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없는 사람들의 교회(7)
“협력해달라고?”
견하는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협력을 요구한다’는 개념 자체가 뭔가 잘못된 것 아닌가? 지금 네놈은 내가 협력할만한 그 어떠한 대가도 제시하지 못했어.”
심지어 협박조차 되지 못한다. 세상 자체의 ‘이’를 뒤흔들겠다는 인간에게 협력하든, 협력하지 않든 결과가 같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토칸은 마치 오해하지 말라는 듯이,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모두가 저 파멸인류처럼 된다고 해도, ‘우리’는 아니야.”
견하는 눈살을 찌푸린다. 이번에 말한 ‘우리’는 아까와 또 의미가 다르다.
“우리 같은 이단들은, 파멸인이 되지 않아.”
“……무슨 의미지?”
“왜 유독 이단만이 하얀 괴물, 파멸인과 잘못 접촉했을 때 ‘이’가 붕괴되는지, 궁금하지 않았나?”
“‘이’를 본능적으로 깨우친 우리가, 또 다른 ‘이’와 접촉했기 때문 아닌가?”
“그런 이유도 있지. 하지만 좀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어.”
토칸은 잠깐 뜸을 들인다. 마치 견하의 눈에서 궁금증이라도 읽어내겠다는 듯.
“우리는 ‘의외의 성공사례’야, 주견하. 저 파멸인류는 이루지 못한 ‘신종’에 근접한 사람들이라고.”
비록 영혼을 얻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현 인류나 실패작인 파멸인류보다는 앞선 곳에 있다.
그렇기에 이렇게 꿈속에서 서로 만나는 것을 포함해, 온갖 재주를 부리는 게 가능하다.
“우리는 파멸인이 ‘원래 갔어야 할 방향’에 서 있는 존재들이야. 그러니 파멸인류는 우리에게 흥미를 느끼면서도 우리를 증오하고, 우리를 통해 세상에 나오려 들지.”
“추상적이기 짝이 없는 설명이군. 그래도 뭐, 대충은 알아들었어. 하지만 나는 여전히 설득되지 않았다. 네놈은 이런 추상적인 이야기에 흥미를 느낄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야.”
주견하는 어디까지나 ‘구체적 현실’의 인물이다. 현실의 정치, 현실의 권력을 추구한다.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고 손에 쥘 수 있는 것들을 욕망한다.
그렇기에 토칸이 이야기하는 것들이 약간 흥미를 끌 수는 있어도, 거기에 몰두하진 못한다.
토칸은 이해한다는 듯 끄덕였다.
“그래. 그래서 내가 너에게 제시할 대가도 현실적인 거야. 여기까지 설명했는 데도 모르겠나?”
“네가 나에게 ‘현실적인 대가’를 제시할 수 있다고?”
견하는 비웃음을 섞어 묻는다.
“나는 주견하 너와 달라. 네 말대로 나는 좀…… 속세의 욕망에선 벗어난 사람이거든. 권력이니, 정치니, 명예니…… 하지만 넌 아니지. 이건 다 네가 갖고 싶은 것들이지.”
“그래, 나는……”
고려 제3제국의 번영, 그 통치자인 리안의 영광을 원한다, 그렇게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토칸은 무자비하게 견하의 말을 자르고 들어온다.
“고려도 몽골도 키타이도 낭키아스도, 네가 갖고 싶은 거지? 주견하.”
이번 침묵은, 아까보다 훨씬 더 길었다.
정말 오랜만에 주견하의 눈동자가 떨린다.
견하와 리안 사이를 아는 자는, 거기까지 떠올리진 못한다. 설령 견하의 욕망과 야심을 의심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리안의 위세를 빌린 것이라고만 짐작할 따름이다.
그 자신이 한도 끝도 없이 위로 오르고 싶어한다는, 견하 자신도 모르는 마음속 깊숙한 욕망을 꼬집은 자는 아직까지 없었다.
리안이 언젠가는 자신을 뛰어넘을지도 모른다고, 농담조로 이야기했었지만 어디까지나 농담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토칸은 리안과 견하 사이를 모른다. 그는 견하를 오직 현실 정치에서 권력을 추구하는, 자신과는 정반대되는 인간으로 파악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는 견하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을 찌르고 들어왔다.
