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없는 사람들의 교회(5)
동명시에서 할 일은 다 마쳤다.
견하는 데려갈 수 있는 모든 감찰국 직원을 데리고 칸발리크 행 열차에 다시 올랐다.
훈련 수준이나 장비는 차치하고라도, 이 정도 인원이면 루우를 보좌하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다.
하얀 제복을 입은 무리가 루우 주변을 에워싸고, 황궁에서 그녀가 머무는 구역을 장악하면, 그것만으로도 선전 효과는 크다.
누가, 어떤 집단이 칸발리크 황궁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눈으로 보여줄 수 있다.
국경 통과는 이미 리안과 루우에게 승인을 받았고, 감찰국은 군사 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해외 주둔 기간의 제한도 없다.
다시금, 대낮인 데도 검은 장막이 드리운 저 기괴한 도시로 다가간다.
“다들, 각오를 단단히 해두라고 전해줘. 지나 너도 마찬가지고.”
“……네.”
도무지 현실감이라고는 없는 광경에 숨을 삼키면서도, 지나는 충실하게 명령을 이행했다.
사진이나 글로 지금 저 장막 안쪽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전했지만, 실제로 보면 또 느낌이 다를 것이다.
“익숙해져야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피를 흘리고,
또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게 만들지 모른다.
인체의 파편, 내장, 오물, 도저히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괴물을 질릴 때까지 보아야 한다.
그 괴물들의 비명소리를 밤새 듣고도 미치지 않을 정도로 신경이 굵어져야 한다.
감찰국은 그런 조직이 되어야 한다.
아니, 자신이 이끌 모든 조직이 그래야만 한다.
“이번 임무는 그 초석이 될 거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잠깐 눈을 붙인다.
***
“반갑군.”
토칸은 열차를 보며 마치 인사라도 나누듯 그렇게 말했다.
칸발리크를 뒤덮은 검은 장막으로 접근하는 열차다. 틀림없이 고려에서 주견하를 싣고 돌아오는 열차일 터.
과장을 좀 섞어 이야기하자면, 동포의 얼굴을 보는 것보다도 더 반갑다.
토칸은 주견하와 생사를 가르는 싸움을 나눈 후, 뭐라 말할 수 없는 친근감을 느꼈다.
자신과 비슷하면서도 굉장히 다르다.
토칸이 음지로 파고든다면, 주견하는 양지로 자신을 드러낸다.
세상의 이면을 꿰뚫고 있는 자신과 달리, 주견하는 세상의 표면을 장악해나간다.
그렇다면 주견하는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민 인간인가? 실제로 만나보니 그렇지 않았다. 그가 전장 한복판에 직접 나선다는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전투에 있어 자기파괴적인 수단도 얼마든지 고르는 인간이었다. 바로 그 점이 재미있다.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다.
이 인간을 파헤쳐보고 싶다.
뭐, 다시 만나는 건 어렵지 않다. 지난번처럼 직접 마주하긴 힘들겠지만…… 이번엔 다른 방법을 쓰면 된다.
이미 ‘붉은 존재’가 내려다보는 곳에서 칼날을 주고받은 사이니까.
토칸은 검붉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
견하는 묘한 이질감에 눈을 떴다.
열차의 객실이 아니라, 몇 번이고 봐 왔던 붉은 세계가 눈앞에 펼쳐져 있다.
“꿈인가.”
잠깐 눈 좀 붙인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또 이 붉은 꿈을 꿀만큼 잠들어버린 건가.
견하는 빨리 깨야겠다고 생각한다. 다시 눈을 감는다.
“꿈…… 하고 유사하긴 하지.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꿈은 아니야.”
낯선 목소리에 눈을 뜬다.
앞에, 사람이 서 있다.
“너는…….”
아는 얼굴이다. 이름은 모르지만.
칸발리크 황궁을 습격했던 테러리스트.
“희한한 꿈이군.”
테러리스트는 씩 웃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일반적인 꿈이 아니야. 네 앞에 서 있는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 본인이다.”
전에 꾼 꿈속에 나왔던 파멸인들과는 다른 목소리다.
파멸인의 목소리는 머릿속에 직접 울린다면, 이건 명백히 인간의 허파에서 올려보내는 목소리.
