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205화 (204/541)

회수대치(14)

알타이 자유 공화국의 통령, 무에투켄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 인자한 미소가 계략이 성공한 쾌감에서 나온다는 점은 아이러니하지만.

그래도 인자해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무에투켄 뿐만 아니라 각료들도 환호했다.

“한족 폭도들이 도움이 될 때가 있다니, 적과 아군의 관계는 시시각각 바뀌는 거라지만 신기하군요.”

“이로써 전선에도 다소 여유가 생길 겁니다. 더더욱 공화국의 체제를 보강할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국제 사회에서 정식 국가로 인정을 받는 걸 목표로 삼아야겠죠.”

무에투켄은 흠…… 하고 긴 숨을 내쉬었다. 다들 정계 원로이자 현 공화국 통령의 말을 경청한다.

“가장 이상적인 결말은 칸발리크의 구체제를 끝내고 통일된 몽골인들의 공화국을 건설하는 걸 겁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어렵다. 이미 고려가 내전에 깊숙이 개입한 상황에서, 고려군과 몽골 제국군을 모조리 꺾어버리고 승리를 거머쥐는 기적을 바랄 순 없다.

적절한 선에서의 타협.

그러니까, 이대로 내전을 계속해봤자 이득이 없다는 점을 저들이 깨닫게 해야 한다.

“우리는 새로운 수도 카라코룸을 중심으로 한 독립 공화국을 건설하는 걸 일차적인 목표로 합시다. 어쩌면 통일 몽골은 뒷세대의 몫이 될 수도 있겠군요.”

공화국 건설이 먼저.

민족 통일은 이후의 과제로.

현실적인 안이다. 그러나 범 알타이 인민동맹 출신 관료들은 노골적으로 불만에 찬 표정을 짓는다.

이들에겐 일단 통일된 몽골 민족 국가 건설은 ‘첫 단계’였으니까. 그보다 퇴보한 것을 첫 단계로 받아들일 순 없었다.

“통령 각하, 그래선 우리 공화국은 내륙국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칸발리크와 카라코룸을 잇는 축을 중심으로 성장한 몽골 민족의 경제도 망가지겠지요. 분열 이후 공화국과 구 제국 사이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말 겁니다. 우리는 최소한의 목표로 ‘완전히 통일된 공화국 건설’을 잡아야 합니다.”

무에투켄 통령은 그 관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인자하다고 정평이 난 그답게,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관료에게 조곤조곤 묻는다.

“그렇다면 그런 목표를 달성할 ‘현실적’인 방법은 있습니까?”

“있습니다. 확실한 군사적 승리, 그것을 동부 전선에서 선보여 고려군이 본국 방어를 위해 물러설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범 알타이 인민동맹은 신생 공화국의 무력 기반을 제공한 집단이다. 자연히 그들은 군사 관료 자리를 차지했고, 따라서 군사 관련 의견을 내면 통령이라 해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지금 고려가 마음 놓고 내전에 개입할 수 있는 것은, 본토가 위협당할 가능성이 적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토가 위협당하게 된다면, 그것까지 감수하면서 내전 개입을 지속하진 않을 겁니다.”

개입을 지지하는 고려 국내 여론도, 본토에 직접적인 피해는 없어서 높은 것이다. 당장 본토가 위협당하면 괜히 개입했다는 여론이 높아질 것이다. 인민동맹 출신 관료들은 그렇게 내다봤다.

“좋소. 그 전망이 옳다면 시도해 볼 가치는 있겠지. 허나, ‘확실한 군사적 승리’라는 장담은 구체적인 작전으로 뒷받침되어야 하는 법. 어떤 작전이오?”

“우리의 동부 전선은 고려 측 서북부군과 맞서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동부에서 수세로, 남부에서 공세로 나서면서 ‘칸발리크를 노린다’는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만, 이를 뒤바꿔 적에게 큰 충격을 줄 계획입니다.”

즉, 고려군과 몽골 제국군 모두 옹구차트-새너두에 공화국군이 공세를 가할 거라 믿는 상황을 이용한다는 말이다.

기갑사를 보유했음을 일부러 보여줘서 그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르렀을 터.

반대로 동부에서는 수세로 김천열의 공세를 막아내면서, ‘여기는 약하다’는 인상을 심어줬다.

