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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206화 (205/541)

회수대치(15)

타이시 볼로드는 현 몽골 정부 내에서 루우를 지지해주는 세력이다. 그를 타이시에서 물러나게 할 수는 없었다.

“타이시 자리는 숙부께 내어드릴 수 없어. 키타이 영지의 보유, 지금까지 누렸던 것과 같은 자치는 보장해드릴 수 있지만.”

키타이 측 사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당장이라도 일어날 기세다.

협상을 질질 끌기는 해야 하지만 아예 파탄 낼 수는 없었던 루우는, 여기서 한 가지 제안을 꺼내보기로 한다.

본국의 리안이 안세규와 협력할 때 어떻게 했는지를 참고해서.

“대신 내무장관 자리 정도면 어때? 행정 쪽이 아니라 군사 분야에 관여하고 싶다면 전쟁성도 괜찮아. 물론 우리도 장관 자리를 내어주는 만큼…… 키타이의 ‘다이온 연방’ 참여를 또 다른 조건으로 내세우고 싶은데.”

그 정도 선에서라면 짐이 볼로드 타이시와 게레센제 숙부를 설득해볼 수 있어, 라고 루우는 덧붙였다.

키타이 측 사절은 고민한다.

루우 테무르의 말이 옳다. 고려와 몽골은 아쉬울 게 거의 없다. 있다면 몽골 본토와 낭키아스 간 영토 연속성이 없어진다는 것 정도일까.

키타이는 회수, 칸발리크 전선에 이어 서쪽의 한족 봉기까지 삼면 전선을 감당할 여력은 없다. 아직 한족 봉기 세력은 소규모지만 방심하면 금방 어마어마하게 불어난다.

까딱 잘못하면…… 키타이 정권 자체가 무너진다.

이쯤에서 화해하면 성과가 없는 건 아니다. 울제이가 키타이 칸과 타이시를 겸하면 가장 좋았겠지만, 타이시가 아니라 내무장관이나 전쟁장관이어도 중앙 정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도 위험성이 없는 건 아니다.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꼴이 되는 거니까. 게레센제와 루우 테무르가 관할하는 땅에 거의 무방비로 들어가는 것을 대가로, 중앙 정계에 진출해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다.

어찌할 것인가.

고민하던 사절은 결론을 잠시 미루기로 한다.

“제가 함부로 결정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저희 칸의 의견을 묻고 오겠습니다.”

루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결정 내리라고 재촉할 이유는 없었다.

***

울제이의 결단은 빨랐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나.”

아무런 고뇌도 후회도 없는 담담한 말. 그러나 신하들 앞에서 감췄을 뿐 울제이의 가슴은 요동친다.

뭐가 어디서 어떻게 잘못된 건지.

틀림없이 카간의 자리에 바짝 접근했다고 생각했건만, 어느새 루우 테무루의 의도대로 놀아나고 있지 않은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골라도, 그건 루우 테무르가 바라는 바다.

울제이는 쿠빌라이 카간과 그 동생 아릭부케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서로 자기가 카간이 되겠다며 각자 쿠릴타이를 개최하고, 서로를 참칭자로 몰아 전쟁까지 벌였던 형제.

그때는 제삼자의 개입 없이 쿠빌라이 카간 쪽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만약 강력한 제삼자가 나타나 형제의 싸움이 개입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루우 테무르는 울제이와 게레센제를 아릭부케와 쿠빌라이 형제가 그러했듯이 갈등하게 만들고, 그 상황을 실컷 이용해먹을 생각이다.

그리고 자신은 제삼자가 되려 하겠지.

울제이는 루우 테무르의 의도를 꿰뚫고 있다.

게레센제도 마찬가지로 루우 테무르의 의도쯤이야 꿰뚫고 있겠지.

하지만 말려들지 않을 수도 없다.

게레센제가 카간이 된 지금, 울제이가 게레센제와 다시 손을 잡는다는 선택을 하기도 어렵다. 게레센제를 도와 루우 테무르 세력을 몰아내면 게레센제의 황권만 강력해질 뿐이다.

“탓할 수는 없겠지.”

