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2)
낭키아스에 남아 있던 게레센제의 참모와 관료들이 칸발리크로 들어왔다. 도시가 정상이 되고서야 비로소 불러들일 수 있었다.
한파에 모두들 두꺼운 코트를 걸쳤다. 그들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황궁으로 속속 들어왔다.
황궁의 외관은 원래 익숙하다. 그러나 그 황궁에 ‘카간의 관리’로 입궁하게 되자 새삼 낯설게 느껴진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1930년. 그들은 이 한 해를 제대로 끝맺으러 이곳에 왔다.
1931년이 오기 전에 몇 가지 일들을 마무리해 놓아야, 내년에는 또 다른 일들을 무난하게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가장 치열한 쟁점은 뭐니 뭐니 해도 ‘다이온 연방’ 문제죠.”
낭키아스 관료 하나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코트를 벗어 보좌관에게 넘긴다. 다른 관료는 황궁 내부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그 말을 받았다.
“잊혀버린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다이온’.”
“정식으로 ‘다이온’이라는 국호를 포기한 적은 없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죠. 하지만 ‘이제부터 쓰지 말자’고 해서 사어가 된 사어는 없습니다.”
쿠빌라이 카간이 만든 국호 다이온(大元).
본래는 한족들에게 익숙한 방식의 국호로 만든 것이지만, 카간 자리를 둘러싼 내전이 끝난 후에는 세계 제국 ‘예케 몽골 울루스’를 일컫는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그렇다. ‘다이온’은 단순히 중세, 근세 시절에 잠깐 쓰던 몽골의 별명이 아니다.
세계를 지배했던 시절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그랬던 ‘다이온’은 한족의 반란으로 중원 영토를 잃고,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일대도 각기 떨어져 나가면서 서서히 쓰이지 않게 되었다.
새삼 그 이름을 되살린다는 건, 다소 황당하게 느껴지면서도 가슴 두근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이름처럼 지금 몽골은 키타이, 낭키아스와 하나가 되려고 하니까.
“하지만 ‘다이온’이라는 이름의 낭만적 정서에만 귀 기울여선 안 될 것이오.”
다른 관료가 두 사람 뒤에서 그렇게 핀잔을 주듯 말한다. 묵직한 목소리에 일단 그들은 동의를 표했다.
“하긴 ‘다이온’이라는 국호를 부활시키자는 이야기만 나온 게 아니죠.”
“그 뒤에 ‘연방’이라는 말이 붙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연방. 그대로 풀이하자면 ‘연합한 나라들’이라는 뜻이다.
말 자체는 참 좋은 뜻이다. 나라들이 서로 다투지 않고 하나로 연합하면, 자연스레 그 나라들 사이의 평화는 지켜질 테니까.
하지만 세상일이란 겉으로 드러난 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다.
“어떤 식으로 연방을 구성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구성국들이 모두 동등한 권리를 가진 연방이 될 것인가, 아니면 하나의 지도적 국가를 중심으로 뭉친 연방이 될 것인가.
이는 연방 각 구성국의 군사권이나 외교권과 관계된다.
연방은 경제적, 군사적 이익을 얻는다는 목적만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다음 단계, 즉 완전히 균일한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는 중간단계일 뿐인가?
“카간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들어보기 전에는 속단할 수 없소이다.”
일단은 이런저런 가능성이 있다는 수준에서만 생각해두고, 실제로 카간이나 칸발리크 행정부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봐야 한다.
그래야 본격적인 대책을 짜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이야기가 돌더군요.”
한 관료가 갑자기 목소리를 확 낮춘다. 다들 그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인다.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이라던가 하는 게 고려 쪽에서 먼저 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음.”
눈을 크게 뜨는 사람도 있고, 대충 뭔가 알고 있다는 듯 입을 다무는 사람도 있다.
지닌 정보가 제각각일 수도 있고, 다 아는데 대처 방식이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누군가는 대화를 이어간다.
