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11)
카라코룸으로 천도를 할 생각이라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카라코룸을 일단은 군사적으로 장악하는 것.
아직 범 알타이 인민동맹, 그들이 주도하는 알타이 자유 공화국이 여전히 카라코룸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라코룸을 수도로 한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꽤 여러 사람에게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나중에 카라코룸을 점령한다면, 반란군 측 문서들을 자료로 활용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군.”
단순히 도시를 둘러싼 공방전 자료만 넘겨받는 게 아니라, 실제로 카라코룸을 수도로 해서 어떤 행정을 펼쳤는지, 그 경험을 물려받을 수 있다.
견하의 말에 재연은 약간 냉소적으로 답했다.
“그자들이 기록을 제대로 하는 꼼꼼한 성격이라면. 어설프게 시도한 내전, 되다 만 공화국으로 기록물을 남길 체계는 갖췄는지 모르겠네.”
동족 혐오인가? 견하는 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성급하게 태사 미리안과 대결을 시도한, 여물지 않은 사상으로 국민 모두를 껴안으려고 했던 허동주 파벌에 대한 한재연 나름의 결론이 아닐까, 하고.
재연이 허동주의 그늘을 벗어났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지만, 그래서 재연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알기 어렵다는 게 문제다.
엉뚱한 방향으로 발전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재연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다시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저들이 제대로 참고할만한 뭔가를 남겨뒀든 어쨌든, 카라코룸을 우리 수중에 넣어야지만 생각해볼 수 있는 일이야. 그러니 카라코룸이 아직 적의 손에 있는 상황에선 탁상공론이지.”
그래서 한가지 아이디어를 내봤다. 재연은 그렇게 덧붙였다.
“단순히 함락시키는 것뿐만이 문제가 아니야. 카라코룸에 어떻게 고려의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느냐가 문제지. 그냥 저절로 잘 되길 바라며 방치하면, 볼로드나 게레센제가 다른 마음을 먹는 순간 우리 계획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돼.”
그 부분은 견하도 느끼고 있다. 볼로드나 게레센제, 그리고 이번에 몽골 정부에 합류한 울제이는 바보가 아니다. 견하나 루우가 뭔가 행동하면, 당연히 저쪽에서도 최대한 지혜를 짜내서 대응해올 터.
어지간한 매국노나 권력욕 자체가 거세된 사람이 아니고서야, 내정간섭이 벌어지는 모습을 뻔히 보고만 있진 않는다.
그렇다. 내정간섭. 솔직히 인정하자. 지금 루우와 견하가 획책하는 게 내정간섭이 아니면 무엇인가?
합병 의도 따윈 품지 않은 순수한 우호의 발로라는 거짓말, 그걸로 스스로도 속일 셈인가?
겉으로는 사람들을 속일지라도, 속이는 자신은 속아선 안 된다. 현실을 똑똑히 봐야 한다. 그래야 뭘 해야 할지도 제대로 보인다.
게레센제나 울제이는 고려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싶어하고, 볼로드는 다이온 연방의 형성은 바라지만 주도권은 자기가 쥐길 원한다.
반대로 견하나 재연, 루우는 고려의 주도로 다이온 연방을 창설하길 바란다.
따라서 방해를 물리치고 내정간섭, 종속, 합병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수행할 기구가 필요하다.
항구적인 내정간섭기구가.
그런 기구는 현 수도인 칸발리크에도 당연히 설치되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향후 다이온 연방의 수도가 될 카라코룸에는 반드시 설치되어야 한다.
“태사 각하께서 곧 칸발리크로 오실 거야.”
그 이야기는 들었다. 루우를 귀국시키는 대신 리안이 직접 와서 볼로드와 협상한다고 한다.
“각하께 내가 말씀드려볼 수는 있겠지만, 그런 내정간섭기구의 설치를 각하께서 허락하실 것 같진 않은데.”
견하의 의문에 찬 시선을 받은 재연은 웃었다. 오랜만에 견하가 짐작하지 못하는 발상을 해서 즐거운 듯 보였다.
