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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200화 (199/541)

회수대치(9)

가출했다 돌아오는 심정이 이럴까.

효윤 앞에서는 자기가 다 감당하겠다고 당당하게 말은 했지만, 막상 동명역에서 내린 견하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리안의 도시.

주눅이 든다. 왠지 모르게…… 아니, 이유는 안다.

리안이 원하지 않는 일을 했으니까.

효윤의 지적이 옳다. 리안을 위해, 리안의 권력을 위해 칸발리크로 갔던 거라곤 하지만…… 실상은 ‘리안이 계속 권력을 잡기를 원하는’ 자신의 욕망 때문이 아니었던가.

동명역의 공기를 마시자마자, 그런 당연한 깨달음이 머리에 파고들었다.

실제로 나는 건 아니지만, 코끝에 희미하게 피냄새가 도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역사 천장까지 튀었던 핏자국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지워져 있었고, 실내 장식의 자그마한 틈새까지도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말라비틀어진 살점 한 조각 없다.

다만 마모된 탄흔은 남아 있었다. 견하처럼 여기서 전투를 치렀던 사람들은 그 탄흔의 의미를 안다.

감찰국 직원들과 함께 마중을 나온 유지나의 모습이 보인다.

손을 들어 직원들의 환영에 답하고, 고개를 끄덕여 지나에게 인사하려다, 견하는 멈칫했다.

여기까지 나오진 않을 줄 알았던 사람이 있었으니까.

“각하.”

태사 미리안. 그녀가 동명역까지 견하를 마중 나왔다.

그녀는 찌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대할지 아직 정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별반 감정을 담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가 견하의 귀에 들려온다.

“태사부로 가면서 이야기하자.”

견하는 예, 하면서 리안의 뒤를 따랐다.

지나의 옆을 스쳐 지나가면서 흘끗 눈길을 주었다. 뭔가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지나도 모르겠다는 눈치다.

지나 역시 견하의 뒤를 따른다. 리안이 데려온 경호원들 주변으로, 감찰국 직원들이 또 다른 벽인 것마냥 둘러싸고 태사의 움직임을 따른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지만, 동명역을 오가는 시민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들에게 태사 리안을 수행하는 하얀 제복들, 감찰국의 위상이 선전되고 있다. 그것 자체로는 나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리안에게서 어떤 불호령이나 질책이 떨어질지 생각하면…… 속이 쓰다.

그런 견하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안은 앞만 똑바로 보면서 말을 꺼냈다.

“루우와 네가 요청한 대로 제국최고회의에선 대표단을 보내기로 했어. 군에서도 고문단을 파견하기로 했고.”

고민이 컸어, 라고 리안은 덧붙였다. 견하는 그 말에 답하지 못했다.

리안만 계속 말을 이었다.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 착착 진행해 가고 있더라.”

“네.”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잖아?”

견하는 그대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어쩔 생각이야, 앞으론?”

리안이 흘끗 그의 얼굴을 돌아본다. 말하고 싶지 않아서 다문 게 아니라, 말하기 곤란하기에 다문 것이다. 그걸 확인한 태사는 다시 정면을 보며 걸었다.

“차에 가서 이야기하자.”

두 사람은 같은 차에 올랐다. 지나를 비롯한 직원들은 다른 차에 타고 이동한다.

차는 천천히, 부드럽게 황궁을 향해 움직였다.

칸막이 덕분에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는 누구도 엿들을 수 없었다.

“오늘 내 생각도 들려주겠지만, 그 전에 견하 네 생각을 들어두고 싶어.”

아마 리안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일 것이다. 견하가 한 행동은 지나치게 독단적인 행동이었다. 리안의 방침에서 완전히 어긋난 것이기도 했고.

연인이 아니었다면, 견하가 리안에게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벌써 숙청 명단에 올라갔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견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레문 카간이 향후 20, 30년 정도는 더 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계획」은 한참 뒤에나 점진적으로 진행될 예정이었어요. 지금 진행하고 있는 건 방향만 비슷하지 원래 「계획」과는 동떨어진 물건이죠.”

