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3)
한번 틈을 벌린 의심의 아가리는 도통 다물어지질 않는다.
-카간께선 어쩌면 낭키아스를 통합되지 않은 채로 남겨두실 생각이 아닐까?
카간의 의중이 그러하다면, ‘대체 왜?’라는 질문이 뒤를 잇는다.
아직 낭키아스를 통합할 뜻이 없다면, 그 뜻이 나중에는 바뀌리라는 보장은 있는가?
-애초에 게레센제 카간은 낭키아스의 통합의지가 없는 것 아닌가?
낭키아스를 총독이 다스리는 식민지 내지는 군정 치하에 비유할 수 있는 건, 낭키아스라는 나라의 특수성 때문이다.
이 나라는 시레문이 게레센제를 칸으로 봉하여 맡긴 땅.
즉, 낭키아스는 몽골의 전리품이자, 게레센제에게 내려진 ‘개인 영지’라는 말이다.
낭키아스의 특수성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이는 화두로 떠오른 ‘다이온’의 구상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사람들은 ‘다이온’이라는 이름에서 ‘통합된 제국’을 떠올렸다. 강대한 카간이 동쪽으로는 일본에서 서쪽으로는 페르시아와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군림하던 역사를 연상하기 때문이다.
제국의 행정이 한족의 영역 구석구석까지 미치는, ‘보편 제국’을 꿈꾼다. 다이온의 카간은 마땅히 보편 제국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들 무의식중에 그런 결론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게레센제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르다.
-카간은 낭키아스를 여전히 ‘카간 개인의 영지’로 남겨두고 싶으신 걸까?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정부에서 거두는 세금과는 다른, 자신만의 자금 출처를 만들고 싶다든가.
군대를 비롯한 각종 자원도 칸발리크 행정부와는 별개로 카간만의 것을 마련해 놓고 싶을 수 있고.
카간이 정부 계통 바깥에 자신만의 체제를 따로 마련해 놓는 것은, 물론 비판의 여지는 있다.
정부의 행정이 미치지 않는 ‘성역’을 만들어 국내 정치에 혼란을 준다거나 하는 이유로 말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건 카간의 그런 행동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다.
사람들의 눈길이 제국의 재상, 타이시 볼로드에게로 향한다.
-볼로드 행정부와 협력이 제대로 안 되는 건가.
누구나 알다시피 볼로드는 선대 카간 시레문의 심복이다. 그의 최측근이자, 뜻을 실행으로 옮기는 자였다.
시레문이 죽은 지금, 그 ‘정책의 계승자’는 볼로드라 할 수 있다. 시레문의 깊은 뜻과 비밀스러운 의도를 모두 듣고 기억하는 사람은 볼로드 뿐일 테니까.
그런 남자가 야망을 품으면, 새로운 카간 입장에서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볼로드가 엉뚱하게 스스로 카간이 될 욕심을 품진 않았을 테고.
볼로드도 귀족이니 핏줄을 따지고 보면 보르지긴 가문과 이어져 있기야 할 테지만, 방계 중에서도 방계일 그의 혈통으로 카간은 어림도 없다.
티무르가 훌레구 울루스의 칸이 된 이래 칸 자리를 향한 문은 활짝 열렸다고들 하지만, 모든 몽골인의 신성한 고향, 세상의 중심을 다스리는 카간만큼은 ‘보르지긴’이 아니면 안 된다.
힘이 모든 것을 증명한다던 중세 시기에도, 명나라에 남방 영토 대부분을 잃고 수세에 몰린 혼란기에도 이 원칙은 깨지지 않았다.
즉 볼로드가 카간 자리를 노릴 가능성은 없다. 그보다는 입헌군주제 아래, 강력한 행정부의 수장으로서 황권을 견제할 가능성이 더 크다.
좋게 말하자면 좀 더 서구적인 입헌군주제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게레센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겠다는 말.
사람들은 볼로드가 실제로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과는 상관없이, 그를 그렇게 판단했다.
어쨌든 거기서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얼마 되지 않는다.
