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10)
주견하는 폐허를 살펴보고 있다.
임시로 설치했던 수용소의 폐허다.
무지막지한 포격으로 완전히 잿더미가 된 곳을 돌아보며, 견하는 혹시 작은 단서 한 조각이라도 남지 않았는지 살폈다.
파멸인이 되어가던 인간의 ‘기괴한 골격’ 같은 게 남아선 안 된다.
훗날 누군가 그 뼈의 형태를 수상하게 여기고 조사한다면…… 시간이야 걸리겠지만 진실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여기에 생물의 흔적은 없다. 사람 손으로 지은 건물의 흔적도 없다. 까맣게 말라붙은 잿더미만이, 서서히 흙과 뒤섞여 가고 있을 뿐이다.
그 정도로 포격을 퍼부으라고 명령했었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
“그래도 한 번 갈아엎는 게 좋겠군.”
그렇게 중얼거리고선 뒤따라오는 장교에게 다시 명령을 내려둔다. 견하가 이 자리를 떠나면 다시 군인들이 중장비를 몰고 와서 땅을 뒤엎어 놓을 것이다.
한재연은 그런 견하의 옆에서 따라 걸으며 동명에서부터 궁리한 새로운 계획들을 보고한다.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의 하위 계획으로, 우리 AN연구소에서는 「화림 계획」을 내놓았어.”
“‘화림’이라면…… 카라코룸을 한자로 음차한 건가?”
“뭐 정확하게는 ‘각라화림’으로 음차할 수 있지만, 보통은 그냥 ‘화림’으로 불렸지.”
쿠빌라이 카간이 카라코룸에서 칸발리크로 수도를 옮긴 후, 카라코룸을 중심으로 한 본래 몽골의 초원 본토는 ‘화림행성’이라는 행정기구로 재편되었다.
그때부터 한자어로 ‘화림’이라고 하면 이 카라코룸을 일컫는다, 는 게 재연의 설명이다.
그리고 지금, 재연이 견하 앞에 내놓는 ‘화림’이라는 이름의 계획도 카라코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견하가 언젠가 이야기했듯,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은 연방이 성립한 뒤의 신수도를 바로 카라코룸으로 가정하고 있으니까.
“천도는 보통 문제가 아니지. 위정자의 필요에 따른다고 해도, 국민을 납득시키는 일부터 각 관공서가 들어갈 부지를 확보하는 일, 수도를 중심으로 새롭게 행정 체계를 개편하는 일까지 해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닐 거야.”
따라서 ‘천도’에 관한 계획 자체를 따로 마련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재연이 들고 온 「화림 계획」이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아직 초안이니, 앞으로 계속 보강해야 할 거야. 그러니까 견하 네가 검토를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견하가 품고 있던 구상과 AN연구소의 학자들이 내놓은 계획이 얼마나 일치하는지 비교해봐야 했다.
학자들이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한다면 견하는 자신의 구상을 수정한다. 반대로 학자들은 견하의 희망이 현실화할 방법을 모조리 궁리해서 체계적인 「계획」으로 정리한다. 그렇게 계속 보완을 거쳐 가며 「계획」은 완성에 근접하는 것이다.
견하는 재연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재연은 견하에게 문서 한 뭉치를 넘겨줬다.
「화림 계획」이라고 무미건조하게 적힌 표지 아래, 그리 두껍지 않은 본문이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단 얇지만…… 뭐 준비 기간을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나. 그보단 항목이 상당히 세분되어 있군.”
“깊이 파고들어서 연구하는 건 차차 해나갈 일이고, 일단은 생각해볼 수 있는 건 다 생각해봐야 하니까.”
견하는 끄덕이며 페이지를 넘겼다.
「화림 계획」은 먼저, 시레문이 카라코룸에 남긴 성과를 정리하고 있다.
“이건 그때 우리가 카라코룸을 방문해서 봤던 것과 대략 일치하는군.”
“우리가 봤던 것, 그리고 그 몽골인 장교가 설명해줬던 게 당시 시레문 카간이 달성한 성과였지.”
카라코룸에 건설된 황궁, 발전소 등 기반시설, 보존되거나 복원된 역사 유적, 칸발리크에 버금가는 관공서들.