“기갑사 뿐만 아니라, 전차를 비롯한 기존 기갑 전력, 포병 전력을 최대한 동원해 동부 전선을 돌파해야 합니다. 커다란 전과를 올리는 데 집착할 필요는 없지만, ‘본토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는 인상을 확실히 심어주는 게 중요합니다.”

가능성 없는 계획은 아니었다. 무에투켄 통령은 천천히 끄덕임으로써 그 계획을 승인했다.

“하지만 무리하게 공세를 밀어붙이지 마시오. 칸발리크 정부는 패배해도 기댈 고려나 낭키아스가 있지만, 우리는 패배하면 그걸 만회할 방법이 없소.”

***

“어쩌면 재연이 네 통찰이 정확할지도 모르겠어.”

견하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오랜만에 순수하게 친구에게 던지는 칭찬이었다.

“극단주의자들은 쉽게 ‘다른 극단주의’로 옮겨간다는 거?”

“그래. 그들에게 필요한 건 결국 ‘이상을 이룰 힘’이지 ‘이상이 이루어진 세상’이 아니거든. 그 힘을 ‘폭력적’으로 다룰 수 있다면 어떤 집단이든 좋은 거야.”

그래서 공산주의자는 손쉽게 파시스트가 된다.

파시스트가 손쉽게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마찬가지로 폭력으로 공산주의를 억눌러야 한다는 자유주의자는 파시스트가 되기도 하고.

“내가 일부러 루우를 미끼로 던진 건 아니지만, 저들은 루우를 미끼로 간주하고 덥석 물었지. 이 상황, 한껏 활용해볼 만하지 않을까.”

본래 군주정과는 거리가 먼 집단이, 권력 획득을 위해 군주정 지지를 선언했다.

그렇다면 고려 내 사회주의 계열을 징검다리 삼아, 몽골 내 사회주의 계열의 군주정 지지 약속도 받아낼 수 있지 않을까.

견하는 몽골의 사회주의자들이 했던 생각을, 역으로 비슷하게 해내고 있었다.

“가능성은 있다고 봐.”

재연은 견하의 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내전 시기에 현 정권을 지지해준 사회주의 정파들에게 상당한 이권을 약속했듯이, 몽골 내 사회주의 정파들도 칸발리크 정부를 지지해준다면 그만한 대가를 주겠다고 약속하는 거지.”

실제로 그 약속을 지킨 사례가 있다.

설득에 필요한 신용 확보는 그다지 어렵지 않을 터.

“문제는, 태사 각하께 어떻게 비칠까 하는 건데.”

그렇게 말하며 재연은 견하의 눈치를 살폈다. 분명 지난번에 상당한 질책이 받았다. 여기서 사회민주당이나 공산당과 접촉하는 건, 사상 문제를 넘어 태사의 발목을 잡겠다는 의사로 비칠 수 있다.

“이번에는 ‘사전 설명’을 드려야지. 몽골 쪽 사회주의 계열과 연대해, 그 신생 공화국인가 뭔가를 내부에서 뒤흔든다고.”

거짓 없는 사실이긴 했다. 일차적인 목표는 몽골 내전의 이른 종결이다.

알타이 자유 공화국의 혁명에 대항해 내부에서 또 다른 혁명을 일으킨다.

안팎으로 흔들면 무너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동시에……

“교묘한 줄타기가 필요하지.”

“‘게레센제 칸의 공적’으로는 돌아가지 않도록 말이지.”

“일말의 불안감을 심어줘야 해. ‘루우 테무르는 약속을 지켰지만, 게레센제는 약속을 지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게레센제에게는 이 계획을 알리지 않는다. 철저히 소외시킨다.

내전의 종결도, 내전 후 새로운 권력 질서의 확립도 루우 테무르와 고려의 몫이어야 한다.

그가 쥘 수 있는 영광은 ‘그래도 한 번은 카간을 해봤다’는 것 정도. 루우의 공을 인정해주면서 그녀의 명성을 드높이고, 순순히 양위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이 ‘양위’ 과정에서 몽골의 사회주의자들이 우리 황제를 지지하도록 해야지.”

조각은 맞춰진다. 톱니바퀴는 맞물려 돌아간다.

재연의 생각은 구체적인 실행 방안으로 옮겨갔다.

“안세규 내무장관을 통한 경로가 가장 빠르겠지만, 그 사람이 이 일에 협력해 주진 않겠지.”

