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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212화 (212/541)

신 없는 사람들의 교회(6)

“파멸인이 건너오는 이유, 라.”

그러고 보니 게레센제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다.

목적은 알 수 없다.

이쪽 세상으로 이주해서 실수를 되돌리고 ‘다시 시작’할 기회를 잡아보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우리 세상의 인간들을 ‘새로운 실험체’로 삼아 또다시 영혼 획득에 도전해보고 싶은 것인지.

혹은, 단순한 정복욕인지.

뭐, 게레센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지금 주절주절 떠들 필요는 없다.

얌전히 그런 이야기를 들려줄 만한 사이도 아니거니와, 이쪽이 ‘얼마나 아는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이유도 없다.

정보의 노출은 최소화하고, 수집은 극대화한다.

모르는 척,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면 상대는 홀로 도취되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지 않을까.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자.

견하가 그런 계산을 마침과 동시에, 토칸의 말이 이어졌다.

아마 그는 견하가 자신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는…… 아니 ‘우리’는 지금 칸발리크 상공에 떠 있는 붉은 존재를 ‘혁세주’라고 불러.”

“‘우리’? 그건 알타이 자유 공화국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네가 속한 ‘범 알타이 인민동맹’?”

토칸은 씩 웃는다. 말 한마디에서도 상대의 내실을 캐내려는 저 습관이 마음에 든다. 그래. 아무리 끌려왔어도 저런 당당함과 면밀함은 잃어선 안 되지.

“둘 다 아니야. 여기서 내가 말하는 ‘우리’는, 그들과는 달라.”

이번에는 견하가 피식 웃는다. 아까 토칸의 말도 그렇지만, ‘범 알타이 인민동맹’은 알타이 자유 공화국과는 구별되는 조직인듯하다.

그 신생 공화국의 정치세력 중 하나인가, 배후에 있는 조직인가, 배후에 있다면 공화국을 얼마나 장악하고 있는가…… 그것까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토칸은 자신이 말한 ‘우리’가 범 알타이 인민동맹도, 알타이 자유 공화국도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하나하나 가능성을 지워나가다 보면 남는 것은…….

“칸발리크 주민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이상한 종교, 그게 네가 말하는 ‘우리’냐.”

“맞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토칸은 선선히 인정했다.

“그리고 칸발리크에서 일어난 온갖 재해, 당신들이 벌인 짓인가?”

“그렇지.”

“더 무슨 협상을 할 여지는 없겠는데.”

견하는 이번 사태를 일으킨 자들, 그리고 직간접적으로 동조한 자 모두를 몰살하겠노라 다짐했으니까.

“그래도 나는 어떻게든 협상을 해보고 싶군.”

견하는 치켜 올라가려는 한쪽 눈썹을 간신히 억눌렀다. 저 말에 구미가 당겼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 안 된다. 저쪽과 어떻게든 피를 보겠다는 듯한, 완고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그래도 들어보고 싶긴 하다. 솔직하게 자기들이 한 행동을 인정하고, 속내를 드러냈다면 분명 견하가 매력을 느낄만한 제안이나 정보를 들고 왔을 것이다.

“나도 협상 조건을 들어보지도 않고 테이블을 걷어차지는 않으니, 일단 이야기를 들어볼까.”

“좋아. 다시 ‘혁세주’ 이야기로 돌아가 보지.”

혁세주. 말 그대로 붉은 세상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칸발리크 하늘 위에 뜬 그 붉은 것은 여기, 이 세상의 뜻 전체를 반영하는 존재인 것 같아. 궁극적인 목표까진 몰라도, 어쨌든 파멸인류 전체를 우리 세상으로 들이미는 방향으로 작동하지.”

“‘그런 것 같다’? 그 말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는 것 아닌가?”

“추측이지만 신빙성 있는 추측이지.”

“여기서 멸망한 저 파멸인류가 남긴 기록이라도 발굴한 건가?”

“설마. 파멸은 파멸이야. 단순한 경제, 사회, 문명의 붕괴가 아니다. 정상적인 생물로서 끝장이 난 거야. 이 광경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토칸은 양팔을 벌렸다. 파멸인들은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주변은 오로지 붉은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살점. 그리고 피.

