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1)
수용소를 뒤덮은 공간의 일그러짐과 검은 장막이 사라지자마자, 견하는 눈을 떴다.
이대로 누워있으면 리안이 손을 잡아주거나, 걱정하는 효윤과 눈을 마주하거나, 루우의 한숨을 듣게 되리라고 생각하다…… 문득 지금 어떤 상황인지 떠올렸다.
눈을 돌리자 지나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척 따스한 시선이다.
견하는 약간 낯선 느낌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최측근에게 보고를 받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유지나 역시 견하더러 ‘더 누워 있으라’는 둥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견하에게 필요한 배려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일은 잘 해결됐어?”
“네, 선배. 방금 칸발리크에서 소식이 내려왔어요. 하늘의 붉은 존재도 없어지고, 빛깔도 원래대로 돌아왔다고.”
“수용소의 생존자는?”
일이 잘 처리됐다면 간이 수용소로 보낸 인간은 전부 죽었을 것이다.
“전부 죽거나 괴물이 되거나 한 것 같아요. 확인하려고 접근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떤 질긴 목숨이 남아서 벌벌 떨고 있을지 몰라. 그런 사람이 단 하나라도 나와서 ‘실은 이러했다’고 말하는 사태는 있어선 안 돼.”
주견하의 눈이 날카롭게 빛난다.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지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포격은 준비됐나?”
“네. 말씀하셨던 대로.”
“실행해.”
견하는 명료하게 말했고, 지나는 지체없이 방 밖으로 나갔다. 이익서를 비롯한 감찰국 주요 직원들, 그리고 협력해줄 군인들에게 연락을 넣는 모양이었다.
그 사이 견하는 생각을 정리한다.
수용소를 없애고 거기 있던 각종 흉악범이나 사상범들을 처리하는 건, 물론 비밀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아무리 세상을 구하기 위한 일이었다고 해도 비난이 따를 것이다.
이건 전투로 낸 성과가 아니라, 추잡한 궁여지책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비난은 실행자인 주견하나 감찰국만 겨냥하지 않을 것이다. 태사 미리안, 고려 제3제국의 시스템 자체에 가차 없이 쏟아지겠지.
선거며 다당제 민주주의며 각종 개혁을 도입하는가 싶더니, 역시 너희 고려인들은 그럴 줄 알았다면서.
위신만 손상되는 게 아니다. 위신 손상은 국력의 저평가로 이어진다. 이는 외교에서 불리한 위치에 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 밖에도 무역이나 각종 경제적 문제에서도 타격을 입을 수 있고.
그런데 비밀로 해둬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이번에 확인한 파멸인-붉은 존재의 ‘군사적 유용성’.
만약 진상조사를 한답시고 로마 제국이며, 신성 제국이며, 브리튼이며 조사단을 파견해 들쑤셔대기 시작하면, 그 자체로 고려, 더 나아가 다이온의 안보에는 큰 위협이 된다.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 한 것처럼, 누군가 경쟁국가의 수도 상공에 저런 만행을 저지르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그렇게 되면 온 세상이 혼돈의 도가니가 된다.
파멸인들이 그렇게 자기네 세상을 말아먹었듯이, 우리도 우리의 세상을 스스로 망가뜨리고 말 것이다.
또 하나는…….
그때 지나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견하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옷걸이에 걸려 있던 제복 상의를 걸치고, 단추를 잠근다.
“어디 가시게요?”
오늘 처음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견하의 건강을 염려하는 물음을 던진다.
견하는 당연히 가야 한다는 어조로 답했다.
“볼로드 타이시에게. 급히 해결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알겠어요. 저도 같이 가죠.”
쉬라느니 어쩌라느니 하는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견하도 여기에 남으라거나 하는 쓸데없는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마무리는 이익서나 한재연한테 맡겨둔 건가?”
“예.”
“둘이 알아서 잘하겠지만, 다시 한번 다짐 정도는 해 둬. 잿더미 말고는 그 어떤 것도 남아선 안 된다고.”
끄덕이는 지나보다 앞장서 방 밖으로 나온다.
