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없는 사람들의 교회(4)
“우리 고려에서 했던 것과 비슷한 수준의 개혁이라면, 나도 받아들일 수 있어.”
견하의 보고를 다 들은 리안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비슷한 사례가 있다고 해서, 이번에도 똑같은 결과가 나와줄 것이라고 기대해선 안 돼.”
고려의 내전이 불과 몇 달 만에 끝난 것.
자신의 정권과 옛 민국 정부의 여러 파벌이 맺은 동맹이 큰 잡음 없이 유지된 것.
이 모든 것이 기적에 가깝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내전이 끝나자마자 각자의 권력과 이상을 걸고 동맹과 적대를 반복하고 있다.
당장 눈앞에 있는 나의 연인, 주견하마저도 내가 모르는 어떤 계획을 계속 꾸미고 있다.
기적이 두 번 일어날 리도 없거니와, 고려 제3제국 정부는 몽골 사회주의자들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외국이다.
그들도 자기네가 합법 정당이 되고, 노동자의 권익도 크게 증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언제까지고 우리 고려에 ‘쓸모있는 집단’으로만 남아 있진 않겠지.
“아마 그쪽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건 ‘루우가 몽골 카간이 되는 것’까지 일 거야. 뭐 한참 양보해서 내가 들어가서 ‘잠깐’ 권력을 장악하는 것까진 용인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후에는 자기들이 정권을 잡으려 할 터.
“바라트의 사례를 보면 그 인간들이 어떤 정권을 만들어낼지 대충은 그려지지. 이번에 노선을 달리한다고 하더라도, 적절한 제어가 없다면 그 집단이 어떻게 폭주할지 알 수가 없어.”
지금 반란을 일으킨 ‘알타이 자유 공화국’과 바라보는 방향만 반대인 극단주의 국가가 탄생할지도 모른다.
리안은 다른 정치가들에 비해 젊고 유연한 사람이지만, 이렇게 완고한 면도 있다.
“그러니 최소한 ‘루우가 카간으로 있는 몽골 군주정, 고려와의 동군연합’은 유지되어야 해.”
견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루우가 카간이 되는 거, 처음에는 반대하셨잖아요.”
“내가 바라는 건 어디까지나 ‘국제 정세의 안정’이야. 그 안정을 위해 루우가 카간이 되는 건 막아야 했지. 하지만 이미 우리는 몽골 내전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이런 상황이 된 이상 ‘국제 정세의 안정’에는 다른 방법이 필요해.”
목표는 전과 같지만, 그 달성을 위해선 정 반대 방향에서 접근해야 한다.
물론 리안은 몽골과 고려가 서로 독립된 동군연합 이상으로 나아가는 건 반대할 것이다. 두 나라의 정권이 통합되어, 고려가 몽골을 완전히 합병하는 것을 인정할 리 없다.
“사회주의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몽골 정세를 안정시키고, 우리는 그들과의 약속을 지켜서 개혁에 착수한다. 하지만 그 후에는 다시 견제에 들어가야지. 우리가 ‘직접’할 수는 없어. 그러니까 견제를 할 수 있는 세력을 따로 보호해야 해.”
“지금 태사로 있는 볼로드 같은, 루우를 지지해주는 정치인 말이죠.”
“볼로드는 안 돼. 그 사람 성향이라면 우리가 손을 떼자마자 개혁을 모조리 없던 일로 만들 거야. 사회주의자들이 정권을 잡는 것도 용인할 수 없지만, 그 방향의 개혁까지 아니꼽게 보는 인간도 정권을 잡게 놔둘 순 없어.”
리안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지금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타국 재상의 정치 생명을 끝장냈다.
견하는 말없이 긍정한다. 고려도 작년에 막 개혁에 착수했을 뿐이지만, 볼로드는 훨씬 오래 전부터 정권을 잡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 개혁을 게을리한 자가 개혁에 우호적일 리는 없다.
볼로드는 쓸모가 다하면 폐기한다.
그게 견하가 생각하는 ‘다이온의 미래상’을 위해서도 좋고.
하지만 그런 생각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견하는 계속 리안의 말을 듣는다.