“이게 꿈이 아니라면 뭐지?”
“글쎄. 칸발리크 상공에는 ‘문’이 뻥 뚫려 있으니, 그 문을 통해 ‘이동’한 거라고 봐야겠지? 문으로 들어올 수 있으면 나갈 수도 있으니까.”
“이동? 내 육체는 분명히 지금 열차 안에 있었을 텐데? 영혼이라도 옮겨 온 건가?”
“핫.”
테러범은 코웃음 친다.
“아직 모르나? 영혼이라는 건 없어. 적어도 사람은 영혼이 없어. 그러니까 그런 표현은 적절하지 않지.”
그러고 보니 게레센제도 비슷한 설명을 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뭐가 이동했다는 거냐.”
“이봐, 이동이라는 게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야. 네가 고려에서 몽골까지 기차로 이동한 것처럼 그냥 네 영혼 없는 육체가 여기로 온 것뿐이라고.”
“그럼 지금쯤 내가 타고 있던 열차는 난리가 났겠군. 내가 갑자기 없어졌으니. 어서 돌아가야겠다. 어떻게 돌아가지?”
“아, 이거 진짜 설명하기 어렵네. 이동했다고 해서 거기 있던 네 육체가 없어진 게 아니야. 너는 아직도 거기서 눈 감고 낮잠이나 자고 있을걸? 그냥 너는…… 거기도 있고 여기도 ‘있게’ 된 것뿐이야.”
견하는 테러범을 가만히 노려보기 시작한다.
“진정해. 설명해줄 테니까. 파멸인들, 처음 칸발리크를 습격하기 시작했을 땐 그냥 살아서 움직이는 두부 같았지? 겉에만 생물 같고, 속은 그냥 하얀 덩어리고.”
“그랬지.”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장이나 각종 기관을 갖추기 시작해서…… 지금은 아예 사람처럼 피까지 흘릴 거야. 그거랑 비슷한 거야.”
테러범은 손뼉을 쳤다. 그러자 이 붉고 역겨운 대지 위에 무수히 많은 파멸인들이 기어 올라온다.
“여기도 파멸인, 우리 세상에도 파멸인. 네가 본 파멸인들의 변화는 ‘파멸인이 서서히 우리 세상에서 생명으로서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본 거야. 이 과정 중에는 여기도 있고, 우리 세상 쪽에도 있는 거지.”
뒤집어 말하자면, ‘붉은 꿈’을 꾸는 이단들 역시 그러하다.
처음에는 꿈만 꾼다.
나중에는 꿈속 파멸인들과 의사소통도 가능해진다.
서서히, 그렇게 붉은 세상으로, 보다 완성된 형태로 ‘옮겨진다’.
그 과정에서는 두 세상에 한꺼번에 존재할 수 있다.
“뭐, 이런 지식을 미리 갖고 있었다면 주견하 네가 먼저 날 여기로 불러냈겠지만.”
“그 말은, 당신이 날 여기로 불렀다는 말이군.”
“그래. 소개하지. 내 이름은 토ㅋ……”
토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견하는 손을 뻗는다.
그 동작에 토칸과 견하 모두 놀란다.
특히 견하는 무기가 자신의 손에서 ‘소환’되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서 하얀 덩어리들이 날아와 뭉쳐지는 걸 보고 놀랐다.
“그런가. 원래 세상에서는 여기서 ‘소환’하는 거였으니까. 여기는 ‘본고장’이고.”
덕지덕지 뭉쳐진 덩어리들은 이내 꾸물거리며 검의 형상을 만든다. 검을 쥐고 곧바로 달려든다.
토칸은 거리를 벌린다.
다시 한번 손뼉을 친다.
파멸인들이 달려들기 시작한다.
견하는 동요하지 않고 시선을 좌우로 돌리며, 자세를 고치고 파멸인들을 베어낸다.
검광이 폭풍처럼 파멸인들을 가르지만, 그들의 돌진 행렬은 멈추지 않는다.
칸발리크에 나타난 것만큼이나, 이 붉은 세계의 파멸인들도 다양하다.
모양과 크기, 모두 다르다.
정말로 원래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가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
이 완전히 파멸해버린 세계 속에서 이들은 대체 뭘 하고 살며, 왜 우리 세계로 넘어오고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파멸인의 머리를 베고 부속지를 날려버린다.
