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수대치(5)
작년의 고려 내전은 정치가들, 외교관들뿐만 아니라 군사전략가들에게도 큰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
미리안 정권은 어떻게 자기 지역 국민들을 동원해서 최대한 힘을 쏟아낼 수 있는지, 어떻게 방어하고, 기습하고, 기동하고, 포위하고, 섬멸하는지 제대로 보여주었다.
그 외에도 이목을 끈 전투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신환도역 전투’다.
이 사건의 해석은 각자 처한 입장에 따라 달랐다.
정치가들은 고려 내전이 빠르게 종결되고 미리안을 정권이 새로운 질서를 확립한 분기점으로 본다.
외교관들은 이때를 기점으로 미리안을 애송이가 아니라 대화를 나눠야 할 외교 파트너로 인식했다.
군사전략가들은 허동주 반군이 선보인 신병기, ‘기갑사’에 주목했다.
아직은 대량 생산되지도 않고 알맞은 교리가 확립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단의 전투력을 증가시키고 전차보다 더 유연한 활용이 가능하다. 이러한 기갑사의 특징은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전쟁’을 생각하는 젊은 영관급 이상의 관심사였다.
앞으로의 전쟁도 자신이 경험한 옛 전쟁 같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는 노장들에겐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
따라서 기갑사 관련 내용은 전선에 서는 일반 병사의 훈련 과정에 포함되지 않았고, 위관급 이하의 간부들도 별다른 언질을 받은 자가 드물었다.
“소총으론 안돼! 소총으로는! 대전차포! 대전차포 가져와!”
처음에는 전차인 줄 알았다. 후방의 포대에 좌표를 전하고 통상적인 대응을 준비했다.
그러나 움직임이 전차와 다르다. 전차가 저런 식으로 방향을 전환하거나…… 도약을 하던가?
“통신병! 본부는?!”
“계속 시도 중입니다! 하지만……!”
기갑사를 앞세운 전면적 공세. 당황스러운 건 이곳만이 아닌 듯하다.
모두가 혼란에 빠졌고, 모두가 도움을 원한다. 그리고 지휘를 맡은 자들은 대체 뭘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모른다.
본부든 어디든 계속해서 통신을 시도하는 통신병의 등줄기에 뜨끈한 물이 끼얹어졌다.
아니, 이건 물이 아니라…… 피다.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보자, 상관의 짓뭉개진 시체가 보인다.
그리고 피 묻은 칼날을 이쪽으로 들이미는 거대한 기계의 모습도.
병사는 상관 곁에서 그대로 두 동강 난 시체가 되었다. 전역 후에 하고 싶었던 소박한 일들과 꿈꾸던 미래도 그렇게 두 동강이 났다.
이런 비극은 비단 여기서만 벌어지는 건 아니었다.
칸발리크 북서부의 두 주요 도시, 옹구차트와 새너두를 잇는 방어선. 그 전반에 걸쳐서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고려군이다! 고려군이 적의 측방을 공격한다!”
“살았군……!”
감탄과 안도를 섞어 그렇게 외치는, ‘살아남은’ 사람들. 그들은 서쪽 전선에서 지원을 온 고려군이 저 낯선 기계와 어떻게 싸우는지 바라본다.
설마 고려군도 저런 기계에 속수무책으로 패퇴하는 건 아니겠지, 걱정 섞인 눈길을 던진다.
다행스럽게도 고려군은 근처에서 끌어올 수 있는 모든 전차를 다 끌고 온 것 같았다.
여기에 더해 포병의 화력까지 동원, 기갑사를 불의 장막으로 몰아내겠다는 듯이 밀어붙인다.
“……올바른 판단이다.”
냉정을 되찾은 몽골군 지휘관 하나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뱡향 전환도 전차에 비해 훨씬 빠르고, 도약까지 해대는 적의 신병기를 전차나 대전차포가 하나하나 맞출 순 없다. 쏟아부어서 움직임을 제약하고 내쫓는 수밖에.
효과가 있다.
기갑사 몇 대인가가 전투불능이 된다. 적은 한 번 더 돌진해올 듯 위협하다가 천천히 물러났다.
