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없는 사람들의 교회(3)
깡패는 일단 잠자코 주견하의 말을 들어보기로 한다.
“말씀하신 우려들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난데없이 핵심을 파고들거나, 기습적인 제안을 하기.
상대의 의도를 충분히 꿰뚫어 보고, 불필요한 부분은 뛰어넘어 대화를 진전시키기.
여기에 약간의 ‘솔직함’을 더한다.
인정할 부분은 인정하고 협상에 임하는 것이다.
-상당히 유쾌한 화법을 구사하는군.
깡패는 이 소년이 마음에 들었다. 기분은 이미 협력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다만 이 유쾌한 대화를 좀 더 이어가고 싶을 뿐이다.
“볼로드 태사의 성향이 반드시 우리 태사 각하와 비슷할 거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직접 만나본 바로도 그렇고요.”
견하가 느낀 바에 따르면, 볼로드는 좀 더 완고한 사람이었다.
‘내전이 수습된 마당에 불평분자들에게 나눠 줄 지분은 없습니다’라고 딱 잘라 말할 것 같다.
게레센제도 마찬가지. 아니 애초에 게레센제는 이쪽 사상과의 타협에 익숙지 않다. 낭키아스나 키타이는 한족 대 몽골인이라는, 민족 간 대결 구도가 사회적 쟁점이다.
물론 이걸 지배 계급인 몽골인과 피지배 계급인 한족 간, 계급 갈등 구도로 해석하는 자들도 있지만 주류는 아니다.
따라서 게레센제는 애초에 이런 문제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터무니없는 소리’로 일축해버릴 가능성이 높다.
몽골 사회주의자들의 요구를 진지하게 들어줄 수 있는 건, 이런 문제를 다뤄 본 충분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 뿐.
“나는 여러분에게 의지하고 싶다고 제안하는 동시에, 여러분이 ‘우리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구도를 만들고 싶습니다.”
고려 감찰국의 제안에 몽골 사회주의자들이 한 걸음만 앞으로 다가서면 그렇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동맹.
즉, 몽골 사회주의자들이 전진하려면 루우 테무르가 일단 카간이 되어야 한다. 혹은 고려 제국최고회의 의장 미리안이 몽골의 실권도 장악하거나.
“따라서 우리는 여러분이 전에 했던 질문처럼, 우리 황제의 몽골 카간위 계승을 지지해달라 요청하는 바입니다.”
“우리의 투쟁도 두 단계에 걸친 투쟁이 되겠군.”
루우 테무르 앞에 게레센제라는 벽이 있는 만큼, 몽골 사회주의자들의 투쟁도 그 벽을 넘어야 한다.
고려 및 칸발리크 정부가 내전에서 승리하게끔 돕는 것이 첫 단계의 투쟁.
그 후 루우 테무르가 칸발리크 정권을 장악하게끔 돕는 것이 두 번째 단계의 투쟁이다.
“하지만 당신네가 제시한 것, 그런 험난한 과정을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매력적이오.”
그런데 나는, 하면서 깡패는 몸을 기울였다.
그 몸짓은 협상장에 나온 정치가가 아니라, 그 별명 그대로 거리의 거친 사내들이 보이는 몸짓에 가깝다. 반쯤은 위협을, 또 반쯤은 친근감을 뒤섞은.
“‘우리 같은 자’들과 손잡는데 어떻게 그렇게 망설임이 없는지 궁금하거든. 보통은, 그, 아시지 않소? 황제니 카간이니, 귀족이니 하시는 분들은 우리 같은 혁명가들을 싫어하는 법이지.”
어떻게 미리안은 사회주의자들과 손잡을 생각을 했는가.
그리고 주견하는 어떻게 사회주의자들에게 손을 내밀 생각을 했는가.
소년은 그저 눈썹을 끌어올린다. 소탈해 보이는 그 동작을, 깡패 동무는 놓치지 않고 관찰한다.
“제가 역사를 그리 잘 아는 건 아닙니다만, 바라트 공산당이 무굴 제국의 티무르 황실을 참살한 사건으로 인해 그런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된 게 아닐지……?”