-게레센제 카간은 볼로드 타이시의 확고한 충성을 받아내지 못했다.
-따라서 게레센제 카간의 칸발리크 행정부 장악력은 그리 크지 않다.
-이는 게레젠제 자신의 ‘카간 자리’ 그 자체도 확고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낭키아스를 본국에 통합, ‘균일한’ 행정이 그 땅에도 자리 잡으면 그곳의 통제권 역시 타이시 볼로드에게 돌아간다.
그러니까 게레센제는 낭키아스를 자신의 개인 영지, ‘보험’으로 남겨두고 싶어 하는 것이다.
-혹시 카간은 당신께서 카간 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고 염려하는 것은 아닐까.
누구에게? 아까도 이야기했듯 볼로드는 아니다.
그렇지만 볼로드의 ‘지지를 받는’ 누군가일 수는 있다.
-역시 루우 테무르인가.
칸발리크를 향해 거친 공격을 감행했던 울제이를, 볼로드가 옹립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물론 감정 문제야 접어두고 자신들의 권력이나 국가 전망에 따라 손을 잡을 수는 있지만…….
현 상황에서 볼로드와 가장 충돌할 가능성이 적은 카간 후보는, 루우 테무르라고 봐야겠지.
루우 테무르는 지금 고려의 황제다. 고려는 한 번 황실 자체가 없어졌다가 다시 세워졌기 때문인지, 황제의 권력은 비교적 강하지 않다.
또한 현 태사 미리안은 내전의 승리자다. 루우 테무르를 황제로 세운 장본인이기도 하며, 선거를 통한 집권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보강한다. 따라서 그녀의 권세는 황제라 해도 함부로 할 수 없다.
-고려는 그야말로 ‘군림하되 통치하진 않는다’는 입헌군주제를 이상적인 형태로 체현한 나라다.
만약 볼로드가 게레센제를 폐하고 루우 테무르를 옹립하기로 한다면?
볼로드에겐 좋은 기회다. 그 역시 이번 내전을 제압하고 승자가 된 후, 루우 테무르를 몽골의 카간으로 세우면 미리안의 행보를 그대로 밟는 셈이다.
루우 테무르가 몽골의 통치를 태사(타이시) 볼로드에게 ‘위임’하는 정치체제, 볼로드의 내각을 중심으로 한 입헌군주제가 가능해진다.
볼로드의 입장에서 루우 테무르는 매력적인 대안이 아닐 수 없다.
게레센제와 볼로드가 이처럼 카간 자리, 몽골의 주도권을 두고 대립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특히 게레센제를 따라 낭키아스의 수도 응천을 떠나 칸발리크로 들어온 참모와 관료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낭키아스에서 해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게레센제 카간께 계속 충성을 바쳐야 할까?
충성을 바치기로 결정한다면, 게레센제의 열두 살 난 아들 바이다르를 통해 이어지는, 새로운 왕조의 건립에 헌신해야 한다.
오늘 이렇게 칸발리크로 오기 전에는, 낭키아스의 칸 자리가 당연히 바이다르에게 계승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듯이. 카간 자리는 마땅히 바이다르에게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혹은 지금 카간의 우유부단함이면 그 미래는 안 봐도 뻔하다고, 침몰하는 배와 다를 바 없다고 판단하여 떠나야 할 것인가? 울제이나 루우 테무르라는 새로운 배를 택할 텐가?
요 몇 달간, 게레센제의 행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줬다.
칸발리크의 기존 관료층을 끌어안지도 못했고, 낭키아스의 관료들을 안심시키지도 못했으며, 국민들은 여전히 계속 불안해하고. 내전은 종식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이젠 학자다운 풍모마저 우유부단하고 유약하게 비치기 시작했다.
겨우 하나 해결된 게 ‘칸발리크 테러’. 그러나 그마저도 고려 황제 루우 테무르의 활약 덕분이었다고 한다. 이번 사태에서 게레센제는 직접 이뤄낸 게 없다.
물론 그런 인식은 주견하가 재빠르게 볼로드와 접촉, 방송과 신문을 통해 ‘조작된 소문’을 뿌려댄 탓이지만.