“지난 몇 달간 우리 움직임은 안 장관에겐 선전포고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러니 다른 경로로 접촉해야지.”

두 소년은 빠르게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류성일 법무장관. 이 사람이라면 그래도 말이 통하겠지.”

“좋아. 이 안은 류 장관과 이야기해보면서 처리하고, 수영이랑 지나한테 맡겼던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재연의 얼굴에 알 듯 말 듯 한 미소가 지나간 듯하다…… 고 견하는 느꼈다. 눈으로 포착한 건 아니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이 녀석, 아직도 내전 때 한족들 처형하던 그 습성은 못 버린 게 아닌지.

“발해도 쪽에는 연락을 넣어서 체포된 무장 독립운동가들을 따로 분류해 놓고 있는 모양이야. 넘겨달라면 넘겨주겠지. 하지만 본토의 비전향 독립운동가들은…….”

법무성 장관의 관할이다.

“이것도 류 장관과 담판 지어야 하나.”

요구사항이 많아지면 협상이 힘든데. 견하는 살짝 불평해본다.

“비상상황이라는 점을 밀어붙이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그 ‘비상상황’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어떻게 말하겠는가.

한족 독립운동가. 물론 그들은 고려의 반역자다. 간혹 사형 판결이 나와 집행까지 이르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그냥 수감 생활을 하다 나온다. 그러다 전향하는 사례도 있으니까.

전향을 선언하지 않더라도 그냥 의욕을 잃어버리고 일반인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런 사람을 싹싹 긁어모아 차라리 사형당하는 게 나았을 처지로 만들어버리겠다는 말은, 쉽게 할 수가 없다.

“사기를 좀 쳐야 할지도 모르겠군.”

이미 몇 번째일지 모를 사기를 거듭해왔지만, 새삼스레 견하는 중얼거린다.

***

북방에는 겨울이 좀 더 일찍 찾아든다.

낭키아스는 소수의 부대나마 서남부로 돌려서 한족 반군과 대치, 산발적인 교전에 들어갔다. 고려군은 낭키아스 쪽으로 추가 파병 준비를 마무리해 간다.

더 이상의 세력 확대가 어렵게 되자, 한족 반군은 조유관이 예상했던 대로 낭키아스 주변국으로 눈을 돌렸다.

국경을 넘어, 그 지역 독립운동가들과 연계한다. 무장봉기를 지도한다.

그래도 티베트, 탕구트, 보우슈엥, 대예 등 국가에는 아직 치명적인 봉기로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그러나 각 전선으로 전력을 집중시킨 키타이는 아니다.

서남부에서 시작된 한족의 봉기가 서서히 확대되며 수도 개봉의 불안을 부채질하고 있다.

그 불안을 반영하듯, 루우와 협상을 벌이는 키타이 측 사절의 어조도 한층 누그러졌다.

“고려 황제께선 우리 칸과 새 카간의 만남을 주선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루우는 능란하게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짐이 그래야 할 이유가?”

“이대로는 공멸할 뿐입니다. 키타이가 무너지고 그 자리에 한족의 독립국가가 건설되면, 새로운 태평천국이 탄생할 겁니다. 고려에도 몽골에도 좋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키타이와 한족 반군이 싸우다 지치면 그 사이에 이익을 취한다는 선택지가 있는데?”

보다 손쉽게 울제이의 영토를 삼킬 기회라는 식으로 약을 올린다.

하지만 키타이 측 사절도 만만치는 않다.

“몽골과 고려에 그 정도 여유는 없는 걸로 압니다. 일단 몽골 내부의 반군도 진압되지 않은 상황이잖습니까.”

“반란은 곧 진압돼. 한족이 키타이를 무너뜨린다고 해봤자 바로 체계 잡힌 나라를 만들 순 없어. 혼란의 연속일걸. 우리는 질서를 재확립한다는 명분으로 얼마든지 개입할 수 있고.”

일단은 허세다. 당장은 그럴 여유가 없다는 키타이 측 주장이 옳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 노려본다.

이윽고 키타이 측에서 한발 물러선 협상안을 내놓는다.

“좋습니다. 쿠릴타이를 새로 열자는 요구는 철회하죠. 지난 쿠릴타이의 결과, 새로운 카간의 즉위를 인정하겠습니다.

대신 현 타이시인 볼로드가 사임하고 우리 칸이 새로운 타이시를 겸직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