이제 와서 황실 처형의 정당성이나 적법성 여부를 따지자는 건 아니다. 견하는 거기서 얻은 교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무굴 제국이 사회주의 사상가, 혁명가들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해서 그런 운명을 맞이했다고들 하지만, 저나 우리 태사 각하의 생각은 좀 다릅니다.”
제때 개혁을 했더라면, 사람답게 살 권리를 요구하는 백성들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끝장나진 않았을 것이다.
실로 간단한 결론이다.
황실의 위엄이라거나, 귀족의 특권 같은 어리석은 허영 몇 가지만 포기하면 살 수 있었다.
포기할 수 없는 이런저런 변명을 덧붙이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게 어리석은 판단이라는 오명을 벗을 순 없다.
“티무르 황실이라고 해서 특이한 결말을 맞은 건 아닙니다. 사회주의 혁명이 특이한 사례인 것도 아니고요. 그냥 백성을 만족시키지 못한 왕조가, 백성에 의해 멸망당했다, 그뿐.”
무수히 많은 왕조가 그렇게 망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자기네 혁명이 뭔가 특수한 역사의 전환점인 양 이야기하지만, 그 혁명도 그저 전 세계 왕조들이 멸망해왔던 걸 재연한 자연스러운 현상.
아이러니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그 혁명이라는 게 역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 정권의 통치나 왕조가 멸망하지 않을 방법을 골랐을 뿐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당신들과 이렇게 손을 잡고, 향후 각종 개혁에 착수하는 거고요.”
깡패 동무는 일단 그걸로 납득하겠다는 듯 끄덕인다. 이 동맹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럭저럭 건전한 관계를 구축할 수는 있을 듯하다.
“그러면 어떻게 고려의 황제께서 카간위까지 나아가시느냐…… 하는 문제가 남았군. 나는 우리 당의 역량을 잘 아오. 그러니까 우리가 그쪽에 힘을 보태주면 적지 않은…… 아니 꽤 큰 힘이 되겠지. 그런데 그게 지금 게레센제 카간을 끌어내릴 만큼 큰가, 하면 솔직히 회의적이오.”
깡패는 다른 어린 동무들과 다르게 당에 대해 현실적인 평가를 한다. 혁명가의 열정과 피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미신은 결코 믿지 않는다.
“다른 수단이 더 필요할 거요.”
“예. 우리도 생각해둔 바가 있긴 합니다. 그래도 일차적으로는 그쪽의 힘을 빌려서, 각종 선전작업을 해둬야 하죠.”
“선전작업이라고 한다면……?”
“몽골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루우 테무르 황제다. 그런데 억울하게도 숙부 게레센제에게 카간 자리를 빼앗겼다…… 이런 내용으로 말이죠. 그쪽에서 찍어내는 지하 신문을 활용한다면 그런 민심을 만들어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요.”
칸발리크 정세에 깊숙이 개입할 수 있는 루우 테무르나 고려 측 인사들이 그 지하 언론을 ‘합법’이라는 양지로 끌어올려 주기까지 한다면, 파급력은 상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제안에도 아직, 깡패 동무는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나 완전히 ‘없는 사실’을 선전할 수는 없소.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어설픈 수작은 금방 들통나는 법이지. 즉, 고려 황제가 공을 세웠는데 억울하게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라고 하려면, 정말로 뭔가 ‘공적’은 필요하다는 거요.”
깡패는 먼발치서 본 칸발리크의 모습을 떠올렸다.
도저히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검은 기둥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다.
만약 그 광경을 꿈에서 봤다면 개꿈이라 생각했을 것이고, 그림으로 봤다면 좀 특이한 주제 의식을 지닌 화가의 작품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 열차가 들락거리며 물자와 사람이 오가는 것도, 그 안에 사람이 아직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어쨌든 그 사태를 좀, 어떻게 해봐야 선전이고 뭐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 방법도 이미 마련해뒀습니다. 칸발리크 사태는 곧 해결될 겁니다.”
“‘곧?’”
“네. 유감스럽게도 그 구체적인 방법까진 알려드릴 수 없겠습니다만.”