“맞아. 앞으로 몽골을 합병하고 다이온 연방의 주도국이 되는 데 필요한 기구를 설치하는 데 도움을 주십시오, 해봤자 호통이나 안 들으면 다행이지.”
그러니까 우리는 기다릴 거야, 라고 재연은 덧붙였다.
“기다린다니?”
“두 태사의 회담 결과를.”
미리안과 볼로드. 회담은 처음이라고 들었다. 과연 어떤 이야기가 오갈까.
“견하는 너는 회담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질문을 받은 견하는 고개를 갸웃한다. 글쎄.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다. 다만…….
“성향상 두 사람이 잘 맞긴 어려울 것 같긴 해.”
“맞아. 필요하다면 망설임 없이 개혁에 착수하는 우리 태사 각하와, 수십년 간 이어진 체제를 고수해 온 볼로드 태사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지.”
“그 차이가 외교정책에도 반영된다면, 회담이 잘 풀리긴 어렵다는 건가?”
“우리는 몽골 내 사회주의자들과 거래를 했어. 태사께선 계약을 이행하려 하시겠지. 단순히 거래 상대방과의 의리를 지키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야. 고려의 안보는 고려 주변국들의 안보와 깊은 관련이 있어.”
재연의 말대로, 주변국의 정세가 안정되어야 고려도 비로소 안심하고 내실 다지기에 몰두할 수 있다.
내란이 일어나거나 정부가 뒤집히는 바람에, 대체 어떤 식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이웃을 옆에 두고 편한 잠을 잘 수 있는 나라는 없다.
따라서 다소의 내정간섭은 불가피하다. 미리안은 볼로드에게, 지금 몽골 내전이 끝나는 대로 개혁에 착수하라고 주문할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의 개혁방안을 받아들이면 국민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다. 그들을 정부든 입법 기구든 참여시키면 혁명이 아니라 국가기구에 헌신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몽골 사회주의자들과의 신용을 지킨다. 뿐만 아니라 몽골 제국 자체도 극단적 혁명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안정될 수 있다.
“하지만 볼로드는 상당히 완고한 성향의 소유자야. 개혁할 필요가 있느냐, 불온한 사상, 불순분자를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하겠지.”
견하는 전에 리안이 볼로드에 대해 했던 말을 떠올린다. 그녀도 ‘볼로드로는 어렵다’고 했었다.
“회담 분위기는 분명히 안 좋을 거야. 두 태사 간 감정만 상하고 끝날 수도 있지. 그때를 노려서 진언해보는 게 어떨까?”
견하는 재연의 말이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볼로드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 시대착오적 발상으로는 몽골에 분란이 그치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고려에서 주도해서 몽골의 개혁에 착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지경까지 가게 되면 태사께서도 몽골에 내정간섭기구를 설치하는 데 동의하시겠지…… 상당한 제약이 걸리겠지만.”
“설치만 된다면, 그 기구를 지키는 데 필요한 병력도 주둔시켜야 해. 또 그러려면 ‘해외 주든 제한법’의 예외 조항을 만들어야 하고.”
“혹은 아예 ‘정식 군인이 아닌 자들’을 배치하는 방법도 있지.”
감찰국, 혹은 정치경찰실이 그 역할을 맡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볼로드를 대신할 인간을 찾아내야 하는 문제가 있지만…… 적당히 정권을 유지하다가 고려에 넘겨줄 인간 정도는 언제든 ‘대체품’이 있다.
“그리고 이번에 황제께서 귀국하시면, 그 덕에 기갑사 전력이나 최효윤 중장을 비롯한 측근 경호원들의 운신이 자유로워진다더라고. 이걸 어떻게 이용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봤지.”
그러면서 재연은 모두가 기억하는 사실 하나를 끄집어낸다.
리안은 고려 내전 초기에 놀라운 지휘력으로 수도 동명을 지켜내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었다.
지금 몽골로 파견된 병력을 전부 대원수인 그녀가 통솔하게끔 하면 어떨까?