몽골군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피해가 적지 않았지만 전선 자체가 붕괴하는 건 막았다. 만약 전선이 무너져 옹구차트나 새너두를 빼앗기기라도 했다면, 그때는 칸발리크에서 최후의 방어전을 생각해야 했을 것이다.
“고려군에 저 신병기의 대처법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
몽골군 지휘관과 마찬가지로, 휘하 전차들을 보내 그들을 도운 조유관 역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가 생각하는 ‘다행’은 몽골군과는 조금 다르다.
“역시 이쪽 방식이 옳았군.”
신환도역 전투에서 기갑사가 처음 등장한 이후, 전략가들은 그 대응책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다.
거듭된 논쟁 끝에 기갑사 대응책은 크게 두 방향으로 좁혀졌다.
첫째는 기갑사를, 혹은 기갑사와 대등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신병기를 자체 개발하는 것.
하지만 허동주도 ‘척준경 프로젝트’를 몇 년이나 진행한 끝에 겨우 기갑사를 선보일 수 있었던 만큼,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내전이 끝나고 허동주 밑에 있던 기술자들을 흡수하고 나서야, 신병기 개발이 제대로 된 진척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근에야 약간의 개량을 거쳐 태사 직속으로 소규모 부대를 만들 수 있었다.
둘째는 기존 병기로 기갑사를 상대할 수 있도록, 그에 맞는 전술을 개발하자는 것.
조유관은 이쪽에 가까웠다. 물론 신병기 개발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따로 기술 분야에 조예가 있지 않고서야 군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다. ‘기술자들을 위한 예산을 증액하자’고 소리높이는 것 말고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군인이 해야 할 일, 전술적 고민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단순무식하게 화력을 쏟아붓는 게 효과가 있긴 하군.”
압도적 화력은 많은 경우에 정답이 되곤 한다. 다만…….
“오늘 물러간 게 우리가 잘 싸워서가 아니라, 적들의 기갑사 운용 능력이 부족해서라면, 마냥 좋아하기도 힘들겠지.”
적들은 바보가 아니다.
살아남은 사람은 생각한다. 다음번에는 당하지 않을 궁리를 한다.
“두 번 먹힐 전술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조유관은 눈살을 찌푸렸다. 적들은 어떤 대응책을 짜 올까. 그걸 짐작하고 또 그에 대한 대응책을 연구한다. 서로가 서로를 가늠하고 연구하는 나날의 연속이다.
전투 상황 보고를 정리한 종이들 위로 눈길을 돌린다.
기갑사가 지휘소까지 쳐들어와 휘저어놓은 사례도 있다.
“백병전은 꿈도 꿀 수 없겠군.”
이단, 그것도 최효윤이나 주견하, 황제 폐하처럼 강력한 자가 아니고선 어렵다.
“척후를 보강해 기갑사의 진격을 미리 탐지하고, 포병으로 어떻게든 접근을 차단하는 방식…… 으로 충분할까.”
요리조리 피하는 기갑사를 저지할 만큼 충분한 화력을 전선 전체에 걸쳐 확보하려면, 포병 전력의 보강도 필요하다.
“만약 적들이 지금 내가 떠올린 방식에 대해서 대책을 세우고 있다면?”
생각은 거기서 멈췄다. 혼자 하는 고민은 한계가 있다. 조유관은 참모들을 소집했다.
어떻게든 적을 분쇄할 방법을 생각해내고, 큰 공을 세워야 한다. 그렇게 해서 고려 정계에서 함부로 건들 수 없는 거물이 되도록.
***
동명시, 태사부의 미리안 역시 ‘자유 공화국군’에서 기갑사를 내세웠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 역시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기술 유출. 이제 너도나도 전장에 기갑사를 꺼내드는 날이 오겠군요.”
냉소하듯 그렇게 중얼거린다.
전쟁성 장관 강태훈이 그런 리안의 기분을 달래듯 진언한다.
“하지만 탑승자는 이단이어야 하고, 생산에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아서 대량 생산까지 가긴 힘들 겁니다.”
“어떤 나라든지 대량 생산은 어렵다는 조건은 같아요. 그렇다면 모두가 대등한 입장…… 우리가 ‘우위’를 누릴 수는 없다는 이야기죠.”