도저히 이 세상에서 일어난 현상이라 믿기지 않는 사건이다. 당연히 그 해결법도 뭔가 기이한 것이겠지. 그걸 비밀에 부치는 것도 이해는 간다.
“논의할만한 이야기는 다 나온 것 같군. 이제 나는 오늘 나눈 이야기를 당 중앙위에 올려서 결과를 기다릴 거요. 긍정적인 답이 나올지, 아니면 그냥 없던 일로 칠지는 중앙위가 결정할 몫이지.”
“그래도, 긍정적으로 검토되도록 의견을 덧붙여주실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깡패와 주견하는 마주보고 씩 웃는다.
“고려의 황제와 태사께서 뜻한 바를 이루실 수 있길 바라겠소.”
“언젠가, 칸발리크의 정가에서 다시 뵐 날을 기다리죠.”
***
회담장을 나서며 깡패는 몇 가지 판단을 재빨리 수정한다.
먼저 이렇게 몽골의 사회주의자들과 손잡고 고려 황제를 몽골 카간 자리에 올려놓는 계획은…… 태사부나 정치경찰실 보다는 감찰국이 주도하는 사업인 듯하다.
주견하는 회담 중에 이따금, 태사나 황제가 아니라 ‘자신’이 주체인 양 말한다.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단순히 명령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인간은 아니라는 거지.”
오늘 회담장에 나온 감찰국장 본인이 주도하는 계획.
이 정도 되는 계획을 세우고, 저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인간이라면, 좀 더 높이 평가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적대하게 된다면 상당히 골치 아플 거고, 동맹 관계를 유지한다면 꽤 쓸만하겠지.
또 한 가지 주의할 부분은, 결국 모든 계획이 성공을 거두고 나서 ‘벌어질 일’이다.
루우 테무르가 몽골 카간위를 계승한다…… 그러면 고려와 몽골은 ‘동군연합’이 된다.
진짜 문제는 그 이후다.
동군연합이 된 두 나라의 관계는 어떻게 정립될 것인가.
그저 같은 군주를 모시는 사이좋은 동맹국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고려인들은 끝없이 그 야망을 드러내며 몽골의 정치와 주권마저 삼키려 들 것인가.
느슨한 연합체를 만들 것인가, 혹은 완전한 합병을 노리는 것인가.
잘 계산해야 한다.
혁명도 좋고 노동자 해방도 좋다. 그러나 세계 혁명도 혁명이 일단 정착한 나라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거기서부터 퍼진다.
주권이 온전한 하나의 나라. 그것이 없다면 혁명은 그저 매국에 지나지 않게 된다.
“언젠가는 이 문제를 놓고 충돌하게 될지도 모르겠어…….”
아니, ‘모르겠어’가 아니다. 충돌은 반드시 일어난다.
이 동맹은 도저히 영원할 수가 없다. 주견하가 몽골과 고려의 미래 관계에 있어, ‘말하지 않은 계획’이 있다고 봐야 한다.
그건 지금 칸발리크에서 벌어진 기괴하기 짝이 없는 사태와, 고려 내부의 정세까지 뒤얽힌 복잡한 계산식일 터.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보겠다고, 수많은 정파들이 달려들 게 뻔하다.
그때 우리들은 어떤 모습으로 새로운 몽골에 서게 될까.
고려의 동지들처럼 입법부의 의원으로, 관료로 정장을 빼입고 살아갈까?
그때도 혁명가로서의 모습과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 알 수 없는 미래를 대비하려면 열심히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야 한다. 그 길 외에는 없다.
만약 충돌이 적절한 타협으로 마무리된다 해도…… 그건 또 그것대로 문제다.
고려의 사회주의자들처럼 군주의 존재를 인정한다. 군주정 속에서 살아간다. 물론 민주적 요소가 도입된 입헌군주정이라고는 하지만, 바라트가 제시한 노선에서는 크게 벗어나게 된다.
“노선을 확실히 정해야겠지.”
바라트 공산당과는 결별하고,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갈 것인가.
더는 답변을 미룰 수 없는 질문이 눈앞에 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