조유관은 외무성으로 자리를 옮기고, 겨울이 오기 전에 카라코룸 공략을 장담했던 김천열은 지지부진하다. 이럴 때 그녀가 군을 직접 지휘하겠노라고 선언하는 것만으로도 사령부의 분위기나 군의 사기는 진작될 터.
“대원수가 나서는 작전이니만큼 제국최고회의나 여론도 더 많은 파병, 더 많은 지원 쪽으로 움직일 거고, 그러면 적을 압도하는 전력을 갖추기도 쉬워. 무엇보다도 태사께서 직속 기갑사 부대를 활용하면 적 기갑사에 대응하는 것도 가능하고.”
그리고 거리상으로도, 명령체계 상으로도 몽골 사회주의자들과 접촉하기가 편해진다.
카라코룸 및 자유 공화국의 서부에서 일어난 소요 사태에 대한 보고를 빠르게 받고, 그 상황에 따라 보다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된다.
리안은 군의 최고 결정권자이기에 따로 누군가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고.
“게다가 태사께선 이번 일을 기회로 내전 후 동아시아 체제 개편에 황제 폐하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고 들었어.”
즉, 미리안은 이 내란을 평정하는 데 가장 공이 큰 건 나니까 내 말을 들어라, 라고 말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들을 잘 이용하면 태사 각하를 설득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거라고 봐.”
견하는 끄덕였다. 충분히 수긍할만한 의견이었다. 이번 일이 재연이 말한 대로 풀린다면, 재연을 어엿한 감찰국의 참모라고 봐도 좋을 것 같았다.
“태사께서 칸발리크에 도착하시는 대로 착수해야겠군. 그리고 볼로드와의 회담 자리에도 참석해봐야겠어. 그 사람이 어떻게 나오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
카간 게레센제는 새너두로 나아가 군을 지휘하고 있기도 했지만, 칸발리크에서 있었어도 태사 미리안을 맞이하기엔 격이 맞지 않아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루우가 안 나온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입헌군주제여도 군주는 군주, 그 아래 태사는 태사다.
당연히 동격인 몽골 태사, 볼로드가 그녀를 마중 나왔다.
형식적이지만 반드시 오가야 할 말들이 오간다. 만나서 반갑다는 둥, 진즉 만나지 못해 아쉽다는 둥 예를 갖춘 말들.
볼로드의 안내를 받아 역에서 황궁으로 향하며, 리안은 처음으로 칸발리크의 참상을 두 눈으로 보았다.
파멸인을 잡느라 도시 안쪽에 포격을 해댔기에, 많은 건물이 흉터를 안고 있었다. 아예 폐허가 되어버린 곳도 있었고, 대규모 살육이 벌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곳도 있었다.
피나 시체는 치워버렸지만,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죽음의 느낌이 거기에 맴돌았다.
그래도 시민들은 계속해서 생활을 이어나가고, 열심히 도시를 복구해가는 등 활력은 상당하다. 저 활력마저 죽어버렸다면 도시는 완전히 회생 불가 판정을 받았겠지.
물론 도시 주변에서도 칸발리크의 활력이 죽도록 내버려 두진 않았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몽골 제국의 수도이자, 아시아 내륙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거점 아니던가.
세계 증시는 요 몇 달간 또 지옥의 그래프를 그렸지만, 고려나 일본, 브리튼과 로마, 신성 제국 등에서 어떻게든 붙들고 완전히 난파하는 것만큼은 막는 중이다.
대공황이 막 시작되었던 1929년 말에는 모두가 허둥댔지만, 이제는 세계 주요국들도 요령이 붙어서 그럭저럭 대처는 하고 있다.
황궁에 도착하고서는 환영 만찬.
리안이 도착하자마자 효윤과 견하가 경호로 붙었기 때문에 서로 눈인사를 나눌 수 있었지만, 황제 루우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볼로드는 나를 회담 전에는 황제와 대면시키지 않을 셈인가.
리안은 그렇게 짐작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