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6)
안세규는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미묘하게 턱에 힘이 들어갔다. 이를 갈고 싶은 걸 참는 중이다.
칸발리크에서 돌아오는 조유관을 처리하기 위해, 암살자 몇을 보내긴 했다.
그리고 그 암살자들은 처참한 몰골로 다시 내무장관의 집무실에 배달되었다.
조유관은 안세규가 그런 수작을 부리리라 충분히 예상했고, 황제 루우는 조유관의 부탁을 받고 미리 손을 써주었다.
그리고 조유관은 귀국하자마자 주견하와 접촉했기 때문에, 이제는 감찰국…… 아니 정치경찰실까지 안세규를 주시하는 상황.
적을 위협하다 역으로 사냥감이 되어버린 세규 입장에선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다.
그런 안세규의 표정에서 어떤 만족감을 느꼈는지, 조유관은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안 장관께선 제가 옛 동지들의 이상을 배반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하셨죠. 저는 오히려 안 장관의 사상이 의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화해나 타협은 없을 것이라는 선 긋기. 서로를 죽이려 했다면 오히려 정치적 타협 여지는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서로의 이데올로기가 반역적이라 의심한다면…… 그걸로 끝이다.
누군가의 사상에 대한 의심을 들이댔다면, 그 누군가가 나를 죽이거나 내가 상대를 죽이기 전까진 싸움을 그치지 않겠다는 말.
설령 두 사람이 자연사로 생을 마치더라도, 죽음을 앞둔 극적 화해 같은 건 없을 것이다.
“역사상 수많은 혁명이 있었습니다만, 그에 비례해 혁명의 배신자도 많았죠. 안 장관, 당신이 새로운 나폴레옹이 되거나 바라트의 주석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소. 아니,”
조유관의 눈에 분노가 밀물처럼 차오른다.
“당의 옛 동지들을 그렇게 처분하고 당권을 장악한 당신이야말로 이상의 배신자요. 늙은 동지들이 당신보다 무능해서 주석 자리까지 내준 거라고 생각했다면, 이제부터라도 그 생각을 수정하시오. 당신의 능력과 열정이 기특하고 귀여워서 봐준 것인데, 당신은 그 선을 넘었지.”
안세규는 그 말을 들으며 오히려 분노를 삼켰다. 그의 눈에는 퇴물이 된 옛 당원의 발버둥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럼 어쩌시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당대회를 열고 당수 후보로 나와보시겠습니까?”
“아니, 나는 다른 방법을 쓸 거요.”
안세규는 무슨, 이라고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질문을 끝맺진 못했다. 조유관은 안세규를 싸늘하게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가 버렸다.
세규는 그 뒷모습을 보며 초조하게 주먹을 쥐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조유관은 황제 루우와 감찰국을 통해, 세규의 발을 한동안 묶어두는 데 성공했으니까.
***
고려의 외무성에서 칸발리크와 동명 사이를 바삐 움직이는 사이, 비슷하게 두 도시 사이를 움직이는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다.
감찰국 소속이자 통칭 AN, 알타이 민족 문제 연구소장 한재연이었다.
“황제를 몽골 카간위 계승에 근접시키는 작업은 이 정도로 충분히 달성됐다고 말할 수 있겠어. 다음 단계에 착수하자.”
견하는 그렇게 정리한 뒤, 재연에게 연구소에 좀 다녀오라고 했다.
잠시 착각할 수도 있었지만, 재연은 견하의 원래 목표를 다시 떠올렸다.
견하가 요 몇 달간 황제 루우를 위해 상당히 많은 일을 해온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일들이 견하의 궁극적 목표는 아니다.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이 태사 미리안의 더욱 강한 권력을 위한 도구이듯이, 루우의 카간위 접근과 칸발리크 사태 해결도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칸발리크 사태는 해결됐으니까, 이제 다시 초점을 태사로 옮기긴 해야겠지.”
재연은 견하의 말을 반복하듯 중얼거리며, 방금 올라온 서류들을 뒤적였다. AN연구소의 여러 학자들이 뽑아낸, 계획의 다음 단계를 위한 이론적 기반들이다.
이론을 들춰보는 재연의 머릿속에는 그 실행안 후보들이 오가고 있다.
“이미 견하와 한 번 다녀왔었지.”
카라코룸. 몽골 제국의 초기 수도이자, 견하가 향후 다이온 연방의 수도로 삼고자 하는 곳이다.