“여기 인류는 정말로 ‘바벨 탑’을 건설했던 셈이지. 문제는 추구했던 게 한낱 탑 따위가 아니라 영혼을 얻어서 신종이 되려 한 거였지만.”

그 결과 인류로서의 ‘이’가 무너졌다. 세상 자체의 ‘이’가 붕괴했다. 이의 혼돈은 그대로 기의 혼란을 가져왔다.

인간이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무기물은 유기물과 뒤섞인 뭔가가 되어버렸다.

“그럼, 어떻게 그들의 의도를 추측했다는 거지?”

“원래 인류였잖아. 몇 가지 의사소통 정도는 가능하지.”

“어떻게?”

“머리로.”

토칸은 왼손 검지로 자기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간혹 붉은 꿈을 꿀 때 들리지 않나? 저들의 목소리가.”

그렇긴 하다. 몇 달 전 꿈에서는 확실히 들었다.

“많은 학자들이 광인이 될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 메시지를 청취했어. 그렇게 수 세기에 걸쳐서 조금씩 조각을 모으고, 그걸 집대성해 ‘비기’를 만들거나 영원히 봉인될 문서를 만들지.”

퇴계 이황이나 마르코 폴로도 그런 학자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쿠빌라이 문서」가 있어. 들어는 봤을 것 같은데. 어쨌든 그런 연구에 기초해서 저들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어쩌다가 이런 지경이 되었는지 추측해내는 거야.”

이단이라면 더더욱 잘 듣는다며, 토칸은 웃었다.

“주견하, 너도 듣지 않았을까? 파멸인들이 자신의 작은 조각들, 우리 세상으로 넘어간 것들을 ‘아이들’이라 부르는 것 말이야.”

아주 미묘하지만 흠칫, 몸을 떨었다.

이런.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뒤늦게 감추려 들면 더 우스워지니 그냥 놀란 대로 반응하자. 어쩌면 상대가 놀란 견하를 보고 더 많은 정보를 뱉을 수도 있으니까.

“저들의 메시지는 우리같은 이단의 정신을 잠식해오지. ‘아이들’이라고 생각하게 해. 그것도 파멸한 이곳에서 안전한 우리 세계로 ‘피난시켜야 할 아이들’이라고.”

“인간 본능을 자극하는 건가. 부성애나 모성애 같은 것……”

“측은지심이기도 하지.”

사단, 네 가지 단서 중 하나.

측은지심은 그 중 ‘인(仁)’의 단서.

“저들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이’와 관련을 맺고 있어.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아. 그게 체계적인 계획에서 나오는 건지, 아니면 살고자 하는 본능에 따라 자연스레 나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당신네들이 말하는 ‘혁세주’는, 이단들의 정신에 간섭하는 등의 수작을 부려서 우리 세상에 나오려 한다. 파멸인들이 튀어나오고 온갖 잡다하고도 기이한 현상들이 일어나는 건 그것과 관련이 있다. 이렇게 이해해도 되겠나?”

“거의 정확한 이해야.”

“그리고 당신과 당신이 이끄는 종교는 그 혁세주와 파멸인류가 우리 세계로 넘어오도록 돕고 있지.”

“조금 수정을 하자면, ‘내가 이끄는 건’ 아니야. 혁세주교는 애초에 범 알타이 인민동맹에서 기획한 종교야. 칸발리크에 혼란을 몰고 와서, 현 정권을 무너뜨릴 목적으로 말이야.”

“당신이 이끄는 게 아니라, 칸발리크 정부의 혼란만을 목적으로 했다면 난리가 나더라도 이 지경까지 오진 않았겠지.”

정권 전복을 꿈꾸는 집단은, 보통은 전복 이후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칸발리크는 워낙 대도시인 데다 역사적, 정치적 의미가 상당하니 언젠가는 회복되긴 하겠지만…… 그래도 너무 깊은 상처를 입었다.

정권 탈취 후의 통치를 생각한다면, 이 정도로 깊은 상처는 좋지 않다.

“뭐, 나는 그저 혁세주교에 몇 가지 요소를 첨가했을 뿐이야.”

토칸의 그 말을 듣는 순간, 견하는 그가 위험한 인간이라고 직감했다.

