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9)
“배후라고 하신다면, 루우 테무르 말씀이시군요.”
지금 대화를 나누는 두 남자의 조카. 돌아가신 큰형님 시레문이 남긴 유일한 혈육.
이렇게만 말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불쌍한 아이 같지만, 엄연히 무서운 야망을 품고 숙부들을 위협하는 경쟁자다.
울제이와 게레센제 모두 머릿속에 소녀에서 여제가 되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린다.
말괄량이 소녀 무사 같던 루우 테무르는, 어느새 나름대로 모략을 꾸밀 줄 아는 정치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고려에서 많은 걸 배운 것 같더군요, 그 아이는.”
“지금은 고려의 외무장관을 하는 안세규도 그렇고, 루우 테무르와 함께 온 주견하라는 소년에게서도 영향을 받았겠지. 고려의 타이시 미리안도 많은 영향을 끼쳤겠고.”
루우 테무르는 안세규의 경호원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고려에 들어갔다고 들었다.
안세규는 대학생 때부터 미리안의 백부, 미승휴 정권에 반대하는 신문을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고려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했다.
그 후 정확히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몰라도 임시정부의 주석 자리까지 빠르게 올라갔다.
미리안도 갓 대학교에 입학한 나이에, 경험이 훨씬 많은 전쟁영웅을 물리치고 정권을 장악했다. 위태위태한 계집애의 천하라고만 생각했던 고려는 그녀의 통치 아래 군사적 위기와 경제적 위기를 모두 넘기며, 느리지만 확실하게 성장하고 있다.
루우 테무르를 황제의 자리에 올린 사람도 바로 미리안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견하. 권력에 취한 어린 계집이 들인 애인이라는 첫 평가와 달리, 미리안을 확실하게 보좌하며 제국의 어두운 부분에서 활약하고 있다.
루우 테무르가 칸발리크에서 카간 자리를 탐내는 동안 그 참모 역할을 한 것도 주견하다.
“이른바 ‘천재’라는 게 그런 아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겠지…….”
“루우 테무르의 대관식에서 잠깐 봤을 땐 그 정도일 거라 짐작하진 못했습니다만…… 직접 대화를 나눠보셨습니까?”
“음. 아직 이 자리에 오르기 전, 본토에 들어올 때 그자가 짐의 경호를 책임졌었다.”
장차 카간이 될 귀빈을 대한다기보다는, 거래하러 온 상인에 더 가까운 태도였다.
게레센제가 무엇을 원하고 또 무엇을 내놓을 수 있는지, 그걸 루우 테무르의 입장에서 어떻게 최대한의 이익을 보게 할지 냉철하게 살피는 눈을 하고 있었다.
“태사 미리안의 총애를 얻고 있는 건 확실하지만, 고려 황제의 애정도 누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어. 그럴 가능성 자체는 크긴 하지만…… 어쨌든 애정은 신뢰를 의미하지. 그런 자가 신뢰를 얻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아우?”
“천재가 뒤는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자기 재능을 펼칠 환경이라는 거죠.”
“맞네. 게다가 그자는 상당히 강력한 이단이기도 하지. 지난번에 칸발리크 황궁에 자객이 들이닥쳤을 때도 그자가 단신으로 격퇴했어. 지모, 무력, 일국의 국가원수와 정부수반 모두에게서 신뢰를 얻는 수완…….”
루우 테무르를 견제한다면 그보다 앞서 주견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게레센제는 그렇게 말을 끝맺었다.
울제이는 끄덕이다 말고, 아까 게레센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카간께선 ‘볼로드의 미래 구상’이라고 하셨지요. 그게 루우 테무르라면, 볼로드는 역시…… 루우 테무르와 손을 잡은 겁니까?”
“그래. 노골적으로 지지를 표명한 건 아니지만, 짐이 칸발리크에 입성하기 전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고 봐야 하네.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이 안 되는 행보를 보이고 있으니까.”
‘미래 구상’이라고 에둘러서 말하긴 했지만, 실상은 ‘미래에 누구를 카간으로 옹립할 것인가’이다.
“볼로드는 아마 짐을 징검다리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걸세. 어떻게 해야 짐을 빨리 퇴위시키고 안정적으로 루우 테무르에게 계승시킬 수 있을까…… 그것만 궁리하고 있겠지.”