군에서 지원해 준 차에 올라, 칸발리크로 향한다. 이 역시 조유관의 옛 참모들이 해 준 배려다.
“조유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는데. 엉뚱한 곳에서 운이 좋았어.”
“적의 적은 친구라잖아요. 그 사람이 안세규와 대립하면, 우리와 손잡을 여지도 있는 거죠. 조유관이 안세규에게 반기를 들 줄은 몰랐지만.”
새로 외무성 장관으로 임명되어 동명으로 돌아온 조유관은, 곧바로 정치경찰실로 향했다. 거기서 실장 나제홍, 감찰국장 주견하를 만났다.
황제 루우가 ‘그를 보호하라’는 뜻을 흘렸다는 것. 그거면 충분했다.
나제홍도 자기 옛 부하들 중 몇을 경호로 내놓았고, 견하도 감찰국 직원 중 전역자 몇 명을 경호로 내보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조유관은 주견하가 몽골에서 자기 부하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차가 칸발리크로 접근한다. 어딘가 퇴락한듯 보이지만, 전에 비하면 훨씬 건강한 풍경이다.
그 광경을 보며 지나는 질문했다.
“그런데 볼로드 타이시는 왜……?”
“이번 일은 그냥 ‘해결했다, 만세’로 끝나선 안 돼. 정치적으로 활용해야지.”
지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견하가 의식을 잃은 사이 과중한 업무를 맡은 탓일까. 오늘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듯했다.
“칸발리크 사태는 ‘우리가 해결한 게 아니야’. 이건 우리의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서, 놀라운 능력과 헌신으로 해결하신 거야. 알아듣겠어?”
“아.”
“게레센제가 선수를 치기 전에 볼로드를 만나야 해. 그리고 신문이고 라디오고 영화고 간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매체를 동원해서 우리 황제의 공을 널리 선전해야지.”
그래서 오늘 일은 완전히 비밀이어야 하는 거다, 라고 견하는 덧붙였다.
만약 게레센제가 먼저 나서서 이게 다 내 공이다고 떠들기 시작하면 암살도 불사할 생각이었다. 그런 괘씸한 짓은 용납할 수 없다.
“폐하께서 신환도역 전투에서 활약하신 후에, 신문이나 라디오에서 열심히 칭송한 것처럼 말이죠?”
“그래. 그게 지금 국민들이 폐하를 사랑하는 원동력이라는 걸 잊으면 안 돼.”
황제는 국민의 손이 닿지 않는 고고한 자이지만, 동시에 자애롭고 헌신적인 ‘민중의 벗’이어야 한다. 특히 몽골인들 위에 군림하려면, 칸발리크의 구원자이자 고려군을 이끌고 내란을 평정했다는 이미지로 민심을 장악할 필요가 있다.
차가 지저분한 거리를 지나 칸발리크 황궁 앞으로 접근한다.
견하는 옷차림을 한번 더 점검하면서, 볼로드와 황제에게 할 말을 되뇌었다.
***
“피는 이미 효력을 잃은 것 같습니다. 인체에 접촉해도 별다른 이상 징후는 없다고 합니다. 피해 복구 작업을 무난하게 진행할 수 있을 겁니다.”
관료 하나가 루우에게 다가와 보고한다. 루우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 계속 이대로 진행해주세요. 수도는 빨리 활기를 되찾아야 합니다.”
“예.”
생활하는 사람들의 활기. 그것이야말로 도시가 입은 상처를 치유하고, 침울하게 가라앉은 시민들의 사기를 높이는 가장 빠른 수단이다.
루우는 황궁 높은 곳에서 피범벅이 된 황궁의 풍경을 둘러본다. 물론 황궁 밖, 도시의 풍경도 마찬가지다. 여기저기 부서지고, 전투의 흔적이 남아있고, 피범벅…….
소방차를 비롯해, 물을 뿌릴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피를 씻어내는 중이다. 저 핏물을 전부 하수도로 몰아넣으면 나중엔 해안선도 빨개지는 게 아닐까,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앞으로도 할 일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잠깐 이렇게 여유를 갖는 것도 좋겠지.