소가 뒷걸음질로 쥐를 잡은 격이지만, 견하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기엔 충분했다.
“고려의 건국자도 몽골의 건국자도, 모두 이단의 혈통이지. 그리고 지금 너희 나라의 황제도 비할 바 없이 강력한 이단이고.”
“그게 지금 네가 하겠다는 제안과 무슨 관련이 있지?”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나? 이단은 일반인에 비하면 월등히 뛰어난 자들인데, 왜 ‘전면에 나서서 지배하지 않는가’라고.”
토칸은 이번엔 땅을 구르는 듯한 낮은 웃음을 흘렸다.
“일단 한 번 세상의 변혁이 끝나고 나면, 인류는 파멸하거나 이단이 되거나, 혹은 그 둘과는 또 다른 뭔가가 될 거야. 그때부터 이 세상을 어떻게 처리해나갈지, 그 결정권을 너에게 주지. 어떤가?”
“……그건 모순 아닌가? 너는 세상의 원리 자체를 바꾸고 싶어서 이런 일을 저지른다고 했는데, 나는 기존 원리 그 자체에 종속된 인간이다.”
세상을 변혁시킨다는 사람이, 변혁 이전 세상의 가치관을 지닌 사람에게 미래를 맡긴다? 도대체 뭘 원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혁명을 일으키고 싶은 게 아니야. 그저 세상에 정나미가 떨어진 사람이지. 변혁 이후에 인류가 뭔가 대단한 존재로 거듭나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야. 하지만 여전히 주견하라는 군주가 통치하는 노예들로 이루어진 세상이라면…… 아, 이건 글렀군, 하면서 손 떼면 그만이지.”
견하는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흔들렸다. 어처구니없는 환상 속 이야기지만, ‘지배할 세상을 주마’라는 제안에 마음이 움직였다.
토칸이 말한 ‘변혁 이후의 세상’이 무엇하나 보장되지 않은 곳이라 해도,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매력을 느꼈다. 토칸의 수작에 놀아나는 것에 불과할지라도, ‘자신의 힘으로 지배하는’ 광경을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그려냈다.
아마 이게 차가운 견하의 마음속, 마지막 남은 허영의 조각이겠지.
순간순간 변해가는 견하의 표정을, 토칸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바라본다.
연출은 성공적이다. 몇 단계만 더 자극해주면 그는 우리에겐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하고, 적에겐 치명적인 독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던 토칸의 시야가, ‘구겨졌다’.
“……?”
마치 망가진 필름이 끼어 있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구겨졌다가, 금이 갔다가, 정상으로 돌아오길 반복한다.
“……나는 내가 완벽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당황하는 토칸의 귀에, 견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래서 ‘나라는 부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경우’에 대한 대비를 해놓고 있지.”
인간은 유혹당할 수 있다. 흔들릴 수 있다. 초심을 잃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처음에 마음먹었던 대로’ 계획이 진행되도록, 조치를 취해놓을 수도 있다.
“나는 여기로 오기 전에, 내 부하에게 ‘각오를 단단히 해두라’고 명령했지.”
잠깐 눈 붙이기 전에 지나에게 남겨뒀던 명령.
“내가 의식을 잃어도, 아무리 오래 자리를 비워도 내 부하들은 내가 남겼던 명령을 그대로 수행한다. 기계는 사정 봐주지 않고 움직이는 법이지.”
“주견하, 너, 무슨 짓을……?!”
“그걸 말해줄 의무는 없는데. ……내가 정말로 네놈이 말해주는 것들을 ‘몰라서’ 맞장구 쳐줬다고 생각하나?”
토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화석처럼, 아주 딱딱하게 굳었다.
“알고 있었나?”
“태반은. 뭐 처음 듣는 정보도 있었고 나름 흥미도 있었지만 그뿐이야. 나에겐 나만의 계획이 있고, 그걸 별로 변경하고 싶지가 않군. 네놈이 말한 것들은 그저 방해물에 지나지 않는다.”
꿈이, 유리조각처럼 금이 간다.
몇몇 깨어진 조각들이 두 사람 사이로 떨어진다.