알타이 자유 공화국.

범 알타이 인민동맹.

자기 소속을 그렇게 밝히긴 했지만, 소속한 조직과는 다른 목표를 내세웠다.

개인적인 계획이 따로 있는 사람이다.

고려 제3제국.

태사부, 정치경찰실.

감찰국의 수장으로서, 리안이나 루우와는 다른 ‘자신만의 계획’을 지닌 견하이기에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토칸은 위험한 인간이다. 특히 자신과 부딪히게 될 경우 더욱더 위험한 인간이다.

조금 더 경계심을 높여, 묻는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공화국의 목적도 아니고, 인민동맹의 목적도 아니겠군. 혁세주와 파멸인류의 목적도 아니겠고. ‘당신의 목적’은 뭐지, 토칸?”

토칸은 또다시 씩 웃었다.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러주시는군. 이제야 나를 진지하게 상대해주실 건가, 감찰국장 나으리.”

견하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여기서 초조한 태도를 보일 순 없다. 느긋하게, 토칸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파멸인류와 혁세주가 우리 세상에 더 많이 머리를 들이밀수록, 우리 세상은 이들의 세상과 비슷해져 가.”

“우리 세상도 저들의 세상처럼 파멸한다는 뜻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든 파멸인들이 살아가기에 적절한 ‘환경’이 조성된다는 거니까.”

이건 섬세한 과정이야, 라고 토칸은 덧붙였다.

“지금 혁세주를 공들여 소환하는 과정이 한창이야. 이 과정이 유지되도록 파멸인의 수를 일정하게 유지할 필요가 있지. 너무 많아서도 안 되고, 너무 적어서도 안 돼. 물론 혁세주 소환을 완벽히 마치고 나면, 그때는 거침없이 우리 세상에서 영역을 확장해 나가겠지만.”

“그렇게 해서 당신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는 거지?”

견하는 토칸의 목적을, 다시 한번 캐묻는다.

토칸은 싱거울 정도로 간단히 대답했다.

“이 세상의 변혁이지.”

하지만 그 말에 담긴 의미는 싱겁지 않다.

알타이 자유 공화국이 일으킨 저 ‘혁명’이 성공한다거나,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 권력을 잡는다는 게 아니다.

토칸이 말한 변혁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런 의미였다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적당한 기회를 잡아 적당한 시점에 칸발리크 정권과 휴전 협정을 맺으면 그만일 터.

저 남자가 말하는 변혁은, 좀 더…… 무거운 의미다.

“당신이 꿈꾸는 변혁은 뭐지? 그 변혁 끝에 뭘 이루려는 건가?”

“인간이 아무리 혁명을 일으켜도 세상의 구성 원리 자체는 변하지 않아, 주견하. 바라트를 봐. 황제를 몰아냈지만 공산당 당수가 새로운 황제가 됐지. 자유, 평등, 박애를 주장하던 혁명의 선봉장은 자기 왕조를 만들었잖나.”

“인간 노력 무용론이라도 주장하고 싶은 건가. 그래서 다른 세상의 힘이라도 빌려 보겠다고?”

“인간이라는 동물은 한계가 있어. 노예제가 폐지되었다지만, 약간 더 비싸고 몇 가지 제약이 더해진 노예들은 여전히 있어. 그들한테 노예라는 이름만 안 붙였을 뿐이지.”

토칸 역시 노예, 즉 무자비한 실험의 실험체였기 때문에 잘 안다.

“군주정을 폐지해도 군주는 남는다. 노예제를 폐지해도 노예는 남는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인간 본성 자체,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 자체의 ‘원리’를 뜯어고치지 않으면 안 돼.”

“그래서 너는…… 모두를 ‘파멸인’으로 만들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모두가 저렇게 될지, 아니면 새로운 가능성을 열게 될 지는 아무도 몰라. 일단 해봐야지.”

견하의 머릿속에서 토칸의 위험성 평가가 최고조로 올라간다.

이놈의 말이 얼마만큼 정당하든지 간에, 이 자는 루우가 군림하고 리안이 통치한다는 견하의 모든 계획을 철저하게 방해하는 자다.

“자, 그래서 제안하는 건데. 주견하, 내 목적에 협력해주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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