“다른 적당한 사람을 찾아봐. 그 사람을 골라서 칸발리크의 새 정권을 구성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줘. 그 정도만 주의하면…… 이 계획은 승인하는 걸로 하지.”
정말 오랜만에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다. 미소가 오간다. 가슴이 조금 따뜻해지는 듯하다.
“그럼 이제 칸발리크 문제를 다뤄야 할 텐데……”
미소는 곧바로 다음 순간에 사라진다. 견하는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일단 좀 걸으면서 이야기할까? 만날 책상에만 앉아서 의논할 순 없잖아. 머리 좀 식히고 싶기도 하고.”
***
두 사람은 태사부 뒤편의 정원을 나란히 걷는다.
애초에 지금 쓰고 있는 태사부 건물이 황궁의 일부이기 때문에, 정원도 황궁의 격에 맞게 아름답다.
그러나 가을의 색으로 물들었던 나뭇잎들도 이제는 상당히 떨어져 버려, 곧 겨울이 시작됨을 알린다.
-겨울이 지나면, 또 새해가.
그러면 1931년이 찾아온다. 리안이 쓰러진 백부의 뒤를 이어 태사가 된 게 1928년의 일이니까, 집권 4년 차에 접어드는 셈이다.
실권을 잡고 제국최고회의 의장이 된 지는 3년 차지만.
그런 감상에 젖어 있는 견하의 귀에, 리안의 목소리가 꽂힌다.
“류 장관한테 끝내 전향하지 않는 한족 독립운동가, 각종 흉악범들 넘겨달라고 했다면서?”
부정해봤자 소용없기에 견하는 솔직히 인정했다.
“네.”
감춘다고 감춰질 일이 아니다. 고려 제3제국의 체제는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 류성일이 별말 안 하고 있어도 리안의 귀에는 정보가 들어간다.
“그것들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견하는 대답을 망설인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지금까지 정하지 못했다.
대답을 망설이는 이유는 그럴싸한 변명거리가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이고, 변명거리가 완성되지 못한 이유는…… 그가 할 일이 리안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리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한다. 지금까지 그런 생각으로 온갖 살육도 마다하지 않았다.
리안도 그런 견하의 행동을 ‘활약’으로 인정했다. 리안 역시 마냥 선인은 아니다. 이상적인 정치와 국가를 꿈꾸지만 그렇다고 해서 권력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진 않는다.
휘하 군인들에겐 거리낌 없이 자기를 위해 죽어달라고 말한다.
반역자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 가족까지 남김없이 처단한다.
살해와 타협 중 살해 쪽이 비용이 적게 든다면 그걸 고른다.
죄책감은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죄책감 때문에 결정을 망설이는 일은 없다.
그게 미리안이라는 사람이다.
그래도 지금 견하가 하려는 건…… 경우가 다르다.
죽여야만 하는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다.
죽음이 필요한 ‘일’이 있고, 거기에 적당히 맞춰서 ‘죽을 사람을 골라’ 죽이는 것이다.
견하는 일단 궁색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 사람들을 이용해서 칸발리크 사태를 해결할 거예요.”
“그 대답 듣자고 물은 게 아니라는 건 너도 알잖아? 아니면, 그런 대답밖에 내놓을 수 없는 거야?”
단숨에 꿰뚫고 들어온다.
어쩔 수 없다. 견하는 모두 답해주기로 했다.
게레센제 카간에게 들은 붉은 존재의 ‘출현 원리’.
붉은 존재를 사라지게 할 ‘해결책’.
그리고 들은 바를 응용한 견하의 ‘구상’.
이야기를 다 들은 리안의 눈이 커진다. 그 눈에도 망설임이 스쳐 지나간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라는 의미다.
견하는 이제 리안의 시선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본다.
견하가 생각한 대로, 리안은 경악 속에서도 ‘해야 할 일’을 구분해내고 실행에 옮긴다.
“그 방법 외에는 없는 거야?”
“제가 아는 한에서는요. 더 좋은 방법이 있었으면 싶지만.”
「쿠빌라이 문서」의 아직 발견되지 못한 부분에는 해결책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런 방법은 알려지지 않았다.
해결책은 후대의 연구자들이 ‘주석’으로 덧붙인 것밖에 없다.
