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수대치(12)
“장군도, 일단은 이 내전에서 게레센제 카간이 승리하게끔 해야 한다는 것, 동의하시겠죠?”
조유관은 계산을 조금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치명적인 실수는 아니지만, 좀 더 마음의 준비를 해둘 걸…… 하고.
귀빈실에서 마주하자마자 이 소녀 황제는, 미리안 태사와는 또다른 위압감을 뿜어내며 대화를 끌어나간다.
이 몽골 내전의 의미.
그리고 여기에 고려군이 개입한 의미.
그 고려군을 지휘하는 조유관이 알아야 할 ‘정치적 의미’에 대한 질문부터 던지는 것이다.
식은땀을 흘리며 간신히 이렇게 되묻는다.
“……폐하, 참으로 송구하옵니다만…… 제가 모르는 것들을 확인하지 못하면 이 미련한 머리로는 폐하의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짐은 게레센제에게서 선양을 받을 생각이에요. 충분한가요?”
조유관은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조유관이 묻고 싶은 것쯤이야 얼마든지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
그리고 야망을 숨기지 않을 정도로 당당하면서, 동시에 그 당당함을 바탕으로 대화에서 주도권을 놓질 않는다.
“그러하시다면, 일단은 몽골의 상황을 안정시키는 게 중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정은 고려군의 손으로 만들어야, 고려의 영향력이 몽골 곳곳에 스며들 테지요.”
“고려인들의 몽골 내 발언권도 강해질 테고요.”
정치, 경제, 군사…… 세 방향에서 몽골을 점차 잠식해 들어간다. 몽골은 안정되겠지만 게레센제의 영향력은 줄어든다.
내전이 끝나면 황권을 확립하려는 게레센제와, 그를 꼭두각시로 만들려는 루우 사이의 싸움이 시작되겠지만, 저울은 이미 루우 쪽으로 꽤 기운 후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장군과, 서북부군을 이끄는 김천열 장군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기대가 크다, 라.
몽골 내전이 길어지지 않게 빠른 시일 내에 진압했으면 좋겠다는 주문이다.
“우리 고려의 내전도 총동원령을 내리는 등, 모든 노력을 기울인 끝에 평정할 수 있었습니다. 몽골의 내전도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빠른 군사적 결과는…… 압도적 전력 차이로만 내놓을 수 있다고 봅니다.”
미련하다 하셔도 신(臣)의 견해는 이러합니다, 라고 조유관은 덧붙였다.
루우는 딱히 탓하지 않는다는 얼굴이다. 그녀는 그저 전문가의 의견에 추가 질문을 던졌다.
“지금 황궁을 경호하는 기갑사, 장군 휘하로 보내면 어떨까요? 충분한 도움이 되겠습니까?”
“충분 그 이상의 도움이 되겠습니다만,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칸발리크에 들어오기 전에 부하에게 들은 바로는 적의 황궁 급습이 있었다 들었습니다. 그런 급습에서 폐하를 지키려면 기갑사는 여기 있어야 합니다.”
어차피 이런 결론은 예정되어 있었다. 배영훈이 이끄는 기갑사 부대는 칸발리크 황궁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루우는 조유관을 아주 약간, 자기 사람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런 말을 던졌다. 자신을 지키는 부대도 내어줄 수 있다는 태도로.
조유관도 그런 조치를 거부함으로써 황제에 대한 자신의 충성을 보였다. 충성은 일방통행이 아니다. 신하가 임금을 지키려 하면, 임금 역시 신하를 지켜줘야 한다.
신호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루우는 의도를 드러냈고, 조유관은 황제께서 자신의 보호자가 되어 주시길 청했다.
대화는 본격적인 단계로 넘어간다.
“시간이 걸릴지는 몰라도, 저 ‘알타이 자유 공화국’이라 이름을 내세운 집단을 토벌하는 건 현 전력으로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지금 칸발리크 정부에 충성하는 몽골 정규군은 나름 정예하기 때문입니다. 몇 차례의 승리만 보여줘도 반란 정부에 넘어간 부대, 혹은 여전히 태도가 모호한 부대 모두 칸발리크로 넘어올 겁니다.”