게레센제는 국가 기밀인 ‘혁세주와 파멸인류의 비밀’ 따위를 공개적으로 떠들 수 없다. 따라서 이번 사태 해결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는 변명도 하기 어렵다.
아니, 적당히 각색된 정보가 발표되기는 했다. 하지만 주견하는 이 부분도 의도적으로, ‘마치 루우 테무르가 해결한 일에 게레센제가 엉뚱하게 숟가락을 얹으려는 듯’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공식적인 언론을 통하진 않았지만…… 세간에 소문을 흩뿌린다.
몽골이 위기에 처했는데도, 게레센제는 조카와 조정을 협박해 억지로 카간 자리를 뜯어냈다는 듯한 소문을.
교묘한 조작과 선동.
칸발리크 테러가 마무리되자마자, 주견하는 다음 단계를 향해 숨쉴 틈도 없이 게레센제를 몰아붙이는 중이다.
주견하와 감찰국, 그리고 몽골의 태사부가 벌이는 합동 공작.
이는 모든 신하들의 마음이 점차 게레센제와 거리를 벌리게끔 하고 있었다.
***
뜨문뜨문 논의가 이어지는 쿠릴타이. 그 현장을 바라보는 게레센제의 눈이 가늘어진다.
-짐이 그대들의 불신을 모를 것 같은가.
이 정도 고난은 이미 예상했다. 정점에 선 자는, 그 순간부터 모든 이의 적이 된다.
-애초에 맹목적 충성은 바라지도 않았다.
아우 울제이처럼 게레센제도 ‘군주는 충성할만한 가치가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믿음을 품고 있다. 그런 점에서 형제는 아주 많이 닮았다.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면서 유능하기까지 한 인간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인재가 곁에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군주는 축복받은 사람이다.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자리를 원한다. 그럴 가망이 없는 자리에는 나서지 않는 법이다.
개중에는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자도 있지만, 그거야 군주가 알아서 걸러내야 할 일이다.
어쨌든 군주가 충성할만한 가치를 입증하면 사람은 모여들기 마련이고, 그중에는 유능한 자가 있다.
공직에 오르려는 자가 일정한 시험을 거쳐야 하듯, 군주 역시 시험을 받을 때가 있다.
맹자가 군주의 자격이 없음에도 그 자리에 앉은 자를 필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카간으로서 충분히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게레센제는 알타이 자유 공화국, 그 반란군 무리를 진압하는 데 사활을 걸었다. 내전을 평정하면서 지도력을 입증하고, 신하들의 충성을 다시금 끌어모을 생각이다.
-허나 지금처럼은 안 된다.
이대로 내전을 진압하면 자신의 지도력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고려군이 활약할 기회만 더 늘려주게 된다. 고려군의 도움을 받되, 결정적인 승리만큼은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
이를테면 반란군의 수도, 카라코룸만큼은 자신의 지휘하에 함락시킨다든가.
그러려면 게레센제가 부릴 수 있는 또 다른 전력이 필요하다. 그걸 어디서 찾아내야 할까.
-다시, 울제이인가.
대립, 동맹, 다시 대립과 동맹을 반복하는 형과 아우. 시시각각 변해가는 정세 속에서 유불리에 따라 손을 잡거나 끊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배신은 신용을 소모하고, 소모된 신용만큼 새로 맺는 동맹은 큰 대가를 요구한다.
게다가 위험성도 현저히 높아진다. 울제이는 카간을 향한 야망을 더는 감추지 않을 테고, 끝없이 게레센제의 빈틈을 노리겠지.
-그 세력과 능력을 이용은 하되, 어디까지나 루우 테무르를 견제하는 말로 써야 한다.
-만에 하나라도, 울제이와 루우 테무르가 손을 잡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
어려운 과제다. 얼마 전 이루어진 키타이와의 협정도, 루우 테무르와 울제이가 접촉한 결과라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면, 내가 먼저 선수를 친다.”
게레센제는 자기 귀에만 들리는 속삭임을 입 안으로 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