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197화 (196/541)

회수대치(6)

좋은 징조는 아니다.

네 사람 모두 똑같이 생각했다.

아니 루우는…… 좀 더 앞서나갔다. 이미 기계처럼 변한 피부 안쪽에는 사람의 살과 뼈가 있을까? 아니면 안쪽까지 완전히 기계로 변해버린 걸까.

만약 후자라면, 그건 견하라는 인간의 일부라고 볼 수 있을까. 견하에게 ‘인간’으로 남은 부분은 점점 줄어들어 가는 것 아닐까?

이제 견하는 얼마만큼 인간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안 좋은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그 생각을 떨쳐내듯 루우는 입을 열었다.

“이것도 부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 잠시 요양 차 귀국하는 건 어때?”

소년은 뒤돌아 있었다. 살짝 빨개진 귓볼이 보인다. 그게 그의 ‘남아있는 인간성’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안심이 된다.

“아직 알타이 자유 공화국 문제도 남았고, 하늘 위에 떠 있는 저 ‘붉은 존재’도 해결이 안 됐어. 지금은 귀국하기보다는 폐하를 보좌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는데.”

“잠깐이지만 다녀와. 지금까지 우리는 태사의 의향은 묻지 않고 우리 뜻대로만 일을 진행해 왔어. 이쯤에서 태사와의 협의가 필요해. 내 입장을 설명하고, 손발을 맞춰나가야지.”

견하는 생각에 잠기는 눈치다. 곧 그의 입에서 답이 나온다.

“알았어. 다녀올게. 리안 누나와 협의가 끝나는 대로 칸발리크로 돌아올 거야. 그때까지……”

견하의 눈길이 효윤 쪽으로 향한다. 바로 얼마 전, 효윤은 견하의 뜻이 과연 리안이 바라는 바겠냐고 추궁했다. 효윤은 견하의 시선을 피하진 않았지만 입술을 어색하게 다물었다.

“효윤이가 계속 폐하를 보필해 줘. 양수영, 너는 나랑 같이 귀국하고. 재연이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전하고 앞으로의 방침을 논의해 봐.”

수영은 말없이 끄덕인다.

“……내가 귀국하는 건 웬만하면 비밀로 해 두자고. 또 다른 황궁 침범 시도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배영훈 중령과 기갑사 부대는 여기 남겨서 경호를 계속하도록 하고.”

그렇게 자신이 귀국한 뒤의 업무 배분을 이야기하다, 견하는 문득 말을 멈췄다.

그런가. 지난번 황궁 습격.

기갑사를 칸발리크 황궁에서 빼내지 못하게 할 셈이었나.

옹구차트-새너두 전선에서 나타난 반군 소속 ‘기갑사’. 기갑사를 제대로 상대하려면 역시 이쪽도 기갑사를 내놓아야 한다. 하지만 몽골군에는 기갑사가 없다. 따라서 고려에서 데려온 기갑사를 전선으로 보내야겠지만…….

“또 다른 황궁 습격이 염려되는 상황에서 기갑사를 전선으로 돌리긴 어렵겠지.”

살짝 한숨을 내쉰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기갑사를 동반한 적의 공세는 조유관 대장의 도움으로 물리쳤다고 들었다.

“……조유관을 칸발리크로 불러들여서 논의를 해 보는 게 어떨까.”

견하는 이번에는 주장을 내세우지 않는다. 조유관이 어떤 위치에 서서 어떤 야심을 품고 있는지, 리안이나 세규 못지않게 우려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이 발언은 어디까지나 황제 루우의 의향을 묻는 것이다.

황제는 턱에 살짝 손을 댄다.

“그러고 보니 지금 옹구차트-새너두 전선을 시찰 중이라던데, 한 번 불러들여서 의견이라도 들어보면 좋겠네.”

그렇게 말해놓고선 슬쩍, 효윤의 눈치를 본다.

“단순히 자문만 들을 거야. 여기서 조유관을 내가 직접 움직인다든가 하면 군통수권자인 태사의 권한도 침범하고, 어쨌든 타국인 몽골과의 외교에도 좋지 않겠지.”