황제는 절대로 얕볼 상대가 아니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자마자 조유관은 자신의 날카로운 전략적 안목을 드러낸다.
소녀를 위한 배려가 아니라, 군주를 위한 성실한 설명이 필요한 순간이다.
“허나, 그러려면 몽골군도 고려군도 전력을 오로지 카라코룸 방향으로 집중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는 몽골군 전력이 각지에 분산되어 그 힘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일단 칸발리크에 상당수 부대가 주민들을 돕고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주둔 중이다. 간신히 현상 유지만 하고 있지만.
남쪽 국경에서는 울제이의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꽤 큰 타격을 받았고, 이에 따라 안 그래도 부족한 전력을 그쪽으로 돌려야 했다.
그 외에도 산동 한족의 불온한 움직임을 억누르려 적지 않은 부대를 주둔시킨 상황.
“몽골 내전을 해결하려면 전력을 끌어모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최소한 울제이 칸 쪽, 즉 키타이 국경의 상황이라도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겠죠.”
루우와 게레센제의 타협은, 울제이에겐 기습적 배신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 분노를 달래줘야 할 터.
“다행스럽게도 제 부하, 태주갑 중령을 통한 키타이 측의 연락이 있었습니다.”
지금 칸발리크에서 루우를 직접 보필하는 사람은 둘이다. 하나는 최효윤 중장. 다른 하나는 태주갑 중령.
“아마 태주갑 중령을 통해 폐하께 직접 보고가 들어가거나, 그 윗선인 저를 통해 폐하와 접촉하려는 시도인 듯합니다.”
“칸발리크와의 공식적인 루트를 택하지 않고, 이렇게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나와 접촉을 꾀했다는 건…… 게레센제 숙부는 몰랐으면 한다는 거군요.”
“예. 키타이 문제의 실마리는 이쪽에 있겠죠.”
“그렇다면 응해야겠군요. 어떤 조건을 내밀지가 문제겠네요.”
조유관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뭔가를 떠올렸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폐하, 제 미련한 생각으로는…… 울제이 칸 측에서 어떤 조건을 내밀든 그건 중요하지 않을 듯싶습니다.”
“울제이 숙부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민다는 뜻인가요? 예를 들어 카간 자리를 내놓으라고 생떼를 쓴다거나.”
“아닙니다…… 거기까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칸발리크 정부 내에 울제이 칸의 지분을 내어 달라는 정도의 조건일 거라 생각합니다만…… 제 말은, 정말로 어떤 조건을 내밀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루우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오른다.
협상 자리에 나갈 필요조차 없다는 건가?
“폐하께선 협상에 응하시되, 최대한 시간을 끄십시오.”
“……이쪽에서 억지를 부리라는 건가요.”
“예. 하지만 상대가 자리를 박차고 나갈 정도여선 안 됩니다. 조금만 더 설득하면 될 텐데, 하는 수준에서 시간을 끌어주십시오.”
루우의 눈이 가늘어진다. 시간을 끌어달라. 그렇다는 말은 시간이 중요한 요소라는 말이다.
시간을 끌면 루우에게 유리한 국면이 펼쳐지리라 예상하기에 저런 말을 하겠지.
“그러다 보면 키타이 측에서 아쉬운 소리를 한다?”
“바로 그렇습니다. 폐하, 칸발리크에 계시면서 이미 소식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고려 본국에서 낭키아스로 상당한 규모의 부대를 파병하기로 결의했다 합니다.”
조유관의 말마따나 루우도 이미 들은 사실이다.
파병 목적은 낭키아스에서 일어난 한족 봉기를 진압하는 것.
거기까지 생각하자 루우의 눈이 커진다.
“장군, 설마…… 키타이에도 같은 반란이 일어나길, 아니 낭키아스의 불길이 키타이에도 번지길 기다리자는 겁니까?”
“고려군이 개입하면 한족의 봉기는 어느 정도 제압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파병 부대를 집결시키는 등 여러 준비를 해야 하고…… 시간이 걸리죠. 그동안 한족 반군이 놀고만 있진 않을 겁니다.”
