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수대치(2)
어떻게 할 것인가.
동아시아 세력 균형의 붕괴.
이는 또 다른 위기를 불러오고,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을 만들고, 그에 따라 리안에게 선택을 강요할 것이다.
낭키아스와 몽골 간 완전 통합을 지켜만 볼 것인가.
혹은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낭키아스와 몽골 사이를 떼어놓을 것인가.
“키타이를 협력자로 끌어들여서 게레센제를 견제하는 방안은?”
이 경우엔 루우가 발목을 잡는다.
루우가 고려의 황제고 게레센제와 협력을 선포한 이상, 키타이의 울제이와 전면 협력하는 것은 어렵다. 그런 행동은 황제에 대한 반역에 해당한다.
루우가 갑자기 방향을 선회해 울제이와 손을 잡는다면 모를까.
“즉, 지금은 루우가 그리는 그림에 맞춰줄 수밖에 없나.”
이건 루우가 귀국하면 조율해나가야 한다. 현 상황에서 리안이 고를 수 있는 선택의 범위는 루우보다 좁다.
“게레센제가 됐든 울제이가 됐든, 자기 영지와 몽골 본토를 통합할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 고려 제국은 이를 지켜만 볼 것인가?”
스스로 물어본다. 답은 금방 나왔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세력 균형의 저울이 ‘다이온’이라는 새로운 추가 얹힌 쪽으로 기운다.
고려의 안보를 위해서라도 어떤 식으로든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루우는 ‘다이온을 해체한다’는 선택지는 고르지 않겠지.”
그러면 남는 선택지는 하나다.
고려도 다이온 연방에 참여하는 것.
그리하여 다이온 연방 안에서, 주도권을 빼앗아오는 것.
문제는 그 경우…… 고려가 오히려 동아시아를 완전히 합병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허동주와 다를 게 뭐지?”
그녀가 바라는 고려의 청사진은 독립된 국가로서의 점진적 개혁이다.
균형 잡힌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고려를 경제적, 문화적으로 번영시키는 것.
세규는 여기에 민주정의 확대를 첨가하고 싶어하지만, 뭐 그건 그 사람 몫이고.
그런데 허동주의 어처구니없는 전쟁계획처럼, 고려의 국토 확장을, 군사적 성장을, 민족적 영광을 바라는 자들이 계속해서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다.
고뇌가 리안의 머리 위를 떠돈다.
허동주를 죽이고, 신수덕을 내쫓았다고 해서 끝나는 싸움이 아니다.
그 인간들의 육신이 소멸하거나 먼 타국에 있다고 해서 남긴 ‘정신’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 정신의 계승자들이 있다. 그것도 꽤 많이.
이들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개인의 야욕을 위해, 복수를 위해, 살아남기 위해.
물론 전혀 다른 이유로 그들을 이용하는 사람도 있다.
소년, 견하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의 동기를 의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리안이 바라는 것과는 분명 대치된다.
가슴 속은 한바탕 호통을 치고 싶을 정도로 부글거리지만, 또 한편으로는 껴안고 따뜻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런 모순된 감각이 리안을 피로하게 한다.
리안은 서늘한 책상 위에 이마를 대고 엎드렸다.
“……잠깐만 쉬자.”
***
“고려 놈들이 원래 저렇게 잘 싸웠나?”
신생 공화국군 장교 한 사람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병사들의 사기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 최대한 조심하면서.
무의미한 희생을 줄이고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었기에, 무리한 공세는 퍼붓지 않는다.
그래도 아예 꿈쩍조차 안 하는 건 너무하다.
적진지를 살핀다.
아군 쪽을 향해 튀어나온 돌출부의 진지들. 아주 약간이라도 타격을 입혔을 법한데, 벌써 수복이 다 되어 간다.
-마치 이런 교전과 수복 작업의 반복이 익숙하다는 것처럼.
“그럴 만도 하지. 바로 작년에 내전을 겪은 군대니까.”
아니 올해까지만 해도 잔당들 토벌로 바빴던 고려군이다. 경험에 있어서 압도적 차이가 난다.