리안의 뜻을 거스르더라도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고 싶어하는 루우. 그래서 그녀는 조유관 같은 장군이 몽골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 드는 걸 반겼다.

조유관 본인이 무슨 생각을 하든 그 행동은 루우에게 도움이 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조유관을 황제의 가신으로 삼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면 고려군을 황제파와 태사파로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고려군 전체의 전력이 악화되는 거야 말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되면……

태사와 황제 사이의 대립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어진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다. 리안과는 완전히 대립각을 세우고 싶진 않다.

개인적으로 친구 사이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타협할 여지를 남겨두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그토록 대립하던 안세규와 미리안이 손을 잡았다. 이건 두 사람이 대립하되, 언젠가 루우를 견제하기 위해 손잡을 여지를 남겨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두 사람이 손을 놓고, 다시 리안과 루우가 손을 잡을 여지도 아직 남아있다. 그걸 없애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효윤을 배려해, ‘조유관을 이 문제에 더 이상 깊이 끌어들이지는 않겠다’는 요지의 발언을 해 둔다.

루우의 의도를 이해하겠다는 듯, 효윤은 끄덕였다. 그리고 견하에게 이렇게 덧붙인다.

“언니랑 이야기가 잘 됐으면 좋겠네.”

***

울제이도 지난 20년간 놀고만 있진 않았다.

몽골 본토에서 받아온 주둔군의 충성을 장악한다.

세계대전 이후 본토에서 이주해 온 몽골인들의 출산을 적극 장려했다. 한족들은 꿈도 꿀 수 없는 복지와 각종 혜택으로.

덕분에 본토나 낭키아스에서, 혹은 다른 해외에서 몽골인의 키타이 이주는 상당히 늘었다.

그렇게 키운 인구 중 징병 가능 연령대에 있는 사람들을 긁어모았다. 그냥 강제로 군으로 끌어들이면 몽골 본토나 낭키아스로의 이민을 선택해버릴 수 있기에, 군인 대우 개선에도 예산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예산을 중간에 어떤 도둑놈이 가로채진 않는지, 감시와 처벌도 철저히 했다.

한족들에게도 몽골어와 문화를 익히고, 칸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몽골인과 대등한 대우를 약속했다. 그런 자들이 군에서 차별 없이 출세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이른바 ‘친몽파’라 불리는 군인들이 대거 양성됐고, 이들은 동포를 저버린 대신 칸의 신뢰를 얻었다.

그렇게 기른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다시 정예화하는 데 노력을 쏟아부었다. 최신 무기를 사들이고 철저하게 훈련시키는 건 기본이다.

군에 소속되어 있으면 얼마든지 배움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자녀들의 학비도 넘치도록 퍼주었다.

충성은 충성을 바칠만한 가치가 있는 자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울제이는 그렇게 믿었다.

그런 신념과 노력이 오늘날 빛을 발한 것이다.

전선을 수십 킬로미터 밀어내는 성과를 올렸다는 보고. 그 보고를 들으며, 울제이는 기쁨과 뿌듯함을 한껏 맛보았다.

대승리.

카간 자리에 가까워진 동시에, 키타이의 독립도 한층 현실에 가까워졌다.

“이제 우리는 칸발리크의 턱밑에 칼을 들이댔습니다.”

참모 하나가 현 상황을 그렇게 평한다.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는 우리가 이 군사행동의 정치적 최종목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칸이시여, 결단을.”

참모들이 말하는 결단은,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고르라는 것이다.

이대로 칸발리크를 계속 압박해, 부당하게 카간 자리에 오른 게레센제를 끌어내리고 울제이 본인이 카간이 될 것인지.

아니면 승리를 바탕으로 키타이의 독립을 공고히 하고 ‘한족 신흥 제국’의 황제가 될 것인지.

울제이는 선뜻 답하지 않았다. 일단은 참모들을 이야기하게 내버려 둔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을 정리하자.