“설마 그렇게까지…… 그렇다면 오히려 반역 혐의로 끌어내릴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울제이에게 볼로드가 게레센제의 편이 아닌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진정 큰 문제는 볼로드가 ‘울제이의 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게레센제를 위한다는 구실로 제거해두는 게 울제이에게도 이로울 터.
“그자가 반역의 증거를 남길 만큼 호락호락하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돌아가신 큰형님을 오래 보좌했던 자이니만큼, 만만치는 않겠죠.”
“볼로드가 명백히 짐에게 손해되는 일을 해도, 그 일 자체가 짐이 뭐라 말할 수 없는 곳에 교묘하게 자리 잡고 있네.”
이를테면 이번에 주견하에게 협력해 ‘칸발리크 테러 해결의 공로를 오로지 루우 테무르에게만 돌린 것’. 따지고 보면 카간인 자신을 능멸한 일이었지만 질책 하나 할 수가 없었다.
칸발리크 테러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는 절대로 대중에 공개할 수 없으니까.
“억지로 혐의를 뒤집어씌우려고 해도, 그 배후에 루우 테무르가 있으니 쉽지 않고.”
“루우 테무르와 볼로드, 그 둘이 지금도 공공연하게 동맹 관계를 드러내고 있습니까?”
그 동맹에 빈틈은 없는가? 루우 테무르가 야망을 포기하게 할 수는 없겠지만, 볼로드를 회유하는 것도 불가능한가? 그런 물음이었다.
“최근에도 주견하와 볼로드가 접촉해 뭔가 거래를 했네. 거래 내용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거래를 했다는 말만 사실이다. 내용은 게레센제도 이미 알고 있다. 그 거래 때문에 게레센제는 카간으로서 위신을 세우려고 여기 새너두로 온 거니까.
“그래서 카간께선 주견하를 주목하라고 하셨던 거군요?”
“볼로드와의 협상에도 나설 정도면, 확실히 루우 테무르의 대리인 행세를 하고 있는 거니까. 아니 어쩌면 미리안의 대리인으로 나선 자리일지도 모르지만…… 뭐 어쨌든 중요한 인물로 떠오르고 있는 건 사실이지.”
“그나저나…… 카간의 말씀대로 볼로드가 루우 테무르를 옹립할 계획이라면, 그건 볼로드의 독단이겠습니까?”
“무슨 뜻인가?”
“볼로드는 큰형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최측근이었죠. 큰형님의 의중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자일 겁니다. 그렇다면, 큰형님이 살아계실 때 후계자 관련해서 뭔가 말씀을 남기신 게 아니겠습니까? 볼로드는 그걸 아니까 루우 테무르를 옹립하려고 드는 거고요.”
“글쎄. 형님께서 돌아가신 지금은 알 수 없는 일이지. 짐은 볼로드만의 계획이 있어서 그러는 거라고 보네. 만약 형님의 유언 같은 게 남아 있었다면, 진즉에 꺼내 들지 않았겠나?”
시레문의 유언만큼 강력한 계승 명분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유언이란 종종 날조되기도 한다.
허나 볼로드도 루우 테무르도 그에 대해 별말이 없는 걸 보면, 애초에 시레문이 후계자에 대해 남긴 유언, 혹은 평소 생각해둔 바는 없었던 것 같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루우 테무르는 당장 카간 자리를 승계하는 걸 거부했고, 볼로드 역시 따로 계획이 있는 것 같네. 루우 테무르가 카간이 되기 전에 ‘중간 단계’로서 내가 카간이 되어야 하는 이유란…… 아마도 ‘낭키아스까지 통합한 다이온 연방의 결성’이 아닐까 싶네만.”
그렇다면 루우 테무르와 볼로드는, 게레센제를 ‘낭키아스를 끌어오는 심부름꾼’ 정도로만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울제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제가 루우 테무르와 협상에 나선 것도, 어찌보면 스스로 함정에 걸려든 걸지도 모르겠군요.”
“‘키타이까지 끌어들인 다이온 연방’을 루우 테무르나 볼로드가 노렸다면,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가 그런 저들의 속셈을 알지 못했다면 모를까, 이미 짐작하고 있는 이상 대응책을 생각해볼 수도 있을 걸세.”