고대 아즈텍 대륙의 어떤 도시가 정말로 ‘빛을 잃었을 때’ 쓴 방법.
중세와 근세에는 테노치티틀란이 권력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왜곡한 방법.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
“……직접 죽이진 않을 거예요. 아니, 애초에 죽이는 것도 아니지만.”
평범한 인간을 이단으로 만들 수 있듯이, 파멸인으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칸발리크에 테러를 일으킨 집단, 동명시 지하철에 괴물을 풀어놓은 자들이 했던 것과 거의 똑같은 일.
그렇게 해서, ‘붉은 존재’의 소환을 뒤흔든다.
“급속도로 증가한 파멸인은 이 세상이 적응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설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 위험해지겠지만, 동시에 ‘붉은 존재’가 온 저쪽도 위험해지겠죠.”
파멸인류는 그 존재 자체로 주변을 ‘자신이 온 세상’과 비슷하게 만들어 간다.
다른 세상의 ‘이’를 이 세상의 ‘이’에 덮어 씌우는 것이다. 당연히 세심한 작업이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수가 적절히 조절되지 못하거나, 작업에 뭔가 문제가 생기면 이 세상이 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붕괴한다.
붕괴는 이 세상에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붉은 존재를 소환하고 있는 상황에서, 붕괴는 원래 붉은 존재가 있던 저쪽 세상까지 영향을 끼친다.
물러나라는 협박이다.
물러날 거냐, 아니면 이대로 같이 파멸할까. 그런 도박이기도 하다.
“통할까?”
“통해야죠. ……만약 통하지 않는다면, 칸발리크 정도는 날아가지 않을까 생각되지만.”
그보다 피해가 더 클 수도 있다. 그러나 잠자코 앉아서 저 붉은 존재가 끝내 강림하고 마는 걸 볼 수도 없다.
“승인해주실 건가요?”
“다른 대안이 없다면야 승인해야겠지. 하지만 견하야.”
견하를 올려다보는 리안의 눈이 심하게 흔들린다.
내전을 시작한 직후, 도시에서 일어난 살육전을 목격하고 왔을 때와 똑같다.
“우리가 하려는 일은 명백한 악(惡)이야. 어쩔 수 없었다느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느니 그런 변명을 늘어놓는다고 악이 선이 되지는 않아.”
견하는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는다.
“끝까지 저항하는 한족 독립운동가들, 그 사람들 이번에 처리하면 제국의 안보 면에선 큰 짐을 더는 셈이지. 흉악범들? 그들도 그렇게 처리되는 게 당연할지도 몰라. 하지만 절대로 명심해. 우리는 정의를 집행하는 게 아니야.”
세상을 구했다느니 어쨌느니 하면서 악을 선으로 위조하지 말라.
악행을 저지르려거든 그것이 악행임을 분명히 알고 하라.
리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무게, 견뎌야 돼. 너도, 나도.”
말을 마치자 리안의 흔들리던 눈동자가 차분해진다. 견하는 그런 그녀의 등에 팔을 둘러 껴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목덜미에 입을 댄다. 가만히 숨을 들이켠다.
입술이 쇄골로 옮겨간다.
부드러운 입맞춤. 간지럽다.
리안은 조금 떨어질까 생각했지만, 그냥 이대로…… 견하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기로 한다.
소년이 그녀에게서 마음의 안정을 얻듯이, 그녀도 그의 이런 애정 표현에 만족감을 느꼈으니까.
***
‘혁명에 대한 혁명’이 시작됐다.
첫 봉기는 알타이 자유 공화국이 장악한 서부의 작은 도시들에서 일어났다.
이미 이 서부 지역에서의 봉기는 준비되어 있었다. 깡패 동무를 비롯한 혁명가들이 서부 국경지대를 돌며 끝까지 이를 감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카라코룸에도 불온한 분위기가 감돈다.
알타이 자유 공화국이 탄생했다고는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뭐 하나 나아진 게 없으니까.
계속되는 내전도 사람들을 지치게 한다.
신생 공화국 정부는 남부 전선의 안정, 동부 전선의 전진으로 안심하고 있다가, 갑작스러운 서부의 변란으로 혼란에 휩싸인다.
몽골 내전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