큼은 고려의 황제께서 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게레센제가 즉위한 지 일 년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후계 구도를 논한다는 건 불충 아닌가.
하지만 리안은 볼로드의 충성심에 대해서는 따지고 들지 않았다. 지금 여기는 그런 시시한 이야기를 할 자리가 아니니까.
“우리 황제 폐하가 다음 카간 자리를? 바이다르 태자가 아니라요?”
“바이다르 전하는 아직 태자가 아닙니다.”
마치 리안의 가벼운 실수를 정정해준다는 듯, 볼로드는 그렇게 말을 받았다. 그러나 볼로드도 그것이 리안이 ‘일부러’ 저지른 실수임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바이다르를 태자로 세우든지 해라. 나는 고려가 몽골과 하나가 되는 걸 딱히 바라지 않는다는 의사 표시.
볼로드의 말도 단순한 정정이 아니다. 자신은 게레센제가 바이다르를 태자로 세우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어떻게든 몽골-고려 동군연합을 만들겠다는 뜻.
신경전은 충분히 오간 듯하니, 이젠 리안이 묻는다.
“굳이 그렇게 고려와 몽골 간 동군연합을 만들려는 이유는 뭐죠?”
“선대 카간의 오랜 뜻이기도 하셨습니다. 다시는 누군가에게 침략당하지 않을 체제를 구축하겠다는.”
요컨대, 볼로드는 자기식대로 ‘다이온 연방’의 꿈을 키워왔던 모양이다. 태평천국의 침략을 당한 기억이 ‘거대한 나라’에 대한 집착으로 변한 걸까.
“뭐 다 좋다고 칩시다. 현 카간께서 언제 우리 황제 폐하께 카간 자리를 물려주실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양국이 ‘동군연합’ 그 이상의 관계로 발전해선 안 됩니다.”
완전한 합병은 안 된다는 뜻.
“마찬가지로 키타이와 낭키아스의 정치적 독립 역시 지켜져야 하고요.”
“고려의 태사께선 균형을 무척 중시하시는군요.”
반쯤은 감탄, 반쯤은 비아냥거리는 말.
“한족 독립운동의 기세는 날로 거세어져만 가고, 힌두-바라트에서 밀고 올라오는 공산주의의 물결은 사회 안팎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동아시아 4개국이 각자의 국력만으로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기 위한 관세동맹 아니었나요? 말씀하신 위협들은 몇가지 개혁을 통해서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텐데요? 마침 내전을 통해 개혁의 반대파들도 쓸어낼 좋은 기회를 얻지 않았습니까?”
리안은 자연스럽게 몽골 개혁 이야기를 꺼내면서, 다시 한번 못을 박는다.
‘다이온 연방’은 기존 관세동맹을 조금 발전시킨 형태로만 머물러야 한다.
볼로드는 ‘개혁’이라는 말에 살짝 당황하는 눈치다. 그 당황을 추궁하듯, 리안은 다시 물었다.
“개혁의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겁니까? 무엇이 문제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파악은 해두셨습니까?”
“태사, 지금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여기 모인 게 아닙니다.”
“아뇨.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만난 겁니다. 동맹국의 내전을 끝내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체제 개혁을 돕기 위해서 말이죠.”
리안의 어조는 단호했다.
볼로드는 루우 테무루의 카간위 계승에 대한 논의가 어쩌다 개혁 문제로 넘어갔는지,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무굴 제국도 개혁을 미루기만 하는 멍청한 짓거리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에 멸망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런 역사적 사례를 보고도 느낀 게 없진 않으시겠죠.”
무굴 제국은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의 전신이다. 그 국호 ‘무굴’의 기원은 바로 ‘몽골’인데, 리안은 바로 이 점에 착안해서 논쟁의 주도권을 잡고 있다.
먼 친척처럼 개혁을 소홀히 한 대가를 치를 것인가, 아니면 이번에야말로 사회적 모순을 완화해볼 것인가.
“엄청나게 무리한 개혁을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고려에서 성공적인 개혁 모델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진즉에 미리안이 했듯이 사회주의자들, 민주주의자 혹은 공화주의자들과 손을 잡았다면 이 내전도 좀 더 쉽게 풀렸을 터. 리안은 내전에서 승리한 만큼 자신이 만든 제3제국의 체제에 자부심이 있었다.
볼로드의 눈이 가늘어진다.
“태사, 그토록 개혁을 강조하시는 건, 끝내 4국이 통합된 다이온 연방을 구성하는 데에는 반대하신다는 겁니까?”
“개혁을 통해 번영을 추구하고, 관세동맹을 통해 그 번영을 나누면 충분한데 무리해서 통합을 진행할 이유가 없죠. 굳이 그러지 않아도 ‘다이온’이라는 이름은 우리를 강력한 군사 동맹으로 묶어줄 겁니다. 안보 문제도 그쯤 하면 해결되지 않나요?”
고려군이 몽골 내전에 개입했을 뿐만 아니라, 낭키아스의 한족 반란군 진압에도 투입된 상황이다.
이미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체제에 대체 뭘 더하고 싶단 말인가.