누구든 대등한 전력으로 견제를 주고받기보다는, 압도적 전력을 갖추고 싶어하는 법이다. 그래야 협상 테이블에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으니까.
“아즈텍에서는 일개 테러 조직이 기갑사를 보유하질 않나, 이번에는 몽골 반군이 기갑사를 전장에 내보내고. 이 역시 배후엔…….”
“……신수덕이 있다고 봐야겠죠.”
법무성 장관 류성일이 무겁게 입을 연다. 신수덕의 토벌과 암살은 전쟁성의 관할이지만, 반역자의 처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법무성도 어느 정도는 관련이 있다.
“아마 산동 토벌이 시작되기 전에 기술 제휴가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혹은 허동주가 살아 있던 당시부터 거래가 있었을 수도 있고요.”
류성일의 말에 리안은 끄덕였다.
“그 알타이 자유 공화국이라는 집단, 배후에는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 있다고 했죠.”
“그렇습니다.”
“결국에는 신수덕과 연결된 단체네요.”
“둘 사이의 거래에 관한 확실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닙니다만, 정황상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할 겁니다.”
“점점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군요.”
말은 하지 않지만, 각료들은 리안이 고려 제국의 영토 확장에 반대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외연 확장보다는 내실, 그게 리안이 내세우는 정책 방향이었다.
하지만 최근 상황은 리안이 나라 바깥의 문제에 간섭하도록 몰아가고 있다. 황제 루우가 그러했고, 지금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 그러했다.
“신수덕의 친구들이 버젓이 한 나라를 다스리게 둘 수는 없죠. 내키진 않지만 고려군의 개입 규모를 확대해야 할 수도 있겠어요.”
검토를 부탁한다고, 전쟁장관을 향해 눈짓한다. 강태훈은 믿음직스러운 끄덕임으로 응답했다.
안세규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는다. 류성일은 그런 변화를 놓치지 않고 바라봤다.
본래 안세규는 범 알타이 인민동맹을 지원해 몽골 군주정을 무너뜨리고, 황제의 활동 범위를 한정 지으려 했을 터.
그러나 그 계획은 어그러졌다. 시간을 되돌릴 재간이 있지 않고서야 망가진 계획을 붙들고 있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폐기하고 새 상황에 맞는 새 계획을 세우는 수밖에.
안세규는 아마 지금쯤 미친 듯이 요동치는 정세를 분석하는 동시에, 계획을 수도 없이 세우고 수정하고 폐기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속으로 가만히 냉소하고 있자니 회의가 끝났다. 류성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벗어 봐.”
루우는 다른 설명을 필요 없다는 듯, 딱 잘라서 그렇게 명령했다.
견하는 지금 루우 뿐만 아니라 효윤과 수영의 시선까지 한 몸에 받고 있다.
자기만 빤히 바라보는 세 소녀의 얼굴을 둘러보다, 견하는 변명하듯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부끄러운데.”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잖아. 바지를 벗으라는 것도 아니고, 가슴가리개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잊었나 본데 이 중에 두 사람은 너 쓰러졌을 때 씻기고 갈아입히면서 간호한 사람들이야.”
수영이 효윤에게 묘한 시선을 보낸다. 효윤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한숨과 푸념을 섞어 중얼거린 견하는 망설임 끝에 상의를 벗었다.
보기 좋게 붙은 근육. 그 근육이 그리는 선이 예쁘다.
전체적으로 날렵하다. 살이 좀 빠졌나 싶기도 하다. 무심코 전에 봤던 몸이랑 비교하다, 효윤은 민망함에 시선을 위로 올렸다.
하지만 민망함은 찰나다. 그런 감상을 할 틈도 없이, 뭔가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견하의 왼팔이.
견하 본인도 세 소녀의 표정에서 뭔가 심상치 않음을 읽은 듯하다. 그도 자신의 왼팔을 내려다본다.
기계 같은 질감의 왼팔.
루우가 담담한 어조로 관찰한 바를 이야기한다.
“전에는 이두근 부근까지만 그랬었는데…….”
어느새 그 기계 표면이 어깨 부근까지 올라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