“하지만 ‘발상’이라는 점에선 중요한 의미가 있지. 이런 「계획」을 세워두지 않았다면 애초에 몽골에 이렇게 노골적인 내정간섭을 시도할 생각 자체를 떠올리지 않았을 테니까.”

어쭙잖은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리안은 한숨을 내쉰다.

“그래, 상황이 달라진 건 인정해. ‘동아시아의 균형은 이미 붕괴했다. 그럴만한 국력이 있는 나라라면 책임을 지고 이 정세를 떠맡아 해결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침략을 계획했던 허동주와는 다르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겠지?”

견하가 아무리 똑똑해졌다 해도 리안의 지성과 경험을 따라잡긴 어렵다.

리안 역시 다른 노회한 정치가들에 비하면 애송이일지 모르지만, 견하보다는 확실히 앞선다. 고작 세 살의 나이 차가 그런 차이를 만든다.

“유감스럽게도 내 눈에는 ‘같아’.”

무력으로 상대를 병탄하든,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어 서서히 잠식해 들어가든, 제국주의적 확장이라는 점은 똑같다. 힘을 앞세워 나보다 약한 자를 무릎 꿇린다는 것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고려 제3제국 내에 ‘그런 경향’을 퍼트리는 것 자체를 참을 수가 없다. 리안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레문 카간이 생각보다 일찍 죽었고, 루우, 게레센제, 울제이를 둘러싼 황위쟁탈이 벌어졌어. 거기에 더해 칸발리크는 아직도 테러로 인해 괴물들이 활보하고, 몽골 내부에서도 내전이 터졌지.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미쳐 날뛰는 상황이야.”

그걸 고려가 안정시켜야 한다, 그런 발상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루우도, 저도 바라는 일이긴 했지만, 이런 형태는 아니었어요. 우리는 다른 길을 고른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간신히, 견하는 반박했다.

“아시잖아요. 아즈텍의 상황이 어떤지. 우호적인 정권이 유지된다고 보긴 힘들어요.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적대적인 정권이 들어서면,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게 되겠죠. 그런데 이 상황에서 몽골의 혼란을 방치한다면?”

만약 몽골, 키타이, 낭키아스에 고려와는 적대적인 정권이 들어서거나, 혼란상이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나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서쪽 몽골과는 긴 국경을 맞대고 있다. 아즈텍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몽골까지, 동서 양쪽 국경이 모두 불안정해진다면…… 도저히 좋은 상황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양면 전선. 그 어떤 나라라도 피하고 싶은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 상황이 될 때까지 그저 손 놓고 있느냐, 아니면 원하지 않는 일이라도 해서…… 손을 더럽히더라도 최악의 상황은 피할 것인가. 저는 후자를 골랐어요.”

견하는 고개를 돌려 리안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순간, 온몸이 굳었다.

그 누구라도 전율케 하는 그 눈빛으로 리안이 견하를 쏘아보고 있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 정말로 없었을까?”

다시 말문이 막힌다. 저 눈빛 앞에서는 어떤 변론도 통하지 않는다.

“선택의 여지는 있었어. 분명히. 키타이와 낭키아스는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억제하고, 몽골의 혼란상은 스스로 수습될 수 있도록 간섭하지 않는 것. 루우가 몽골 카간위를 포기한다고 깔끔하게 선언하기만 했어도 이 문제는 해결돼.”

리안의 입장에선 몽골이 계속 제국일 필요는 없었다. 몽골이 공화국으로 거듭난다 해도, 협상의 여지는 있다고 봤다.

게레센제, 울제이, 루우 모두 카간 자리를 포기하게끔 하고, 칸발리크 정부와 카라코룸 정부 사이를 중재한다. 그렇게 해서 고려처럼 연립 정부를 세운다. 이 경우엔 두 정권이 공화국으로 나아가기로 합의를 본다고 해야겠지.