“고려 쪽에서 나왔다면, 애초에 이 ‘다이온 연방’이라는 아이디어 자체가 고려의 의향이라는……?”
“그럴 수도 있고, 고려의 누군가가 카간께 은근히 권했을 수도 있죠. 카간께서 좋은 아이디어라 채택하셨다면, 고려에서 나온 거라도 이용할 만하다는 계산이 서신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고려’에서 나왔다는 건 보통 의미가 아니오. 고려에는 ‘그분’이 계시지 않소.”
고려의 황제. 선대 카간 시레문의 외동딸. 게레센제나 울제이 못지않게 카간 계승에 가까이 있는 자.
보르지긴 루우 테무르.
“고려의 황제께선 쿠릴타이에서 ‘카간과 몽골의 보호자’를 자처하셨지 않습니까.”
“오로지 선의만으로 그렇게 자처하셨다면야 참 좋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루우 테무르의 고려가 다이온 연방을 구실로 나머지 세 나라를 합병하려 들’ 가능성을 함께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리고 그 생각을 애써 목구멍 안쪽으로 삼켰다.
“어허.”
나이 많은 관료 하나가 나무라는 듯한 말로 대화를 중단시켰다.
그들 앞에는 칸발리크의 기존 관료들이 서 있었다. 속이야 어쨌든 우호적인 얼굴로, 한 식구가 될 정치가들을 맞이한다.
칸발리크 관료들의 대표인 타이시 볼로드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볼로드는 능숙하게 그들이 지금껏 낭키아스에서 기울인 노고와, 칸발리크까지 오는 여정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며 궁 안쪽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야가 닿지 않는 위층 어딘가.
루우의 시선이 낭키아스 관료들을 빠르지만 면밀하게 훑었다.
***
“‘다이온’에 관한 논의는 잠시 미루도록 하지. 당장 해결해야 할 일들부터 살펴보도록 한다.”
카간 게레젠제는 사람들이 모이자마자 그렇게 잘라 말했다.
‘다이온’을 향해 곤두섰던 사람들의 신경이 진정된다.
낭키아스의 관료들까지 아우를 수 있는 적당한 이름이 없었기에, 이 회의 역시 ‘쿠릴타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전통적인 쿠릴타이와도 다르고, 의회 기능을 하는 쿠릴타이와도 다르다.
비상시국. 그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관련된 사람들을 모조리 끌어모은 대규모 임시회의.
“짐의 뜻은 이러하다. 먼저 카라코룸을 점거하고 있는 저 반역자 집단을 제압한다. 그리하여 몽골 본토를 정상화할 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시레문 카간의 원수를 갚는다. 다른 모든 일보다 이것을 우선할 것이다.”
칸발리크에 저지른 끔찍한 만행은 저 ‘알타이 자유 공화국’의 소행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몽골 제국 정부는 신문이며 영화며 온갖 수단을 이용해 자신들이 장악한 지역에서 선전할 뿐만 아니라, 반란군을 향한 심리전에도 나서고 있다.
카라코룸의 반란 정부가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몽골 제국 정부가 장악한 지역에서는 입대 지원자가 날로 늘어만 가는 상황.
게레센제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층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당장 필요한 전력은 충분히 확보됐지.”
무기나 각종 보급 물자는 일단 비축된 것들을 최대한 풀었고, 고려에서도 지원받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제 반군 제압에 시간과 희생이 얼마나 드느냐가 문제다.”
일단 첫 단계는 그건가.
회의 참석자들의 생각은 자연스레 다음 단계로 옮겨간다.
“폐하, 그렇다면 지금 키타이와 낭키아스에서 일어나는 한족 반란의 진압은, 몽골 본토를 안정시킨 이후가 되는 겁니까?”
“한족 반란은 지금과 같이 대처하도록 하겠소. 본토 안정에 투입되는 자원이 만만치 않으니 당장은 반란이 더 확산되는 것만 막는 선에서 대처합시다.”