“새너두로 나오신 것도 그 대응책의 일환입니까?”
“그렇지.”
“저를 내무장관 겸 전쟁장관으로 임명하신 ‘두 번째 뜻’도 그와 관련이 있고요.”
“칸은 전에 몽골 남부군과의 싸움에서 놀라운 용병술을 보여주었지. 그래서 짐은 그 용병술을, 눈앞의 내전을 평정하는 데 쓰고 싶다. 이왕 새너두로 올라온 김에 새너두-옹구차트 전선뿐만 아니라 전선의 전반적인 문제를 맡기고 싶군.”
“전선에서 벌어지는 실질적인 전투 전반은 전쟁장관이 아니라 합동참모본부의 몫 아닙니까?”
“전쟁장관이 개입한다고 해서 월권행위는 아니지. 말이 아예 안 되는 일도 아니고. 카간의 대리인으로서 관여한다고 하면 명분도 서지 않겠나?”
“키타이 서부의 반군을 진압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한데…… 알겠습니다. 형님 카간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좀 무리를 해보지요. 그럼 카간께서 저를 기용해 전선을 관리하려 하신다면, 그에 맞는 전략 목표가 있으실 겁니다만.”
지금 게레센제가 이끄는 참모진으로도 착실하게 전선을 밀어 올리고 있다. 그런 상황에 굳이 울제이를 추가 투입한다면, 게레센제에겐 뭔가 다른 목적이 있을 터.
“카라코룸에 하루라도 빨리 입성하고 싶군. 칸이 그 길을 열어주게.”
카라코룸. 현 수도인 칸발리크보다 규모는 작을지 몰라도 정치적, 역사적 의미는 결코 작지 않은 도시다.
시레문은 그 도시를 유라시아 대륙의 물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여러 기반 시설을 심혈을 기울여 구축했다.
카라코룸 탈환은 단순히 반란군이 수도로 쓰는 도시를 점령, 패망으로 몰아넣는다는 의미만 있는 게 아니다.
선대 카간이 사랑한 도시를 탈환하는 것이다. 빠른 탈환에 성공한다면 새너두까지 나아가 지휘한 게레센제와 더불어, 뛰어난 용병술을 보인 울제이의 위신도 높아질 것이다.
“고려군 쪽에서도, 태사가 주도해 대규모 개입을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있더군. 고려군이 먼저 카라코룸에 입성하면 위신에도 큰 손상을 입겠지만, 루우 테무르의 입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해질 걸세.”
게레센제 입장에서는 미리안이 펼치는 외교정책의 진의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녀의 움직임은 루우 테무르의 의사와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게레센제가 지금 그걸 알 방법은 없다.
“알겠습니다. 우리 힘으로 함락시키긴 해야겠군요. 어쩌면 한족 봉기를 수습하는 것보다 우선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말은 그렇게 하고 나왔지만, 울제이는 자기 나름의 계산을 했다.
게레센제의 뜻대로만 움직일 순 없다.
울제이 입장에서 루우 테무르는 분명 위협적인 존재이긴 하다. 그러나 울제이 혼자 게레센제를 당해낼 수 없는 만큼, 루우 테무르는 게레센제와 대결할 때에는 동맹이 되어 줄 수 있는 존재다.
이미 한 번 게레센제가 울제이를 속였기에, 울제이 역시 방심하지 않는다.
게레센제의 의향대로 루우 테무르와 볼로드를 견제하다보면, 물론 울제이 자신의 권력도 강화될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게레센제도 놀고만 있진 않겠지.
울제이가 볼로드, 루우 테무르와의 싸움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게레센제가 낭키아스 파벌을 요직에 배치하면 완전히 이용만 당하는 꼴이 된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볼 게 있다. 카간은 울제이 앞에서는 루우 테무르를 경계했지만, 루우 테무르 앞에서는 울제이를 경계하는 태도를 보이리라는 것이다.
만약 울제이가 싸움의 주도권을 장악한다면, 그때는 루우 테무르의 편을 들기 시작하겠지.
뭐 그건 나중 일이다. 울제이는 칸의 지위에 머무르며 내무장관과 전쟁장관을 겸직하기로 했다. 스스로 카간의 신하임을 인정한 셈이다.
이것으로 형제간 싸움은 일단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