조카에게 화는 나도 ‘하지 말라’고 타이를 수도, ‘나쁘다’고 비난할 수도 없다. 그 아이 역시 보르지긴, 가문과 국가의 정점에 서고 싶어하는 건 당연하다.

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느냐고 떼를 쓰기보다는, 역시 보르지긴답게 돌파구를 찾아 움지여야 한다.

“협력과 견제를 동시에, 라.”

일단은 루우 테무르에게 협력적으로 나가면서 게레센제를 카간 자리에서 퇴위시키는 데 집중한다. 그러면서도 루우 테무르가 압도적으로 강해지지 않도록 충실히 견제하며 자신의 세력을 쌓아 올린다.

통탄할만한 일이지만, 여기선 자신과 키타이의 역량을 보여준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일단은 형님에게서 낭키아스 영지를 빼앗는 걸 목표로 해야 할까.”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싸움을 해나가야 한다.

“원래 그런 싸움 아니던가.”

***

-울제이가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고려군도 몽골군도 환호하며 남부 전선 쪽 전력을 북쪽으로 돌려, 반군과의 전선에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조유관도 휘하 부대를 재편해 반란군에 대한 반격을 준비했다. 그러나 한창 준비에 열을 올리던 조유관에게, 동명에서 또 다른 명령이 내려왔다.

-육군 대장 조유관은 수도로 복귀해 외무장관의 직분을 맡을 것.

갑작스러운 명령이었다.

조유관도, 칸발리크에 있는 고려인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명령.

다만 이런 명령을 내린 미리안의 의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외무장관 임명과 동시에, 전역할 것도 명하고 있었으니까.

-조유관을 군에서 분리하려 한다.

누구라도 그런 의도를 느꼈다. 안세규를 내무장관으로 보내서 외무장관 자리가 비었다는 건, 그냥 구실이다.

애초에 외교와는 별 상관도 없는 군인을 데려다가 외무장관으로 임명한다는 것 자체가, 이 명령이 그저 구실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물론 조유관이 극북방위군을 이끌면서 아즈텍군 고위 인사들과 다소 안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서부군을 이끌면서도 몽골군과 교류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동명의 태사부에서 내려온 명령은 그런 경력을 높이 평가한다고 했지만, 그게 외무장관의 자질이라기엔 부족하다는 건 태사 본인이 가장 잘 알 터.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의도가 저렇게 명백한데 외무장관 자리를 고사하면, 태사부는 ‘다음 단계’에 착수할 것이다.

그 ‘다음 단계’ 집행을 위해 준비한 게, 바로 ‘고려군의 해외 주둔 제한에 관한 법’.

이 법은 고려가 영토확장의 폭주 기차를 타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졌지만, 동시에 고려군 자체를 태사의 강한 통제하에 두기 위한 장치였다.

따라서 태사는 조유관이 순순히 군복을 벗지 않을 경우 ‘숙청’의 단계로 넘어갈 것이다.

조유관의 머리는 기민하게 굴러간다.

군 경력이 끝난다고 해도 마냥 절망할 일은 아니다. 조유관은 자신이 바라던 ‘중앙 정계’로의 진출을 이룬 셈이니까.

다만 중앙 정계에서 안세규나 미리안의 뜻대로 놀아나다, 각료 자리에서도 밀려나는 결말은 피해야 한다. 그러면 정말로 연금이나 받아먹는, 위험성도 없지만 영향력도 없는 늙은이가 되어버린다.

-이왕 외무장관이 된다면, 그 자리를 굳혀야 한다.

그래서 조유관은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

‘귀국하기 전에 황제 폐하를 한 번 더 알현한다’는 명목으로 루우를 만나러 온 것이다.

“저를 지켜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정계에서 폐하가 쓰실 장기말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상황이 급하다. 빙빙 돌리고 이리저리 재보고 할 시간은 없었다. 요구사항과 대가를 바로 내놓는다.

루우는 빙긋 웃었다. 이는 루우에게도 하나의 기회였다.

“안 장관에게 전보를 보내죠. 그리고 동명에 도착하면 곧바로 감찰국장을 찾아가도록 해요. 주 국장이 도와줄 거예요.”

***

이 소년은 언제 이렇게 성장했을까.

