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수대치(11)
견하가 대회장에 들어서자, 웅성거림이 싹 가라앉는다.
짓누르는 듯한 조용함이다. 완벽하게 조용하지만, 침묵하는 사람들이 어디에 집중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는 조용함.
유지나, 이익서, 한재연, 그리고 견하를 따라 귀국한 양수영 등이 견하의 뒤를 따른다.
똑바로 도열해 있지만, 감찰국 직원 각자의 눈과 신경은 견하의 움직임을 좇았다.
그들과 거의 다르지 않은 하얀 제복을 걸쳤으나, 견하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렸다.
지성이 느껴지는 날카로운 옆얼굴. 이제는 여러 실전 경험을 쌓은 날렵한 몸놀림.
여기에 전설 같은 소문들이 덧붙어, 그를 신비한 분위기로 감싼다.
정말 그가 우리와 같은 또래일까.
정말 그가 고등학교 3학년에 불과한 소년일까.
믿기지 않더라도 믿는 수밖에 없다. 그들이 속한 이 조직과 그들을 이곳까지 오게 한 역사의 흐름이 증거니까.
감찰국 국장, 소년 주견하는 연단에 올랐다.
잠시, 뜸을 들인다.
견하는 변성기를 잘 보낸 편이라 목소리가 그 또래보다 낮고 듣기 좋다. 그래서 몇몇은 약간은 기대하는 얼굴로 견하의 말을 기다렸다.
“제국입헌당의 젊은 당원 여러분,”
침묵 속에 당황이 살짝 퍼진다.
견하는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청중 모두가 눈동자만 아주 약간씩 흔들려도, 연단에 선 사람에게는 그 동요의 합산 결과가 보이는 법이다.
“그렇다. ‘제군’도 아니고 ‘감찰국의 직원 여러분’도 아니다. 나는 당신들이 좀 더 자기 위치를 잘 자각하길 바란다.”
눈치 빠른 이들은 얼른 지난번 ‘전당대회’를 떠올린다. 그때도 마치 감찰국의 위세를 과시하듯, 태사를 경호하며 대회장 안으로 들어갔었다.
이번에 귀국하는 주견하를 맞이하는 자리에서도 태사를 둘러싸듯 움직이며 국민들에게 감찰국의 모습을 선전했다.
“나는 당신들이 그저 내 부하로만 머물길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제군’이라 부르지 않았다. 또한 나는 당신들이 감찰국 직원인 채로 경력을 마치기도 원치 않는다. 그래서 ‘감찰국 직원 여러분’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주견하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의 신비한 지도자가 전망하는 미래는 무엇일까.
“나는 당신들을 ‘제국입헌당의 젊은 당원’이라 불렀다. 그러하다. 나는, 당신들은, 우리는 감찰국의 직원이나 정치경찰실의 구성원 수준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집권 정당의 일원으로 활약하길 원한다. 다음 세대에는 당의 중추가 되기를 원한다.”
왜인가. 왜 그들은 제국입헌당의 중추가 되어야 하는가.
견하는 그런 물음을 던진다. 각자 생각해볼 틈을 주면서.
그러나 이 질문은 창의성을 요하는 질문이 아니다. 답을 찾지 못해 던지는 질문이 아니다.
견하의 마음속에 명확한 답이 떠올라 있는 질문이다.
“제국입헌당은 고려 제국을 지배한다. 고로 제국입헌당의 중추가 된다는 것은 고려 제국의 중추가 됨을 의미한다.”
제국의 중추.
어떤 이는 그 말이 주는 울림에 전율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여전히 견하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의아해한다.
“우리가 제국의 중추가 되는 것은 권력을 획득하기 위함도 아니고 부귀를 누리기 위함도 아니다. 물론 제국의 중추가 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권력을 쥐고 부귀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과정이다. 궁극적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동안 자연스레 거치는 골목이며, 궁극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여러 수단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제국의 중추이기에, 제국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과 같다.”
논리는 비약한다. 어느새 제국의 중추가 될 것이다, 가 아니라 이미 제국의 중추라고 말이 바뀌었다.