그렇게 몽골 상황을 안정시키고 나면 외교적 관계 개선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칸발리크든 카라코룸이든 내전을 중재해 준 고려에 우호적 반응을 보일 테니까.

“키타이와 낭키아스는 독립 군주국으로 나아갔겠지. 어려운 길이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할 정도까진 아니었어. 게다가 이 상황, 부분적으로는 너희가 유도한 측면도 있어.”

‘너희’는 견하와 루우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겠지.

리안의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끊어졌다.

차는 여전히 부드럽게 움직이며 황궁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의 대화는 리안의 집무실에 도착하고서야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리안이 의자에서 눈을 들어 견하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본다. 질책하는 눈빛이 아니다.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자는 눈빛이다.

“보고를 읽어봤어. 알타이 자유 공화국의 배후에는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라는 세력이 있고, 이들이 칸발리크 테러의 주범이다…… 시레문 카간이 이 테러 때문에 사망한 지금, 우리 고려는 그들과 타협하긴 어렵겠지.”

어쨌든 루우를 황제로 모시고 있는 고려니까, 황제의 원수와 악수할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없다. 적어도 수백 년 뒤, 그런 원한 관계를 따지기 쑥스러워지는 시점이 오지 않고서는.

리안은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몽골 내전 개입은 이제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최선의 결과를 내놓을 수밖에.

“아까도 물어봤지만…… 어떻게 할 생각이야? 게레센제가 카간 자리를 이었다면서? 루우는?”

견하도 자세를 바로 한다. 태사의 측근이자, 가장 믿을만한 조언자로서 의견을 올릴 때다.

“일단 낭키아스와 몽골이 연합한 ‘다이온’을 먼저 만들 거예요. 고려는, 말씀드린 대로 ‘참관국’으로 연방에 참여하고요.

게레센제 카간의 치세 동안 몽골 내전, 칸발리크 문제를 해결하고 상황을 안정시킨 뒤…… 카간 자리를 루우가 양위 받는다는 게 지금 계획이죠.”

“내가 보낸 대표단이나 고문단은 그동안 ‘다이온 연방’ 내에서 고려의 영향력을 증대한다는 거지?”

“그렇지 않고선 루우가 카간 자리를 물려받을 수 없으니까요.”

“루우가 카간 자리를 물려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게레센제의 카간 자리도 불안정해지겠지. 루우나 몽골 태사인 볼로드의 지지를 통해 카간이 된 이상, 게레센제가 그 자리를 유지하려면 고려의 힘이 꼭 필요한 상황이야.”

게레센제를 둘러싼 위협은 한둘이 아니다. 혼란에 빠진 칸발리크, 카간 자리를 노리는 동생 울제이, 카라코룸에서 일어난 반란.

“그리고…… 얼마 전에 들어온 보고인데.”

리안은 서류뭉치를 견하 쪽으로 내밀었다. 첫 면부터 낭키아스와 키타이를 비롯한 대륙의 지도가 큼직하게 박혀 있었다.

“게레센제 카간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한족들이 봉기했어. 회수에서 키타이, 낭키아스 양국의 군대가 대치하는 중이라 초기 진압에 실패했고, 반란의 불길은 점점 번져나가는 중이지.”

리안은 지도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지금 표시된 것보다 반란군이 장악한 지역은 더 확장됐을 거야. 개별 도시마다 일어난 산발적 봉기가 서로 연결되면서 서서히 ‘선과 면’으로 변하는 중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아직은 낭키아스 서부와 남부에서만 일어나는 일이지만, 반란은 구 태평천국의 영토를 갈라 먹은 모든 나라로 확산할 위험이 있었다.

“국경을 넘어 키타이 뿐만 아니라, 대예, 보우슈엥, 티베트, 탕구트 일대에도 확대될 가능성이 있지.

한족 반란군이 ‘독립국가’화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라도 반드시 막아야 해. 그게 세계대전 이후 모든 아시아 국가들의 최우선 안보 과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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