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수대치(13)
신수덕 앞으로 끌려온 사람들의 출신은 다양했다.
현 정권의 정치경찰로, 몰래 ‘철혈의 꽃’을 염탐하던 자.
사회주의 활동가로, ‘철혈의 꽃’의 폭력단과 살육전을 벌이던 자.
이중 첩자…… 아니 어쩌면 삼중 첩자일지도 모를 자.
그들 모두가 겁먹은 얼굴로 신수덕 앞에 묶여 있다.
단순히 적에게 끌려온 것이라면 의연한 태도를 보인 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포로로 끌려와 심문을 받는’ 상태가 아니다.
그들 눈앞에는…….
“이 괴물들은 파멸인이라고 하지. 우리는 모르는 먼…… ‘다른 세상’에서 온 존재들이네.”
난생처음 보는 괴물들.
하얀 몸, 뒤틀린 사지, 기묘하게 웃는 얼굴.
그것들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포로들 앞에 서 있다.
“안심하게. 당장 이것들이 자네들을 해치진 않을 거야.”
신수덕은 유창한 아즈텍 연방 공용어를 신사적으로 늘어놓는다. 하지만 포로들에겐 그 신사적이고 침착한 어조가 소름끼치게 들릴 뿐이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안다면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건만, 모르니까 그저 무서워할 수밖에 없다.
“자네들을 여기까지 살려서 끌고 오는 데 꽤 애를 먹었네. 혹여라도 ‘철혈의 꽃’의 거친 활동가들이 자네들을 죽이진 않을까 염려스럽기도 했고. 죽이면 도저히 쓸 수가 없으니까 말이지.”
그리고 ‘잘못된 목표물’을 가져올까 두렵기도 했다. 무고한 희생은 봉기의 그날까지 최대한 삼가야 한다. 철혈의 꽃은 ‘억울하게 당하다가 반격하는’ 위치에 있어야 했다.
그런 정치적 조건들까지 맞춰서 신수덕이 요구하는 ‘재료’들을 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신수덕은 수고해 준 대원들에게 간단하게 예를 표했다.
다시 포로들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자네들에게 어떤 쓸모가 있는가 하면…… 뭐 학교 수업도 아니고 설명해줄 필요는 전혀 없지만, 일단 나도 이야기하면서 뭔가 빈틈은 없는지 검토해보는 거니까.”
잠깐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론으로만 알고 있던 걸 실제로 적용해 볼 생각이네.”
거짓말은 아니었다. 신수덕의 아즈텍 행은 ‘미리안 정권을 피한 망명’이었다. 그러나 굳이 망명지로 아즈텍을 택한 건 ‘뭔가 시험해보고 싶어서’라는 이유였다.
「쿠빌라이 문서」에 적혀 있을 뿐, 아직 실험으로 증명되지 못한 것을.
“중세 도시국가들의 맹주, 테노치티틀란은 ‘인신 공양’으로 악명이 높았지.”
틀락스칼라 혁명 이후, 아즈텍 연방은 인신 공양을 강요하던 역사와 종교를 ‘야만’으로 규정하고 철저히 없애 왔다.
사실상 옛 문명 자체를 대대적으로 파괴하는 작업이 이어졌고, 인간 제물들의 피 대신 사제들의 피가 도시를 적셨다.
그 뒤에는 다른 ‘평화적’이고 ‘문명적’인 문화의 강제 이식. 서쪽 일본계 이주민들의 불교나 동쪽 식민지인들의 크리스트교에서 참조한 요소들을 가져다 ‘새로운 아즈텍 문화’를 창조해내려 했다.
수백 년의 작업은 나름 성공적이었고, 인신 공양은 없어졌다. 이제는 괴담에나 나오는 구역질 나는 과거일 뿐이다.
그러나 ‘기록’은 남는다.
“옛 테노치티틀란의 사제들은 인신 공양을 함으로써 ‘내일도 태양이 뜨도록’한다는 이유를 댔지. 물론 혁명가들은 인신 공양 없이도 태양이 뜨는 걸 보여주고 사제들의 말이 전부 미친 사기극이었음을 드러냈지만…… 그런데 말일세.”
거짓말에는 일말의 진실이 섞여 있는 경우도 있다.
사기는 그럴싸한 이론적 기반을 두고 벌어진다.