세력을 불려 나가겠지. 낭키아스는 속수무책일 테고.
가장 큰 이유는 지금 키타이와의 국경에서 벌어지는 ‘회수대치’에 상당한 군사력을 투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수대치에 군사력을 투입한 건 낭키아스만이 아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키타이도 상당한 전력을 회수 국경에 쏟아 넣었다.
만약 한족 봉기가 아주 살짝 국경을 넘을 수만 있다면…… 키타이 역시 곤란해질 터.
키타이는 특히 북쪽으로 몽골 본토와 대치 중이기에 전력이 더욱 부족할 것이다.
“그때 폐하께서는 키타이의 요구사항들을 적절한 수위로 낮추고, 키타이 국경을 안정시키십시오. 그러면 몽골군 전력을 카라코룸 반란군 쪽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이며, 내전은 승리를 향해 진전할 것입니다.”
혹은…… 하면서 조유관은 차마 내뱉지 못한 발상을 삼킨다.
키타이에도, 고려군이 개입해 한족 봉기를 제압한다든가.
그렇게 하면 고려가 키타이와 낭키아스 모두를 아우르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확전’과 같은 의미다. 전쟁의 확장. 대륙 전체를 관통하는 전선의 길이. 고려가 그걸 감당할 수는 없다.
-아이디어는 그저 아이디어로 넣어둬야겠지.
일단은 몽골 안정화를 목표로 둔다. 뭐든 한 걸음씩, 차근차근이다.
조유관은 그렇게 생각하며 루우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루우는 조유관의 의견이 마음에 들었는지,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장군의 식견이 이 정도라는 건 좀 의외군요. 알겠어요. 그 의견에 따르죠.”
조유관은 머리를 조아렸다. 아마 자신의 얼굴에도 만족이 떠올랐으리라 짐작하며.
***
몽골 황궁은 고려의 기갑사들, 조유관이 추가로 보낸 고려군, 최효윤과 태주갑을 비롯한 이단 전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볼로드나 게레센제의 눈을 피해, 루우가 비밀 회담에 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루우가 일단 협상에 흥미가 있다는 뜻을 비치자, 울제이는 빠르게 움직였다.
얼굴도 낯설고 지위도 모르는 키타이 측 대표가 찾아왔고, 지금 루우는 그와 얼굴을 맞대고 조건을 조율하는 중이다.
“칸께서는 쿠릴타이를 다시 열길 원하십니다.”
역시 이건가. 하면서 루우는 한숨을 억눌렀다. 울제이는 자신이 참여하지 못한 쿠릴타이의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를 꺼내 들었다.
“너희 칸에게 연락이 안 간 게 아닐 텐데.”
결석한 건 울제이의 책임 아니냐, 받아들여라. 루우는 그런 말을 간접적으로 전한다.
“키타이의 남북 국경에 군대를 바짝 진주시키고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고려의 황제께선 겉과 속을 다르게 꾸미는 걸 좋아하시는지.”
그 불손한 말에 효윤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온다. 루우는 오른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키타이를 고려, 몽골, 낭키아스의 연합이 짓밟아 버리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긴 했지만, 아직 고르고 싶진 않았다.
여기에 견하가 있었다면 좀 더 능수능란하게 말을 돌렸을 텐데.
루우는 아쉬워하며 상대방의 말에 대답했다.
“누가 먼저 잘못을 시작했는지 따지고 들면 한도 끝도 없지. 숙부들이 형님 카간을 잃었듯, 나도 아버지 카간을 잃었다. 그런데 나는 그 직후 군대를 끌어모으던 숙부들의 모습을 기억하지. 그 이야기를 굳이 꺼내야 할까?”
그녀는 웃으며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중세도 아니고, 납치, 암살 같은 저급한 수단을 쓸 이유는 없지 않나? 아니 오히려 그게 울제이 숙부의 기회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단 말인가?”
비웃듯,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그때 오셨더라면 지금 카간 자리에는 게레센제 숙부가 아니라 울제이 숙부가 앉아계실지도 모르는 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