하지만 견하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사소한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의 목표가 곧 제국의 목표다. 그 말이 그들의 가슴을 울린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우리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시대는 우리가 제국의 중추로 행동하기를 원한다. 우리 황제 폐하께서 응당 받으셔야 할 몽골의 황위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고, 동아시아 각국은 해체되어 ‘다이온 연방’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로 재탄생하려 한다.
이런 시대의 격랑 속에서 우리는 황제 폐하께서 몽골의 카간 자리를 잇도록 돕고, 우리 고려가 다이온 연방의 주도국이 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려도, 폐하마저도 휩쓸려 사라질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있는 것이다.”
말 한마디가 끝날 때마다 견하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더불어 듣고 있는 사람들도 고조된다.
견하의 말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견하의 말에 얼마나 진실이 들어 있는가, 견하에게 얼마나 동조하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견하가, 그들이 원대한 「계획」에 필요한 사람이라고 말해준다는 점이다.
“애석하게도 국내외 정세라는 복잡한 얽힘이, 태사 각하께서 운신하실 폭을 좁히고 있다.
세계를 덮친 대공황은 여전히 고려의 경제 사정을 옥죄고, 이에 따라 다른 나라와의 협력이 무척 중요한 상황이다. 그렇기에 다른 나라들을 무시하고 고려가 독단적으로 대규모 군대를 움직여 동아시아 질서 재편의 현장에 뛰어들기는 어렵다.
즉 우리 감찰국이, 당신들이 나서야 한다. 우리는 태사의 뜻을 받들어 태사께서 미처 손을 뻗지 못하는 곳으로 들어가 세밀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고, 동시에 칸발리크에 계신 황제 폐하를 보필해야 한다.”
루우와 리안, 그리고 견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긴장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이들에게 들려줄 진실은 이 정도 수준이면 된다. 견하는 능청스럽게 상황을 포장하는 자신의 말이 가소롭다고 생각했다.
견하는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서쪽 어딘가를 가리켰다. 정확한 방위를 가리키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맥락이니까.
“……우리, 감찰국 전원은 칸발리크로 간다.”
모두의 발뒤꿈치에, 어깨와 목덜미에 빳빳한 긴장이 주입된다.
“지금까지 단순히 내 전투를 보조하던 임무, 경비 임무, 의전이라는 명목으로 모습만 비추고 마는 임무와는 차원이 다르다. 여기 서 있는 사람 중 삼 분의 이는 죽을 수도 있다.”
물론 조직을 더욱 대규모로 성장시키고 싶은 견하는 그런 희생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 말은…… 그들에게 긴장감과 함께 ‘주견하와 함께 위험한 임무를 수행한다’는 흥분감을 심어주기 위한 것.
“이 중에는 반역자를 따르던 자도 있고, 반역자였던 자도 있고, 반역자의 친인척이었던 자도 있다. 그러나 나는 늘 그래왔듯이 과거는 묻지 않는다. 대신 제국의 주춧돌이 돼라. 기둥이 돼라. 나와 함께 칸발리크로 전진해라.
제국은 곧 대원황국(大元皇國)으로 거듭난다. 그 기념식은 당신들의 손으로 열 것이다.”
연설을 마친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열렬한 박수다.
허동주는 먼 미래의 이상을 말했지만, 주견하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국가의 위기와 영광을 제시한다.
그 박수 소리를 즐기면서도, 견하는 또 다른 걱정과 계획을 이어나갔다.
견하 본인이 말했다시피 천손민족협회 회원이었던 자들을 상당수 받아들였다.
감찰국이 이들의 성향에 물들어, 끝내 견하가 통제할 수 없는 수준으로 폭주하는 것은 아닌가…….
나는, 저들이 허동주를 잊어버리게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저들에게 나는 허동주를 대신하는 무언가일까.
이번 기회에, 감찰국을 구성하는 이질적인 집단들이 하나로 묶일 수 있는지 확인해봐야겠다.
그리고 집단의 성격이 지나치게 천손민족협회에 ‘오염’되지는 않았는지도.
-태사께서 이것까지 금지한 건 아니니까.
‘재량권’을 만끽하며, 견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전선 시찰.
이는 단순히 ‘그 전선을 맡은 지휘관’ 몇 명과 향후 방침을 의논하는 선에서 그칠 수도 있다. 이 경우엔 말만 전선 시찰이지 실상 안전한 사령부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오는 쪽에 가깝다.