신화에는 원형이 있다.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네. 정말로 ‘해가 뜨지 않던 시절’도 있지 않았을까, 하고. 지금 저 멀리 몽골의 수도 칸발리크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말이야.”
하늘에 뜬 악마를 물리치고.
낮에도 시꺼먼 하늘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
그런 작업이 필요했던 시절이 분명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일식에 대한 과장된 공포’ 운운하지만…… 일식은 그렇게 길게 가지 않아. 일식에 대한 공포는 일식이 끝나면 사라지지. 그렇다면 ‘태양빛을 다시는 잃지 않으려는 끈질긴 시도’는, 과연 일식에 대한 공포라 할 수 있을까?”
일부러 말을 천천히 끈다.
신수덕은 단순히 설명을 늘어놓는 게 아니다. 그는 이 설명을 듣는 포로들의 표정 변화를 즐기고 있다.
공포가 서서히 덮치는 광경을, 사람의 표정이라는 물리적 현상으로 관측할 수 있다. 실로 즐거운 유흥이 아닐 수 없다.
한때 전쟁 영웅이었던 남자는 이 지경까지 왔다.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지금부터 시험해보겠네.”
신수덕은 괴물들과 포로들 사이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다.
단검을 휘둘러 파멸인의 살점을 한 조각 잘라낸다. 파멸인은 잠든 듯 조금도 반응하지 않는다.
순식간에 자세를 전환. 포로 중 이중 첩자의 가슴팍을 찌른다. 그리고 힘껏 비튼다.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컥컥대는 남자의 가슴에서 단검을 뽑는다. 피가 신수덕의 얼굴에 튄다. 그러나 신수덕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다음 작업을 수행한다.
심장 쪽에 뚫린 구멍에, 방금 베어낸 파멸인의 살점을 쑤셔 넣는다.
이중 첩자는 눈 주변의 살이 찢어질 것처럼 크게 뜬다. 그런 그의 머리를 붙잡고, 신수덕은 귓가에 속삭였다.
“너는 이제 평범한 고기가 된다. 너에게는 올라갈 천국도 떨어질 지옥도 없다. 우리가 그러하듯이 너도 영혼이라곤 없으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그러니까 받아들여……”
죽음을 앞둔 탓일까. 이중 첩자의 귀에는 너무나도 감미롭게 울리는 목소리.
어째서인지 진리처럼 느껴진다.
남자의 몸이 뒤틀린다.
관절이 꺾이고…… 아니 관절이 없는 곳에 관절이 새로 생기고 뒤틀리며, 없던 사지가 돋아나고 피부가 하얗게 탈색된다. 또 다른 안구가 여기저기 열매처럼 맺히고 손톱 밑에 이가 난다.
일련의 변이 과정이 끝나자 신수덕의 앞에는 이중 첩자 대신, 또 다른 파멸인이 가만히 서 있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살점을 제공한 파멸인이 터져나갔다. 뜨끈한 핏물이 신수덕의 등을 적신다.
“흠, 신체에 직접 주입하는 방법은 이렇게 되는 건가.”
그만큼 피를 뒤집어썼는데도 신수덕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
그는 영혼이나 구원을 갈망하지 않으니까.
다시 다른 파멸인의 살점을 베어낸다. 이번엔 정치경찰 앞으로 간다.
“좀 덜 아픈 방법일 걸세.”
그렇게 말한 뒤 철혈의 꽃 대원들에게 눈짓했다. 그들은 우악스러운 손놀림으로 정치경찰의 얼굴을 붙잡고 강제로 입을 벌렸다.
단검 끝에 살점을 꿰어 입에 조심스럽게 넣어줬다. 실수로라도 단검으로 목 안쪽을 찌르면 안 되니까.
단검을 빼내고 다시 눈짓하자, 대원들이 강제로 살점을 씹게 하고 목울대를 후려쳐 삼키게 만든다.
잠시 기다리자, 아까와 같은 변이가 일어난다.
그러나 그 뒤로 일어난 현상은 아까와는 다르다.
신수덕은 발밑이 조금 ‘오목해진’ 것을 확인했다.
“두 번째라서 그런 건가 아니면 ‘먹이는’ 방식은 또 다른 성질이 있어서 그런 건가…… 좀 더 통제된 환경에서 제대로 된 실험으로 규명해야겠지만.”