“회수 전선은 지금 조용합니다. 낭키아스군이 갑작스럽게 공세를 시작할 수도 있어서 철저히 대비해뒀지만, 계속 이런 식이라면 낭키아스군에는 북상할 여력이 없다고 봐야겠죠. 우리를 남북으로 협공하기엔 몽골 본국의 여력도 부족합니다.”

참모의 말대로 몽골의 상황은 좋지 않다. 몽골 내전은 혼란의 연속이다.

먼저 반란군. 이들은 밀리긴 했지만 조금씩이나마 전력을 증강하고 있다. 반란군에 넘어가지 않은 부대도 상당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카라코룸 정부에 뚜렷한 충성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군의 통수권이 태사에게 있는 고려와 달리, 몽골은 입헌군주제지만 카간이 군 통수권을 행사한다.

요컨대 몽골군은 타이시를 비롯한 정부의 통제를 받는 ‘몽골 국가’의 군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카간에게 충성하는 카간의 군대다.

그런데 시레문 카간이 그렇게 세상을 떠났으니…… 몽골의 군인들에겐 ‘이제 누구에게 충성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이른바 ‘자유 공화국’이라는 카라코룸 신정부에 충성을 맹세해 ‘국가의 군대’가 될 것인가.

아니면 칸발리크에서 새로 선출된 카간, 게레센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전통을 따를’ 것인가.

전자를 선택해 새로운 길을 가는 것도 망설여지지만, 동시에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카간도 영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게레센제 칸의 즉위를 선포한 쿠릴타이는, 우리 울제이 칸께서 참여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적법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게레센제 칸의 배후에는 고려인들이 있죠. 루우 테무르 황제야 황금가문의 일원이라고 해도, 그분이 이끄는 고려는 어디까지나 ‘외세’입니다.”

고려군의 개입. 이는 칸발리크 정부에는 큰 도움이 될지 몰라도, 내전의 양상을 더욱 혼란으로 몰아넣는 데 일조했다.

고려는 원수(元帥)도 아니고 대장이나 중장을 보내 ‘우리는 우방의 평화를 유지하려고 필요 최소한의 전력만을 투입했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실제로 움직이는 건 서부군과 서북부군, 두 방면의 군대. 게다가 지휘관 두 사람 모두 허동주, 신수덕과의 싸움에서 활약한, ‘내전 평정의 전문가’들이다.

“게레센제 칸이 즉위하고 그 자리를 지키는 데 고려군의 도움이 꼭 필요하겠지만, 동시에 고려군은 게레센제 칸의 정통성에 위협이 되죠.”

아이러니.

그리고 게레센제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도 진행 중인 테러로 인해 칸발리크는 제 기능을 못합니다. 외적으로는 그런 문제가 있고, 내적으로도 순탄치 않습니다. 낭키아스 정권 출신들이 속속 칸발리크에 입성하고는 있지만, 기존 볼로드 정권과 손발이 맞질 않습니다.”

두 정권을 합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혼란상.

뭐 게레센제도 무능한 사람은 아니니 언젠가는 수습이 되겠지. 그러나 현 상황은 칸발리크에 ‘지금 당장’ 혼란상을 수습하라 요구한다.

그런 혼란 속에, 울제이까지 개입했다. 이는 혼란에 혼란을 더한다.

“게레센제 형님이 카간 자리에 오른 건 이미 ‘굳어버린 사실’이다.”

침묵 끝에 울제이는 입을 열고 그렇게 말했다.

“굳어버린 사실을 없던 것으로 하려면 혼란을 일으켜 흔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혼란은 어디서 갑자기 찾아오는 게 아니다. 내가 직접 일으켜야지.”

게레센제가 카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흔든다.

그 말은 곧, 울제이에게 카간이 될 기회를 연다는 뜻.

한족 독립국가를 일으키고, 그 황제가 된다는 선택지는 나중에라도 고를 수 있다.

그러니 그 선택지를 고르기 전에, 다른 선택을 해 보자.

“루우 테무르와 교섭을 준비하라. 고려 황제께 협상 의사가 있는지 타진해보고 다음 단계로 옮겨가도 늦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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