“마치 우리 고려가 동명특별시라는 수도가 있긴 하지만, 옛 수도인 평양에도 상당한 투자를 해온 것과 비슷해.”
다른 점이 있다면, 고려에서는 평양이 지난 세계대전으로 파괴되고 동명이라는 새 수도가 건설되었지만, 몽골은 카라코룸을 임시 수도로 삼았다가 다시 칸발리크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야 배경지식으로 알아두면 언젠가는 도움이 될 부분이긴 하지만, 정말 중요한 부분이 그 뒤에 있었다.
철도.
국가 운영에 있어 철도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고려인이라면 작년 내전을 통해 확실히 느꼈다.
시레문 카간은 미승휴가 주도한 고려의 경제적 성공을 보면서 철도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철도성 관료들을 닦달하다시피 하며 철도망 구축에 심혈을 기울였다.
“카라코룸을 유라시아의 중심도시로 생각한 건가, 시레문 카간은.”
“지정학적으로도 그렇지만, 우리 AN연구소 연구원들은 시레문 카간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됐다면 결국 그렇게 됐을 거라고 보더라고.”
카라코룸을 중심으로, 서로는 페르시아와 러시아, 콘스탄티누폴리까지 뻗어나가고, 동으로는 칸발리크와 동명, 잠시 바닷길을 거쳐 일본에까지 이르는 철도망을 큰 축으로 둔다.
그 선을 기준으로 몽골 내부를 철도망을 촘촘하게 구축, 세계 각지의 물자가 몽골 구석구석에 공급되고, 몽골 각지에서 생산된 물품과 자원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간다.
“시레문 카간도 천도 계획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지금은 알 수 없게 됐어. 살아 있었다면 언젠간 알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죽었으니, 이제 영원히 아무도 모를 것이다.
“조드 같은 추위를 대비한 온수의 공급, 상하수도 설비, 발전소…… 갖출 건 다 갖춘 도시야.”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공이 있으면 과가 있는 법.
“빈민 문제는 다소 완화하는 선까진 갔지만, 완전한 해결에는 실패했던 모양이야.”
그 문제가 결국 알타이 자유 공화국의 반란, 그리고 카라코룸 내부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진행 중인 봉기로까지 이어졌다.
“앞으로 우리가 카라코룸을 장악한다면 이 문제는 꼭 해결해야 해.”
도시 빈민 문제를 해결한다면 진정한 ‘해방자’로서 카라코룸 통치를 시작할 수 있겠지만, 실패한다면 처음부터 오명을 뒤집어쓰고 통치를 시작하게 된다.
그것은 ‘다이온 연방’이라는 정치체 자체에 대한 패널티로 작용할 것이다.
“시레문 카간 치세의 카라코룸은 이 정도로 정리가 됐고, 그다음은……”
만약 천도한다면, 이라는 가정하에 여러 가지 분석이 뒤따르고 있다.
가장 먼저 견하의 눈에 들어온 건, 전쟁에 대비한 카라코룸 요새화 항목이었다.
「화림 계획」은 어디까지나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의 하위 계획이다. 따라서 「화림 계획」은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의 전체적 맥락 속에서만 성립한다.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은 고려가 주도하는 연방을 그리고 있는 만큼, 여기서도 ‘적’으로 상정된 세력에 고려는 없다.
태평천국의 수도 응천은 장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함선의 포격에 취약했던 점, 해안까지의 거리가 짧아 넓은 국토를 활용한 방어전이 어려웠던 약점이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몽골의 현 수도 칸발리크 역시 바다를 통한 상륙전에 약하다.
고려가 산동과 요동을 장악하고 몽골의 앞바다를 지켜주는 형국이기 때문에 다행이지, 몽골 단독으로는 영해를 방어할 전력이 부족하다.
예를 들어 일본공화국과 몽골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고려가 개입하지 않거나 고려의 해군도 격파된다면 칸발리크를 방어할 수단이 마땅치가 않다.
해안부터 칸발리크까지 요새로 채워 넣는다 해도 거리가 너무 짧은 것이다.
카라코룸은 이러한 위협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설령 적의 상륙을 허용한다 해도, 적군 앞에는 공략해야 할 여러 요새화된 도시들이 놓여 있다.