울제이와의 협상이 제대로 마무리 된다면 회수에서 대치하고 있는 병력 대부분을 한족 반란 진압에 투입할 수 있을 것이다.
한족의 반란이 아무리 거세다고 해도, 그런 봉기군 대부분이 그러하듯 중화기나 항공기, 기갑 전력에 저항할 순 없겠지.
“거기에 더해 이미 고려의 추가 지원군이 낭키아스를 향해 출발했다 하니, 한족 반군과의 교착 상태는 오래가진 않을 것이다.”
희소식이라면 희소식이긴 했지만, 자꾸만 외세에 의존하려 든다는 인상을 지우긴 어려웠다.
게레센제도 이 점을 인지는 하고 있을 터. 하지만 사방에서 터지는 문제에 비해, 그의 손아귀에 있는 가용 자원이 너무 적었다.
그러니 막연히 언젠가는 갚으리라 다짐하며 빚을 늘려가는 사람처럼, 언젠가는 고려의 영향력을 벗어던지길 바라며 손을 벌릴 수밖에.
루우가 게레센제, 울제이와의 투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게레젠제 역시 언젠가는 루우, 그녀 뒤에 있는 고려와 투쟁해야 한다.
치열한 권력 쟁탈전이라는 예정된 미래. 그 모습을 그려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다이온’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미루겠다고 했지만……”
다시 들려온 그 이름이 모두의 귀를 사로잡는다.
“예비 단계 정도는 지금 이야기할 수 있겠지.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대로, 쿠릴타이의 의석수를 확대한다.”
낭키아스에 있던 게레센제의 기존 참모와 관료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는 일. 지난 몇 달간 격한 논쟁이 오간 끝에 겨우 결론이 났다.
이는 몽골 본토에 낭키아스를 편입하는 첫 단계라고도 할 수 있다.
이번 내전과 칸발리크 테러를 거치면서 빈자리도 생겼고, 각종 행정기구도 확대했기에 일단 그 자리에 채워 넣는다.
그렇지만 여전히 자리는 부족하다.
행정부에서의 자리가 부족하다면, ‘임시’라는 이름을 달고 입법부를 확대해 자리를 마련한다.
쿠릴타이는 투표로 선출되는 다른 나라의 입법부와 달리, 여전히 ‘귀족원’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에 카간이 의원을 임명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낭키아스를 몽골 본토에 완전히 편입하려나 보다, 다들 그렇게 짐작했지만…….
“허나 낭키아스의 서부와 남부에서 일어난 한족 반란이 진압되지 않은 상황에서, 낭키아스의 행정을 섣불리 개편하면 혼란만 일으킬 위험이 있다. 따라서 낭키아스의 특수한 행정은 지금과 같이 유지한다.”
낭키아스 출신들은, 새로 칸발리크에서 얻은 직책과 기존 업무를 겸한다.
게레센제가 내세운 이유는 타당하다. 그러나 성인(聖人)의 명백한 가르침이라 해도 해석이 뒤따르지 않을 순 없는 법.
사람들은 게레센제의 말 너머, 의도 너머의 의도를 읽으려 한다.
-당장은 낭키아스를 몽골 본토에 완전히 통합시키지 않겠다는 말인가……?
만약 몽골 본토와 낭키아스가 완전히 하나로 통합된다면, 낭키아스라는 이름은 ‘지리적인 구분’으로만 남게 된다.
낭키아스는 총독부 내지는 군정에 준하는 특수한 행정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를 철폐하고 균일한 국가를 만드는 것이다.
낭키아스 전 지역에 걸쳐 몽골 본토와 같은 지방 행정 기구,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료 기구 등 ‘일관된’ 체계를 잡아야 한다.
게레센제 카간은 한동안은 그러지 않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그 말 한마디가, 게레센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한 조각 ‘의심’을 심는다.
게레센제는 아직 ‘다이온’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