몽골군은 실전 경험이 있는 자는 오래 군 생활을 해 온 자들 뿐이고, 그런 자들 대부분은 최전선에 서지 않는다.
장교는 부하들에게 참호를 더욱 깊이 파고 진지를 굳건히 다지라 명령했다.
“이 싸움에서 최대한 살아남게 해서, 경험을 쌓게 하는 수밖에.”
공화국군도 빨리 경험을 쌓아야 한다. 고려군과 대등해질 수는 없더라도, 그 공격을 저렇게 굳건히 받아낼 수 있도록.
참호를 돌아보며, 걱정을 담아 한숨을 내쉰다.
“우리 조상들은 전부 유목민이었다고 하던데.”
지금도 유목민은 있다. 기병 병과도 있다. 그러나 세계를 지배하던 시절에는 모든 군인이 기병이었다고 배웠다.
그 거대한 기병 무리가 들판을 가득 채우면, 당해낼 나라가 없었다지.
하지만 칭기스 카간의 기마대가 누리던 영광의 시절은, 철도와 총기와 대포에 밀려났다.
이런 시대에 넓은 평원에서 기마대가 돌진하면, 기관총의 사격에 말과 사람이 벌집이 될 뿐이다.
이제는 몽골군도 이렇게 참호를 파고, 보병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 포병의 엄호를 기다린다.
장교는 고개를 저어 조금 서글픈 감상을 털어낸다.
“익숙해져야지.”
내일은 또 새로운 시대가 오고, 그러면 새로운 전쟁의 양상이 펼쳐진다.
살아남으려면 옛날의 영광이 아니라, 지금 두 쪽 난 조국이 아니라, 미래를 생각하고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버티다 보면…… 어떻게든 휴전협정을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상황으로 봐선 칸발리크를 함락하고 신생 공화국의 완전한 승리를 이루긴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적 역시 도저히 카라코룸을 함락하지 못할 상황으로 몰고 가서, 휴전을 생각하게끔 해야 한다.
혁명으로 시작하긴 했지만 ‘독립’으로 끝을 내는 것도 나쁜 방법은 아니다.
그게 여기 병사들 대부분을 살려서 집으로 돌려보는 방법이기도 하고.
장교는 군인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전쟁의 결말을 그렇게 생각했다.
***
쿠릴타이.
중세에는 몽골의 왕공귀족들이 모여 전쟁의 시작이나 카간의 선출 등을 논의했던 기구다.
근대 이후에는 다른 나라들처럼 의회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런 쿠릴타이가 오늘은 오랜만에 옛 역할을 되찾는다.
새로운 카간을 선출하는 자리가 된 것이다.
중세 때와 비교해 이런저런 변화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옛 전통을 폐기한 건 아니었다.
따라서 엄연히 몽골의 황족인 루우도 참석할 자격이 있었다.
그녀는 비어 있는 카간의 어좌 바로 곁에 앉았다.
어좌에는 본래 카간이 앉아 쿠릴타이의 개최를 선언한다.
게레센제는 좀 더 떨어진 곳에 앉았다.
그가 카간 자리를 계승한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이렇게라도 겸손을 표현하는 것이다.
게레센제 곁에는 그의 외아들, 열두 살 난 바이다르가 앉아있다. 낭키아스에서 방금 올라온 이 소년도 오늘 할 일이 있다.
모두들 오늘은 서양식이 섞여서 개량된 의복이 아니라, 전통 의복을 걸쳤다.
타이시인 볼로드가 먼저 앞으로 나선다. 쿠릴타이에 모인 모든 의원들에게 몽골이 처한 위기를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우리의 카간을 선출하여, 그분을 중심으로 몽골이 처한 위기를 돌파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말로 볼로드는 쿠릴타이의 개회를 선포했다.
이미 결과도, 절차도 정해졌기에 뜸을 들일 필요는 없었다.
루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좌중을 한 번 죽 둘러보고, 소녀답지 않은 뱃심으로 말을 꺼낸다.
“황금 가문, 보르지긴의 한 사람인 이 루우 테무르가 말합니다. 오늘의 이 위기는 모두가 하나가 되어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온전치 못한 상태로 분열해 있습니다.”