“다이온 연방이 성립한다면 당장은 칸발리크를 그대로 수도로 두겠지만, 적어도 우리 황제가 카간 자리에 오르실 무렵에는 카라코룸 천도를 추진해야 해.”
카라코룸은 시레문 카간이 상당한 규모의 공업 도시로 키워내긴 했지만, 아직 확실히 ‘누군가의 색깔’을 입힌 도시는 아니다.
시레문은 죽었고, 알타이 자유 공화국은 성립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으며, 그나마도 지금 사회주의 계열의 봉기로 정신이 없는 상황이다. 게레센제는 카라코룸은커녕, 칸발리크에도 겨우 적응해 가는 참이다.
따라서 여기에 ‘미리안의 색’을 칠한다는 구상 자체는 나쁘지 않다. 문제는 지금 카라코룸은 적대적인 세력의 손에 있다는 것.
“그러니 게레센제 카간이 말했듯 빠른 카라코룸 공략이 필요하지만…….”
무슨 수로 알타이 자유 공화국을 단숨에 쓰러뜨릴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군사적인 문제야 어떻게든 해결된다 쳐도, 반란군을 무너뜨리는 동안 게레센제 카간의 영향력이 증대되지는 않을까?
선수를 빼앗겨 카라코룸이 게레센제의 색으로 칠해진다면, 견하와 그의 계획에는 차질이 생긴다.
“반란군이 제압되는 동안, 여기에 태사 각하를 개입시킬 방법은 없을까?”
그런 고민을 하며 며칠을 보내는 사이, 이제 외무장관이 된 조유관이 AN연구소를 방문했다.
조유관은 감찰국장 주견하에게 신변 보호를 받고, 또 주견하는 이번 칸발리크 테러 진압에 조유관의 신세를 졌다. 그만큼 둘은 상당히 끈끈한 동맹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 동맹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조유관은 이렇게 주견하의 측근, 한재연을 찾아온 것이다.
“국무회의에서 황제 폐하께 귀국을 상주하기로 결정이 났네. 대신 칸발리크에는 태사 각하께서 직접 가시고. 나는 그에 앞서 몇 가지 사전 작업을 명 받았지.”
얼굴은 웃으며 외무장관을 접대하고 있었지만, 그 순간 재연의 머릿속에는 ‘이거다’라는 한 줄기 외침이 지나갔다.
-황제가 귀국하면 배영훈 중령의 기갑사 부대나 다른 칸발리크 주둔 고려군의 행동도 자유로워진다.
-칸발리크에 태사가 직접 가면 견하와 이야기를 나누겠지.
-그 전에 나는 견하에게 ‘태사가 알타이 자유 공화국 제압작전을 진두지휘한다’는 안을 내밀자.
‘군 계급을 초월한 존재’여서 민간인인 황제와 달리, 미리안은 ‘대원수’ 계급장을 단 군인이다. 그리고 동명특별시 방어전이나 심양시 확보전, 허동주의 대공세 방어전 등에서 상당한 지휘 능력을 이미 입증했다.
그녀가 직접 카라코룸 공략을 지휘해도 이상할 건 없다.
게다가 조유관의 말을 들어보자니, 미리안은 이번 내전 개입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려 한단다. 그렇게 해서 다이온 연방을 국가 간 느슨한 협력기구 정도로 머물게 할 생각인 듯한데…….
어떻게든 고려의 주도로 카라코룸을 확보해야 하는 견하의 「계획」과, 고려가 팽창주의로 기우는 것을 막으려는 리안의 「계획」이 여기서 공통점을 보였다.
-이용할 수 있다!
조유관을 보내고 집무실로 돌아온 재연은 서둘러 서류들을 가방에 끌어모았다. 틈나는 대로 펜을 휘둘러 아이디어들을 메모한다. 마구 갈겨 쓴 그 생각의 파편들은 열차에서 정리할 것이다.
칸발리크로 돌아간다. 쉴 틈은 없었다. 속도전이니까.
***
주견하가 혁세주와 파멸인의 흔적을 바삐 지우고, 한재연과 미리안이 칸발리크를 향해 바삐 움직이며, 루우도 칸발리크 정계와 숨 가쁜 줄다리기를 한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효윤 역시 칸발리크 테러의 뒤처리에 바빴다.