하지만 조유관은 직접 최전선의 참호까지 나가보기로 했다.
실제로 어떤 지휘관들은 이런 짓을 하다 운 나쁘게 전사하기도 한다. 정비되지 않거나 망가진 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길 잃은 적들과 마주쳐 총알 세례를 받는 식으로.
“아직까진 운이 따라주는 편인가 보군.”
참호를 지키는 병사들의 손을 잡아주고, 영양과 보급 상태를 점검한다. 특히 ‘양말과 전투화’의 보급에는 몇 번이고 확인하면서 현장 지휘관의 다짐을 받아냈다.
“지휘관이라면 마땅히 선 채로 발이 썩어들어가는 고통을 가슴 아파해야 해. 그리고 내 부하에게만큼은 그런 고통을 안겨주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야지. 따라서 참호족 예방은 최우선 과제다.”
열심히 끄덕이는 지휘관들을 뒤로하고, 조유관은 계속해서 나아가며 참호 내 위생과 배수 문제 등도 면밀히 살폈다.
세균…… 질병 감염 역시 인간 집단을 지휘하는 장군이 특히 조심해야 할 문제다.
그렇게 하나하나 살펴보다, 적의 기갑사가 남긴 전투의 흔적에 발길이 닿았다.
참호의 벽을 지지하던 나무가, 거대한 발톱이 할퀴기라도 한 듯 동강 나 있다.
“첫 공세 이후로는 기갑사가 나오지 않은 건가?”
“그렇습니다. 산발적인 포격은 있지만…… 본격적인 돌격을 하기보다는 빈틈을 보이지 않겠다는 태도에 더 가깝습니다. 피해도 미미합니다.”
“방어적이군…….”
포탄을 쏟아붓고 기갑사나 전차를 돌진시켜 참호의 한 점을 무력화한다. 그 뒤를 보병이 따르며 뚫린 지점을 확대한다. 일반적인 돌파는 그런 식이다.
하지만 적은 지금 돌파를 시도하지 않는다.
“왜지? ……우리를 방심시킬 의도인가?”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방어에 임하고 있습니다. 여차하면 반격에 나설 준비도.”
“좋은 자세야. 하지만 반격에 나선다면 반드시 주변 부대와 연계하도록. 까딱하면 용감한 개죽음이 되니까.”
“알겠습니다.”
부하의 성실한 답변을 들으면서도 조유관은 고개를 갸웃했다. 방심을 의도한다면, 그런 얕은수가 먹히지 않는다는 걸 가르쳐주면 된다.
하지만 적의 시야가 이 옹구차트-새너두 전선보다 좀 더…… 더 큰 전략을 품고 있다면?
“서북부군이 위험해질지도 모르겠군. 김천열과 의논해봐야겠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시찰을 마치려던 순간,
“장군, 칸발리크에서 연락이.”
“칸발리크에서……? 어떤 분이신가?”
칸발리크에서 연락이 왔다면 아무리 대장이라 해도 긴장할 수밖에 없다. 아마 현 카간인 게레센제, 칸발리크 정부의 수반인 볼로드, 그리고…… 고려의 황제 폐하, 이렇게 세 사람 중 한 명일 테니까.
앞의 두 사람은 조유관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만큼, 황제 폐하일 가능성이 가장 높지만.
“예. 황제 폐하께서 직접 연락해 오셨습니다. 자문을 구하고 싶으니 칸발리크에 와 줄 수 있냐고.”
부하들이 없었다면 조유관은 환호하며 그 자리에서 방방 뛰었을 것이다.
왔다.
둘도 없는 기회가 왔다.
황제 폐하와의 만남!
폐하를 내 편으로 삼으면, 안세규의 견제와 미리안의 잔혹한 계획 사이에서 탈출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부하들 앞에서는 체통을 지켜야 했다. 더하여 황제 폐하의 신하로서 아주 충성스러운 모습도 보여야 했고.
이등병이라도 된 것처럼 자세를 빳빳하게 고치며, 조유관은 끄덕였다.
“바로 가지. 칸발리크에 있을 태주갑 중령에게도 연락을 좀 넣어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