몇 분, 아니 몇 시간을 그렇게 베어냈을까.
견하가 땀 섞인 한숨을 뱉어내고서야, 토칸은 또 손뼉을 쳤다.
파멸인의 돌진이 멈춘다.
“자, 이제 좀 내 이야기를 들어주겠어?”
“네놈과 네놈이 속한 집단 모두 처형 대상이야. 들어줄 이야기는 없다.”
“그러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싸움을 계속하는 수밖에.”
견하는 검을 바닥에 꽂고, 피식 웃었다.
“맹수 조련사인 것마냥 파멸인을 조종하는군. 그것도 내가 모르는 어떤 기술인가?”
“조종한다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에 가깝지. 산이나 숲에 피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던져두면 맹수가 오고야 마는 것처럼. 뭐,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고 좀 더 섬세한 기술이기는 해.”
“좋아. 일단 쉬는 동안 이야기나 들어보자.”
“안심해. 이야기가 끝나면 어느새 네가 원래 있던 곳에서 눈을 뜰 테니까. 그래서 ‘꿈과 유사하다’고 했던 거고.”
견하는 아예 바닥에 주저앉았다.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현실적인 인간과 마주 보고,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설명을 듣는다.
“다시 소개하지. 나는 토칸. 알타이 자유 공화국…… 소속이긴 한데 그보다는 ‘범 알타이 인민동맹’ 소속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거야.”
“소속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빨리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토칸은 이해한다는 듯이 끄덕이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이곳에서 비롯된 힘에는 양면성이 있어.”
뜬금없는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견하는 일단은 지적하지 않고, 좀 들어보기로 했다.
“여기 이 파멸인류, 그리고 이들이 사는 이 망가진 붉은 세계. 인정사정없이 파멸로 끌고 가버리지. 그런데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파멸하지 않고 ‘이단’이라는 재능을 얻는단 말이야?”
물론 이단 중 상당수는 결국 전쟁터에서 이용되지만. 토칸은 쓴웃음과 함께 그렇게 덧붙였다.
“이단은 영구불변이라 믿었던 ‘이’에 간섭하는 존재라고 하지. 이봐, 이런 의문 가져본 적 없어? 어떻게 우리는 세상의 ‘원리’를 무의식중에 이해하고, 또 간섭할 수 있게 된 걸까? 그걸 가능하게 해 준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견하는 작년에 루우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떠올린다. 그때 루우도 이런 식으로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부터 꺼냈었다.
이 토칸이라는 사내는, 대체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해 줄 것인가.
“나는 말이지, 이 파멸해버린 붉은 세계가 그 원인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어.”
“어째서 그렇지?”
“세상의 ‘이’,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이해하려면 하나의 세상만으로는 불충분해. 비교 대상이 없으니까. 그러면 우리는 보편적인 ‘이’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개별적인 ‘기’의 비교를 통해 세상을 이해할 수밖에 없거든. 대단히 부정확한 방법이지.”
하지만 ‘비교할 수 있는 다른 세상’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여기 이 세상이 우리 쪽으로 넘어오려고 해. 파멸해버린 기반을 버리고 새로운 세상으로 오는 거지. 그러면 자연스레 두 세상이 접촉할 수밖에 없다. 두 세상 사이의 미묘한 ‘원리’ 차이를…… 남을 통해 나를 안다는 식으로 ‘이해해버린 인간’이 태어나는 거야. 그게 ‘이단’인 셈이지.”
이는 토칸이 비밀리에 해 온 독자적 탐구의 결과였다. 그의 탐구는 이번 칸발리크 사태와 ‘붉은 존재’의 소환 과정에서 큰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이상한 점이 하나 남더란 말이지.”
“뭐지?”
“애초에 이 파멸해버린 세상은, 왜 우리 세계에 접촉해오는 걸까. 왜 자꾸 파멸인들이 넘어오는 걸까. 그저 적절한 과정을 거쳤을 뿐인데, 저 거대한 붉은 존재가 얼씨구나 좋다 하면서 넘어오는 이유는 뭘까.”
지금까지 빈정대던 것 같은 토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나는 그걸 좀 너와 이야기해보고 싶은 거야, 주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