“생각했던 것보단 잘 타는군요.”
옆으로 다가온 태주갑 중령이 그런 감상을 입에 담는다.
효윤은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눈앞의 거대한 모닥불만 바라봤다.
검은 연기가 하늘로 올라간다. 대낮의 하늘은 언제 그렇게 검었냐는 듯이 높고 맑았다.
지금 공터 한곳에 모아두고 태우는 것들은 조각난 파멸인들의 시체였다.
사태가 해결되고 나서 냉동 보관 중이던 사체들은 벌써 태워버렸다.
여기 말고도 도시 주변 곳곳에서 그 ‘붉은 존재’를 물리치는 데 사용된 파멸인, 혹은 파멸인이 되다 만 것들, 파멸인에게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모아다 태우는 중이다.
효윤의 앞에 있는 불길은 그것들만 태우는 게 아니지만.
“저항이 생각보다 심하네요.”
“신앙이 육체를 초월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죠. 장군님 칼에 베이면 오히려 한 차원 높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기뻐하는 것 같았습니다.”
태주갑은 씁쓸하게 자신이 느낀 바를 이야기했고, 효윤은 혀를 찼다.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테러에 실컷 이용만 당한 혁세주교인들은, 그들의 신과 교주, 교리마저 잃고 그저 막연한 사후 세계를 희망하며 달려들 뿐이다.
“……애초에 ‘없는’ 영혼을 얻고자 했던 종교였을 텐데. 순교한다고 저쪽 세상으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효윤의 말은 진실이었지만, 그녀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아무리 진실이라도 사람들 사이에 공공연히 퍼지면 곤란한 이야기니까.
어쨌든 소각 작업은 ‘만에 하나’까지 생각하며 이루어졌다.
파멸인이 토막 난 시체에서 부활 혹은 재생했다거나, 되다 만 시체가 갑자기 파멸인으로 완성되었다는 식의 보고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까지 상상하면서 최대한 안전한 방법으로 시체들을 제거했다.
물론 여기에는 정치적인 계산도 깔려 있었다.
시체가 남으면 그건 ‘순교자의 흔적’이 될 테고, 그걸 어딘가에 무더기로 매장하면 ‘순교자의 무덤’이 된다.
그런 상징물이 남으면 이 혁세주교가 다시 세력을 얻을 불씨가 될 수 있다.
“그나마 모두가 착실하게 도시 정상화에 힘쓰는 건 위로가 됩니다.”
태주갑의 말에 효윤은 끄덕였다.
“파멸인이 새로 더 생기지 않는 것도요.”
칸발리크의 모두가 그동안 파멸인과의 전투에 익숙해졌기에, 도시의 아주 어둡고 깊숙한 곳에서 발견되는 파멸인을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미 활동을 멈춘 파멸인의 시체는 말할 것도 없고, 드물게 아직도 활동 중이긴 하지만 ‘쇠약해진’ 개체들도 손쉽게 처리한다.
수색과 제거 작업은 성실하게 이루어졌다. 확실하게 ‘정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도시 내 구역은 날로 넓어지는 중이다.
하지만…… 회복의 희망적인 향기와는 별개로, 입맛이 쓴 광경도 펼쳐지고 있다.
“히으에에에에엑-!”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 같다. 딱 그런 느낌이 드는 비명을 지르며 누군가 끌려 나온다.
“너는 사악한 종교를 믿고 수많은 시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선고와 같은 말이었지만 재판도 뭣도 아니었다. 이번 사태를 야기한 무리는 전부 죽이라는 칙령. 그리고 그 칙령은 쿠릴타이에 의해 한 번 더 승인된다.
병사는 끌려온 혁세주교인의 목을, 칼로 단숨에 끊었다.
총알을 쓰기보다는 칼로 신체를 끊어서 혹시나 부활할 여지를 없애라는 방침 때문이었다.
굴러떨어진 얼굴.
그 얼굴을 뒤덮은 눈물은 후회일까 미움일까 고통일까.
“테러로 죽은 사람, 이렇게 도시 수복 과정에서 처형된 사람, 모두 합치면 얼마나 될까요.”
“……그건…….”
태주갑은 효윤의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게레센제와 볼로드의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조사 결과에 나온 숫자에서 멈추지도 않을 것이다.
그 숫자는 장작이 되어, 반란군에 대한 증오의 불길을 더욱 거세게 지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