카간 게레센제는 내각과 함께 피해 규모를 파악하느라 바쁘다.
피해 규모 파악은 단순히 몇 명이 다치고 몇 명이 죽었는지, 뭐가 얼마나 부서지고 사라졌는지 따지는 작업이 아니다. 그걸 해내기 위한 행정력의 복구와 확보가 동반된다.
특히 칸발리크는 사실상 전쟁터가 됐던 만큼 행정력이 상당히 망가졌으니까.
여기저기 숨고 피난 간 공무원들을 다시 소집하고, 죽거나 실종된 사람들을 대략적으로 파악한 뒤 업무를 재분배한다.
군과 경찰은 간신히 그 사이비 종교의 교인들을 잡아내는 중이라고 한다. 불행 중 다행한 일이라고 해야 할까.
“‘혁세주교’라고 했던가……?”
지금 막 볼로드와 협의를 마치고 온 주견하가 루우의 등 뒤로 다가오자, 그 기척을 느낀 황제는 이런 물음을 던졌다.
견하는 짧게 긍정했다.
“그래.”
“그 ‘혁세주’라는 게 없어지니까 파멸인으로 변하는 사람은 더 안 나오긴 하는데…… 이제는 ‘정신줄 놓아버린 인간’들이 많아지는 모양이야.”
“믿고 의지하던 것이 없어지기도 했고, 영혼을 얻을 거라는 희망도 사라졌으니까. 남는 건……”
자신이 영혼 없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는 냉혹한 진실만이 남는다.
“살려두면 사회적인 문제가 되겠지.”
견하는 루우의 옆으로 다가섰다. 그는 말없이 끄덕였다.
루우의 아버지를 죽인 세력에 협력한 자들이다. 이것저것 배려해가면서 마음을 어루만져 줄 여유는 없다. 역적으로 처리하는 수밖에.
아직, 피는 더 흘러야 하는 모양이다.
“효윤이는?”
“혁세주교 사람들 잡겠다고 나갔어. 내가 왔으니 황제 경호에만 묶여있지 않아도 된다면서.”
그 고생을 하게 만들었으니, 분풀이하고 싶은 것도 당연하다. 효윤도 절대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루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로 영웅이 되는 건 좀 불편하네.”
“즉위 전후로 했던 선전과 별반 다르지 않아.”
“그래도 그때는 어느 정도는 사실에 기반한 선전이었어. 이번에 나는 파멸인 몇 개체 죽인 것 말고는 한 일이 없어.”
“여기서 버티고 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할 일 한 거야.”
루우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견하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고맙다는 시선이 아니다. 견하의 말이 단순한 격려가 아니듯.
“기운 잃고 있을 시간은 없어. 다음 일을 해야지.”
“이런 테러는 더는 없겠지?”
“우리가 대처법을 알아냈는데 더 시도할 멍청이들은 아니겠지. 아니 애초에 그럴 역량도 뿌리뽑혀 나갔을 거고.”
“그렇다면 칸발리크는 이제 다시 후방 기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겠네.”
미승휴에게 제대로 군사 분야 교육을 받은 미리안 만큼은 아니지만, 루우도 황제로서 갖춰야 할 군사적 역량은 있다.
“한족 봉기가 문제지만 그거야…… 리안 누나가 보낸 추가 병력이 도착하는 대로 해결될 거고.”
“울제이 숙부, 게레센제 숙부 문제도 일단 해결됐고. 이걸로 후방은 안정화됐다고 봐야겠지.”
“이제 전면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 거지.”
물론 다이온이나 칸발리크 정계 내부의 문제는 남아있다. 울제이와 게레센제의 인사들이 새로 이 정계에 뛰어들면 또 다른 혼란과 갈등이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다시 말해 ‘다이온 연방’을 창설할 준비가 되어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루우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어깨와 가슴팍이 오르내린다.
그걸 기운찬 미소로 승화시키며, 견하에게 말한다.
“이제 반격에 나서자, 감찰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