그러한 광경은 개념일 뿐이다. 이의 붕괴를 시각으로, 인간의 뇌가 이해할 수 있도록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이미지.
토칸이 미친듯이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한다. 너무 웃긴 나머지 배가 아파 견딜 수 없다는 듯, 허리를 구부려가며 웃는다.
그런 토칸의 모습을 관찰하다, 견하는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
자, ‘혁세주’라는 것은 이 도박에서 무슨 선택을 할까.
***
견하와 감찰국 직원들이 탄 기차와는 또 다른 경로로, 화물열차가 칸발리크로 향했다.
그 열차에는 고려의 각종 흉악범들, 전향하지 않은 허동주 파벌이나 한족 독립운동가, 내전 중 전쟁범죄를 저질렀으나 아직 숨은 붙어있는 자들이 타고 있었다.
아니, 화물열차이니만큼 ‘실려 있었다’고 해야 할까.
비인간적일 정도로 가혹한 ‘화물 취급’을 받으며 그들이 도착한 곳은, 이름 모를 평원이었다.
몇몇 눈썰미 좋고, 여행 경험도 좀 있는 자들은 이곳이 칸발리크 동쪽 어딘가라는 걸 눈치챘지만, 그뿐이었다.
그들 중에 ‘왜’ 이곳으로 옮겨졌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용소를 연상시키는…… 아니, 수용소다. 철조망 울타리, 초소, 대충 통나무를 엮어 만든 숙소. 군인들은 악을 쓰며 총으로 ‘화물’들을 위협해 수용소 안으로 밀어 넣는다.
하지만 그들을 수용소 한가운데 공터에 모아둘 뿐, 방을 배정해주는 등의 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욕설도 딱 그쳤고, 딱히 누군가 높은 사람이 나타나서 군기를 잡지도 않는다.
‘화물’들은 그냥 그 자리에서 엉거주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까 어리둥절한 눈을 굴릴 뿐이었다.
또 다른 ‘화물’들이 들어온다.
이들은 몽골 정부의 협력으로 얻어낸, 인민동맹 또는 자유공화국의 적극 협력자들이다. 주견하는 일반 포로들도 원했지만, 볼로드는 그건 완강히 거절했다.
“적극 가담하지 않은 자들은 내전 후 재건에 필요한 인력입니다.”
그게 볼로드가 내세운 이유였다. 타당했기에 주견하도 요청을 철회했다.
하지만 볼로드는 ‘적극 가담자’들은 망설임 없이 넘겨줬다. 내전 중에는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자들이었고, 내전 이후에도 여전히 위험한 자들일 테니까.
그리고 그들이 카간과 국가와 칸발리크에 저지른 짓들을 생각했을 때, 비참한 죽음 말고 다른 형벌은 없기도 했고.
낯선 ‘화물’들이 합류하여 수용소 안은 더욱 북적였다. 여전히 의문에 가득차 있는 그들 앞에, 따뜻한 식사를 실은 트럭이 도착했다.
대충 국물이 흥건한 정체불명의 요리였다. ‘화물’들은 그저 거기에 고기가 많이 들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추위에 반쯤 얼어붙은 몸을 녹이러 트럭 앞에 줄을 섰다.
군인들은 알아서들 배식하라며 트럭과 음식을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약간의 고함과 다툼이 오간 끝에, 모두가 그릇에 국물 요리를 퍼 담고, 수용소 곳곳으로 흩어져 식사를 시작했다.
***
“조리 중에 사고가 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한재연이 그렇게 말하며, 이익서와 유지나를 보고 미소 지었다. 그가 말하는 ‘조리 중 사고’는 화재 같은 걸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저 정체불명의 국물 요리에는 물론 소고기나 돼지고기도 쓰였지만, 그 외에 ‘다른 고기’가 들어간다.
냉동고에 잔뜩 보관된, 파멸인의 시체에서 얻은 고기가.
“무심코 국물 맛을 본다든가 하면 즉시 머리에 바람구멍을 만들어준다고 했으니까.”
이익서는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지시는 정확하게 이행되었다.
지금 간이 수용소에 모인 수많은 죄수들은 예외 없이 식사를 하고 있다.
“언제쯤 반응이 나타날까.”
재연이 묻자 지나는 말 없이 손에 든 쌍안경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