칸발리크부터 시작해 새너두와 옹구차트, 시물투, 시르겐 나우르, 쿠에데 아랄, 바스키, 옹긴 등을 공략하지 않고선 카라코룸에 안정적으로 접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칸발리크는 무역항과 가깝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카라코룸이 칸발리크의 장점을 활용하려면, 두 도시 사이의 긴밀한 철도망이 꼭 유지되어야 한다.
앞서 철도와 관련해 서술된 부분에서도, 특히 카라코룸-칸발리크 간 철도를 강조했다. 그다음은 카라코룸-동명 철도였고.
카라코룸 자체도 강력한 요새로 주변을 뒤덮고, 지하철을 비롯해 각종 대피 시설을 완비한다. 카라코룸 주변 도시들도 요새화하지만, 그사이에 빽빽이 들어찬 토치카가 적의 진격을 저지하고 출혈을 강요한다.
그 외에도 방공망 구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유럽의 군대가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아즈텍 대륙에서 북극권을 통과해 공습해 올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지금 일반적인 폭격기로는 항속 거리가 닿질 않지만, 향후 기술의 진보에 따라 카라코룸이 위협받게 된다면 이에 대한 대비가 꼭 필요하다는 서술이 적혀 있다.
대충 그 정도까지 읽고, 견하는 다음 항목으로 넘어갔다.
“문화적인 부분인가.”
“고려와 몽골 민족 간 이질성을 극복하는 거야말로 다이온 연방의 중대 과제가 될 테니까. ‘알타이 민족’ 개념을 적극 활용함과 동시에, 몽골과 고려의 혼합 또는 몽골의 고려화를 진행해야지.”
약간 들뜬 재연의 반응에 견하는 고개를 갸웃한다. 하지만 일단은 읽는 걸 우선하기로 했다. 의견의 차이가 있다면 나중에 조율하면 된다.
카라코룸을 시작으로, 몽골의 교육 기관에 고려어 과목을 적극 장려한다.
지금도 선택 과목으로 고려어를 배울 수는 있지만, 이를 제도적으로 보완, 필수 외국어 과목으로 지정하는 것이다.
카라코룸 대학은 고려어나 문학의 성지가 된다. 지금도 고려어문학과가 있긴 하지만, 고려 제국정부 차원에서 막대한 재정적, 인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퍼붓는 것이다.
고려어와 문화에 익숙해진 몽골인 엘리트를 대거 양성할 수 있다면, 이들은 틀림없이 다이온 연방의 결속에 도움이 된다.
문화 정책을 가정한 다음에는, 천도 이후에 어떤 정치적, 경제적 변화가 일어날지 예측한 항목이 이어진다.
“경제적으로는 카라코룸 일대의 성장이 확실해지겠지만, 그에 따라 다른 지역의 쇠퇴를 우려할 수밖에 없다는 건가.”
“정책을 펼치기 나름이겠지. 낙관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카라코룸과 철도로 연결된 모든 주요 거점 도시가 함께 발전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겠지만…….”
“이를테면 동명 등의 도시는 수도에서 밀려났다는 이유로 상실감, 시민들의 반감 등이 있을 수 있다…… 혹은 카라코룸의 인구 과밀에 대비해야 한다? 도시의 계획 단계부터 제대로 대비하지 않으면 교통, 하수처리를 비롯한 공해가 심각해질 수 있다, 라.”
“정치적으로도 검토해야 할 게 많아. 행정구역 개편부터 시작해서 연방 내에서 연방 수도에 어떤 특수 지위를 부여할 것인가, 선거구는 어떻게 재편하고…… 무엇보다도 결국 우리 고려 정부가 모조리 카라코룸으로 ‘이사’를 온다면, 고려 본토와의 정치적 연결은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까지.”
견하는 서류를 덮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폐허의 가장자리까지 걸어와 있었다.
“흥미로운 보고서였어. 방향은 나쁘지 않아. 일단은 수정보다는 보강을 위주로 계속 진행해 봐도 좋을 것 같아. 추가 예산과 인력이 필요하면 황제께 아뢰어보지.”
하지만 그보다도, 라며 견하는 말을 이었다.
“네가 들고 온 게 이 「화림 계획」이 전부는 아닐 거야. 그렇지?”
재연은 그 특유의, 미소녀라고 착각할법한 미소를 그렸다.
“물론. 카라코룸은 아직 적의 수중에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