“고려의 태사께선 혹시, ‘더 거대한 하나’가 되었을 때 4국의 만민이 누릴 혜택보다, 본인의 ‘독립적 지위’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시는지요?”
볼로드는 에둘러 말했지만, 그게 비아냥임을 모를 리안이 아니다. 그녀는 능란하게 볼로드의 말을 받아친다.
“저의 독립적 지위가 아니라 ‘연방 내에서 고려가 누릴’ 독립적 지위죠. 그보다, 몽골의 타이시께선 혹시 통합된 다이온에서 누릴 유일한 재상의 지위를 탐내시는 건 아닌지?”
볼로드는 비웃음 비슷한 것을 흘린다. 두 사람 모두 기품있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조금 피곤하군요. 오늘은 이쯤에서 쉬고 회담은 내일부터 차차 이어나가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게 좋겠군요. 몽골 타이시께서도 칸발리크 피해 복구로 바쁘실 테니, 제가 너무 시간을 잡아먹어선 안 되겠죠.”
***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야!”
국빈인 미리안은 상당히 호화스런 방으로 안내받았다.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온 견하가 문을 닫고, 두 사람만 남게 되자마자 리안은 왈칵 짜증을 냈다.
그 모습에 견하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이미 고려에서 ‘볼로드로는 안 된다’고 하셨었잖아요.”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짜증은, 약간은 연인 앞에서 부리는 응석이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온다.
“직접 이야기해보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지. 이렇게까지 답답할 줄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꼰 채, 눈동자만 들어 견하를 올려다본다.
스타킹 안의 발가락 끝이 살짝 움직이고, 올려다보는 눈은 도발적인 물음을 던지는 듯하다.
견하는 무릎을 굽혀 리안과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면, 볼로드를 교체하실 건가요?”
마치 리안이 그럴 권한이 있다는 듯한 질문. 노골적으로 내정간섭을 할 것이냐 묻는 것이지만, 리안은 고민 없이 끄덕였다.
“볼로드로는 몽골에 희망이 없어. 차라리 우리와 제휴한 사회주의자 중에서 새로운 태사를 찾는 게 나을걸.”
“황제 폐하도 귀국하시고, 누나도 여기 오래 머물진 않을 텐데 어떤 식으로 몽골의 개혁을 ‘지도’하죠?”
“뭐 이미 결정됐잖아? 다이온 연방이 창설되면 우리 제국최고회의나 군에서 고문단을 보내기로. 그 사람들한테 ‘통감부’같은 적당한 이름을 붙여서 개혁을 감독하게끔 하면 되겠지. 게레센제 카간의 뜻만 제대로 선다면 볼로드를 해임하는 거야 어렵지 않을 테고.”
그래도 게레센제와 볼로드가 한통속이 아니라 다행이야, 라고 리안은 덧붙였다.
“볼로드가 루우의 계승을 주장한다면, 게레센제와 볼로드는 끝내 화합할 수가 없지.”
술술 나오는 다음 대책들에, 견하는 솔직한 감탄을 담아 리안을 바라봤다.
그렇게 눈을 마주치고 있다 리안은 에잇, 하며 다리를 들어 견하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가느다란 다리, 부드러운 종아리가 견하의 귓가와 목덜미를 감싼다. 견하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종아리를 감싼 스타킹 위에 견하의 입술이 스친다.
잠깐 감았던 눈을 떠서 리안을 보니,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이대로 따스한 분위기와 점심 식사의 포만감에 취해, 껴안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 루우가 귀국하면, 배영훈 중령과 기갑사 부대를 전선으로 옮기실 거죠?”
“그렇지. 지금까지 루우 때문에 여기 묶여 있었던 거고, 원래는 전투 부대니까. 본국에서 추가로 뽑은 기갑사 부대도 합류해서 전선으로 나갈 거야. 게레센제의 경호는 원래 우리 책임이 아니잖아? 그건 낭키아스나 몽골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
“누나 직속 부대로요?”
“그래. 태사부 직속 부대로.”
견하는 알겠다는 듯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인 후, 천천히 재연과 의논해 두었던 제안을 꺼냈다.
“그럼 그 김에 누나가 직접 전선 지휘에 참여해보시는 건 어때요?”
“내가?”
“네. 동명 방어전 때나, 심양 확보전 때처럼 말이에요.”
“……뭐 내가 최고결정권자니까 누구 눈치 안 보고 내 마음대로 전황을 풀어갈 방법이긴 하지. 우리랑 손잡았다는 사회주의자들하고 직접 연락하면서 작전을 짠다면 상당히 효과적이긴 할 거야.”
카라코룸에서 사회주의자들의 봉기가 일어날 때를 맞춰 리안이 공세를 시작하면 반란군은 무너질 터. 반대로 리안이 맹공을 퍼붓는 동안 사회주의자들이 봉기로 반란군의 숨통을 끊어놓을 수도 있다.
리안은 다리를 견하의 어깨 위에서 내려놓는다.
다시 한번 진지한 얼굴로 돌아가, 견하가 좋아하는 그 열망으로 눈을 빛낸다.
“카라코룸, 반드시 우리 주도로 확보해야 해. 이제 내 뜻을 벗어난 정세는 도저히 참아줄 수가 없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