내적으로는 카간 중심의 입헌군주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있었다. 빈부격차에 따른 증오와 경멸의 말이 오갔다.
그 결과가 칸발리크-카라코룸 간 내전이다.
“외적으로는 또 어떠합니까. 키타이와 낭키아스는 각기 보르지긴 가문의 일원을 군주로 두고 있으나, 몽골과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몽골은 저 비열한 태평천국의 침략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그 영토와 인민을 합병할 권리를 얻었습니다만, 외세의 압력에 총독부도 아니고 독립국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숨을 들이켠다. 모두를 설득할, 가슴을 울릴 한마디를 위해.
“몽골인의 모든 적법한 땅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아직 ‘다이온 연방’이라는 이름을 내놓지는 않는다. 이 자리는 게레센제가 왜 즉위해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자리이지, 연방 창설을 비롯한 정치적 변화를 논하는 자리가 아니니까.
“그렇기에 나, 보르지긴 루우 테무르는! 숙부 보르지긴 게레센제를 차기 카간으로 지목합니다!”
게레센제가 일어선다. 그 옆의 아들 바이다르는 겁먹은 눈으로 아버지를 올려다본다.
“여러분이 나를 카간으로 추대하겠다면, 못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해볼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습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이 말은, 칭기스 카간의 삼남 우구데이가 후계자로 지목되었을 때 했던 말이다.
지금은 카간이 되는 사람의 겸손과 각오를 표현하는 관용구로 자리 잡았다.
박수와 환호.
이제 절차가 하나 더 남았다.
칸발리크의 상황이 이래서 약식으로 치러야 하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절차다.
루우가 게레센제 쪽으로 다가가 오른팔을 잡는다. 타이시 볼로드가 왼팔을 잡는다. 게레센제의 아들 바이다르는 아버지의 혁대를 잡는다.
세 사람 모두 자기 혁대는 어깨에 걸쳤다.
원래는 강건한 전사들이 카간을 ‘들어서’ 어좌까지 옮겨야 하지만, 세 사람 사이에 신장 차도 있고, 열두 살짜리 바이다르가 그런 일을 하긴 어렵다.
자연히 ‘부축’하는 듯한 모양새가 된다.
게레센제를 포함한 네 사람이 어좌까지 걸어간다. 루우, 볼로드, 바이다르는 게레센제가 어좌에 앉자 천천히 손을 놓는다.
몽골 특유의, 창 아래 종마의 말총을 가득 단 영기 ‘술데’를 들고 군인들이 들어온다.
아홉 개의 하얀 깃발. 이른바 ‘구유백기’라 불리는 것이다.
원래는 따로 성스러운 장소에서 해야 하는 의식이지만, 내전 중인 데다 하늘엔 저런 붉은 괴물체까지 떠 있으니 이렇게 쿠릴타이가 열리는 회장에서 치른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칸발리크 거리에서 선보여야 하는 각종 의식도 생략된다.
그렇지만 다들 지금 할 수 있는 것만이라도 하자는 마음이다. 의원들이 일어나 무릎을 꿇는다. 바이다르도, 볼로드도.
루우만이 무릎을 꿇지 않고 게레센제 옆에 서서, 담담하게 선언했다.
“나는 보르지긴 황실의 일원이자 카간의 가까운 친족으로서, 카간과 몽골의 ‘보호자’를 맡을 것입니다.
이에 따라 나의 나라인 고려 역시 몽골과의 우의를 영구토록 공고히 할 것이며, 몽골을 위기로부터 건져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눈치채는 자도 있고, 눈치채지 못한 자도 있다. 그리고 알지만 애써 무시하는 자도 있다.
바이다르처럼 이해하기엔 너무 어린 경우도 있지만, 많은 이들은 ‘다음 카간은 루우 테무르인가……’하고 속으로 되뇐다.
약삭빠른 인간들은 루우에게 어떻게 접근할지를 생각하겠지.
게레센제는 이미 합의된 일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씁쓸한 기분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나의 싸움이 끝났다.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