공간 왜곡이 일어난다. 그 점은 확인할 수 있었다.
“어쨌든 아즈텍 신화에도 ‘원형’이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네. 중세 아즈텍 제국의 사제들은 ‘원형’의 기록을 발견하고, 그걸 멋대로 자기 시대의 인간에게 적용한 것뿐이겠지만…… 최소한 고대에는 절실하게 필요했던 시절이 있었던 거겠지.”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짓는 미소는 미친 사람의 웃음이면서 동시에, 오랜 의문이 해소된 학자와 같은 기품이 있었다.
그 괴리가 더욱 광적인 느낌을 더한다.
“나머지 포로들은 자네들 처분에 맡기지. 시간 내어줘서 고맙네.”
신수덕은 끝까지 신사적인 어조를 잃지 않았다.
***
요컨대, ‘과부하’를 거는 것이 칸발리크 사태의 해결 방법이다.
혹은 ‘맞불 작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동명역 지하철에서 보고도 깨닫지 못했을까…….”
짐을 꾸리면서 신수덕은 냉소했다. 내전의 씨앗은 충분히 뿌려뒀다. 이제 아즈텍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갈 때다.
갖은 공격을 퍼부어, 위기를 느낀 ‘구체’가 계속해서 파멸인을 소환하게끔 한다.
갑작스럽게 대량 소환된 파멸인은 공간 왜곡을 일으키고, 이는 구체의 소멸로 이어졌다.
아마 이번 ‘혁세주’ 소환을 계기로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던 구체들 역시 소멸했을 것이다.
“‘저쪽 세상’에서 온 자들의 목적은 몰라. 아무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 뭘 하고 있는지는 알아.”
최대한 많은 파멸인을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보내는 것. 구체를 통한 소환은 그 1단계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지만 동시에 환경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파멸인이 소환되면 소환될수록, 우리 세상은 그들의 파멸해버린 세상처럼 변해가지.”
새롭게 소환되는 파멸인일수록 살아있는 생물과 비슷한 특성을 띠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처음엔 밋밋한 두부 같다. 피도 흘리지 않는다. 확실히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엔 내장, 혈관, 치아 같은 기관이 생기고, 피를 흘리고 안구를 움직이며 표정을 짓는다.
두 세상이 뒤섞인다.
물론 모든 일에는 균형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한 법이라지 않나.
두 세상을 잇는 통로는 폭이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신축성이 있어, 늘리면 조금씩 늘어난다.
물론 갑자기 잡아 늘이면 찢어진다.
“파멸인을 소환할수록 ‘혁세주’ 본체를 소환할 환경이 조성된다. 하지만 혁세주를 소환하는 과정에서 좁은 통로가 문제가 되지. 그러면 일시적으로 파멸인이든 구체든 수를 줄여서 여유를 만들어야지.”
신수덕은 카라코룸 인근의 유적이나 거기에 있는 구체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러나 그런 ‘파멸인류’가 핏물과 함께 터져나갔음은 확신하고 있다.
구체의 배치, 파멸인의 소환은 사실상 ‘혁세주’를 소환하는 예비 단계.
“‘혁세주교’라…… 신흥 종교까지 만들어서 준비해오다니 그 점 하나는 대단해.”
신수덕은 범 알타이 인민동맹을 향해, 솔직한 찬사를 뱉었다. 그렇게 적극적인 종교단체를 만들어 혁세주의 소환을 보조할 줄이야.
혁세주.
붉은 세상의 주인.
이미 파멸해버린 세상의 모습을 반영한 것.
“설령 그 몽골년의 ‘용’이라도 혁세주를 죽일 순 없지.”
저쪽 세상을 통째로 들어서 이쪽으로 옮기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까 물리칠 수는 없고,
“공간을 통째로 뒤틀어서 협박하는 수밖에.”
한계를 넘어선 소환.
두 세계는 소화불량을 일으킨 내장처럼 뒤틀리고 경련한다. 우리 세상은 파멸한다. 그리고 안 그래도 사정이 나쁜 저쪽 세상마저도 끝장낼 것이다.
“문제는 우리 ‘경애하는 황제 폐하와 친애하는 태사 각하’께서 그런 결단을 내리실 수 있느냐 하는 건데.”
신수덕은 조롱하듯 웃었다.
아즈텍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대량의 인간 제물’을 준비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