체격이 성장했다는 말이 아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부모를 잃고 넋이 나간 아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 류성일의 눈앞에 있는 소년은 기품, 총명함, 날카로움, 식견, 악의, 잔혹성, 교활함, 통찰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그 나이 또래를 뛰어넘는다.

아니, 주견하 정도의 경지에 이른 성인도 흔치 않다. 이미 웬만한 성인은 압도하고도 남는다.

-그때, 내가 주견하에게 뭐라고 했었지.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더 생기는 걸 막기 위해서든, 부모의 복수를 위해서든…… 태사 각하를 잘 모시라고 했었지.

그 말 한마디가, 이런 괴물을 만든 것은 아닐까.

주견하는 더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부모의 원수를 날려버리기 위해 보통 소년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과정을 거쳐 여기에 왔다.

처음 감찰국장이 법무장관에게 면담 신청을 했을 땐, 올 것이 왔나 싶기도 했다.

그날 밤, 견하의 집에 암살자를 보낸 게 자신이라는 걸 결국 감찰국장이 알게 되었구나 하고.

이단이 된 주견하에겐 어떤 위협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류성일은 자결용 약까지 준비했다.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싶진 않으니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주견하는 아직 모르는 듯하다. 그런 용무로 온 것은 아니었다.

“오늘 법무장관님께 두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호오, 주 국장이? 나한테 부탁할 일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지…….”

“지금 수감되어 있는 비전향 한족 독립운동가들 전원, 그 외에도 사형을 앞둔 흉악범들을 전원 넘겨주셨으면 합니다.”

“전원?”

“칸발리크 사태 해결을 위해 필요합니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이유를 물으려는 류성일의 말을, 주견하는 앞질러 잘랐다.

“그게…… 내가 아는 바로는 칸발리크에서 일어난 일은 초자연적 현상이라고 하던데. 그걸 해결하는 게 죄수들하고 무슨 관련이 있나?”

“그건 기밀입니다. 몽골과 고려 사이의 동맹 유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정도로만 알려드리죠.”

류성일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주견하의 얼굴을 살핀다. 표정이 없다. 의도도 감정도 읽을 수가 없다. ‘필요한 사무적 절차’를 수행하러 왔을 뿐이라는 듯한 얼굴.

다시 말해, 그 절차를 방해하면 ‘다음 절차’를 밟겠다는 얼굴이다.

‘미리안의 사냥개’라는 별명을 지니게 된 시점에서, 이미 이 소년을 설득하거나 역으로 이용해 볼 수는 없게 됐다. 여기서 쓸데없이 미적거리다간 사냥개가 추적을 시작한다.

사냥개가 냄새를 맡다가 뭔가를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류성일은 물론 안세규도 끝장이다.

“인계 방안을…… 검토해보겠네. 그럼 두 번째 부탁은 뭔가?”

“사회민주당 및 공산당과의 자리를 좀 주선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쪽으로도 인맥이 있으시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기밀인가?”

“아, 이건 사정을 좀 설명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 몽골 내 사회주의 계열과 연결을 꾀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카라코룸에서 또 다른 혁명을 일으켜, 몽골 반군을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작전을 짰죠.”

혁명에 대한 혁명. 안 그래도 불안정한 신생 정부는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가능성이 있다. 주견하는 이런 작전까지 입안할 정도가 되었구나.

“그 건 좀 더 쉽다고 할 수 있겠네. 옛 제자들을 통하면 될 테니까.”

그렇게 답해주면서, 류성일은 생각한다.

얼마 전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루우의 몽골 황위 계승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냈었다.

비록 루우가 일단은 자기 숙부에게 카간 자리를 양보하긴 했지만, 성명을 냈다는 사실 자체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런 자들과 연계에서 작전을 꾸린다.

-주견하의 뒤에는, 폐하가 있는 건가.

***

생각보다 쉽게 류성일의 승낙을 얻어냈다. 법무성 건물을 나서는 견하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밖에서 대기하던 지나와 함께 차에 오르려다, 문득 견하는 걸음을 멈췄다.

지나는 그의 눈이 사납게 날카로워지는 걸 보았다.

그 눈이 법무성 건물을 훑고 있다.

갸웃.

“류 장관, 왜 순순히 말을 듣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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