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인의 공화(16)
“솔직히, 조유관이 돌발행동을 하진 않을까, 그게 걱정됩니다.”
군 인사들과 회의를 마치고 나온 리안에게, 세규는 그렇게 말했다.
누가 봐도 조유관을 겨냥한 옥죄기다. 그것도 대장인 조유관의 부대를 중장이 뭉텅 빼앗아가 자기 밑으로 집어넣는 방식이다.
피비린내 나는 숙청까지 가진 않더라도, ‘전역 강요’라는 온화한 방식의 숙청 정도는 예상할 수 있다.
“……그때가 되면 토벌뿐이겠지만…….”
리안은 단호한 어조로 내뱉는다. 그러나 그녀 역시 또 다른 내전을 원하진 않는다.
남의 내전에 개입해, 그 남의 땅에서 내전을 벌인다면 엄청나게 꼴사나운 일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조유관에게 타협안을 들이밀어야죠.”
“전에 말씀하셨던 대로, 외무성 장관 자리를……?”
허동주의 죽음 이후 문하시중 제도는 폐지. 당연히 그 관할 기관인 중서문하성도 폐지됐다.
그 역할을 대신할 내무성 창설.
리안은 내무장관에 안세규를 임명할 생각이다.
빈자리에는 조유관을 부른다.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끝내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장관 자리는 명예로운 새 출발이기도 하다.
“이 타협안을 거부할 거라는 생각은 안 드는군요.”
조유관의 행동은 숙청당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러나 동시에 안세규를 향한 대항의식을 표출하는 것일 수도 있다. 리안은 그렇게 파악했다.
따라서 조유관은 군인으로 생을 마치기보다는, 외무장관으로서 정치 경력을 시작하는 쪽에 매력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안세규와 대결해 고려국민당의 당수가 되는 것도 내다볼 수 있다.
거부할 이유가 있을까?
“서부군에는 순종적인, 적당한 장성을 골라서 보내도록 하죠. 거긴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방금 전 회의에서 말했듯이, 서부군은 칸발리크 수호, 서북부군은 카라코룸 공략, 그렇게 역할을 분담할 것이다.
“어쨌든 폐하께서 저렇게 뜻을 드러내시고,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그 지지를 선언한 이상, 우리는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서 주도권을 쥘 필요가 있어요.”
카라코룸 공략과 몽골 내전 종결에 미리안이 주도적 역할을 하면, 이후 처리에서도 미리안의 발언권이 커진다.
“폐하의 야심을 적절한 수준에서 저지할 방안은 그뿐입니다, 이젠.”
세규가 반론할 말은 없다. 리안의 말이 옳았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내무성 창설과 장관 취임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물러나며, 세규는 입술을 씹는다.
조유관은 그의 ‘약점’을 아는 자다.
그가 중앙 정계로 들어온다.
그 전에 어떻게든 손을 쓰지 않으면…….
***
동명특별시. 태사부. 정치경찰실. 감찰국. 알타이 민족(AN) 문제 연구소.
소장 한재연.
장문의 「계획」 수정안이 견하의 손에 들어왔다. 그걸 펄럭이며 견하는 수영을 향해 씩 웃는다.
“확실히 재연이는 유능해.”
“그렇긴 하지.”
수영은 조금 우쭐할 뻔했지만, 간신히 그 감정을 얼굴 뒤로 감춘다.
“정리가 잘 됐어. 괜찮은 아이디어야. 게레센제 칸 앞에서 협상 조건으로 들이밀기에 손색이 없어.”
그 말은 감탄으로만 머물지 않았다. 견하는 곧바로 루우에게 향했고, 루우는 볼로드를 불러 정보를 공유한다.
세 사람은 그대로 게레센제에게 향했다.
아직은 쿠릴타이가 열리기 전.
따라서 게레센제도 아직은 카간으로 선출되지 못했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루우와 고려 측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쿠릴타이는 열리지 않을 것이다.
루우는 게레센제 앞에서, 그의 영지 낭키아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협상을 시작했다.
“낭키아스는 숙부님이 카간이 되시면 자연스레 몽골 본국에 통합되겠죠.”
“……그러리라 본다만, 혹시 낭키아스는 다른 황족의 영지로 분리하자고 말할 생각인가?”
“설마요. 그러기를 바라지도 않거니와, 그런 요구를 한다고 받아들이시지도 않을 거잖아요?”
카간 자리의 코앞까지 왔지만, ‘낭키아스를 포기하라’는 말을 들으면 게레센제는 귀국할 생각이다.
울제이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때는 독립국 낭키아스의 황제가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겠지.
“그렇다면 낭키아스 이야기를 꺼내는 저의가 뭔지, 알고 싶구나.”
“숙부님이 카간이 되신다 해도, 당장 두 나라를 통합하긴 어렵겠죠. 중간 단계가 필요할 거예요. 연방제가 가장 무난한 방식이겠죠. 그래서 말인데…… ‘다이온(大元)’이라는 국호, 어떻게 생각하세요?”
고려어로는 대원. 혹은 원나라라고도 부른다.
‘대몽골 제국’을 뜻하는 ‘예케 몽골 울루스’라는 말과 함께, 세계 제국 몽골을 뜻하는 국호로 쓰였다.
물론 이런 한자어 국호에는 쿠빌라이 카간의 한족 친화 정책이 영향을 끼치기도 했지만.
“……나쁘지 않구나. ‘다이온의 부활’. 낭키아스까지 포괄하는 대국의 국호로 적당한 이름이야. 하지만 국호는 그렇다 치고, 조카님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은 그 ‘연방제’에 있겠지?”
루우는 살짝 웃었다. 고려의 황제 자리는 그녀를 급속도로 성장시켰다.
이제 그녀가 짓는 웃음은 요염하기까지 하다.
정치가의 웃음이다.
“요구사항이 좀 있어요. 일단은 고려 제국도 그 ‘다이온 연방’에 참여할 거예요.”
게레센제는 눈썹을 비튼다. 조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카간과 황제가 동급임은 알고 있겠지. 조카님은 지금 몽골 카간, 고려 황제가 공존하는 이두정치 체제를 만들자고 하는 건가? 아니면……”
가능성은 없겠지만, 이라며 덧붙인다.
“고려 제국을 왕국으로 격하하고 조카님도 왕이 되어서 다이온의 제후국 자격으로 참여하겠다는 건가?”
루우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여유롭다.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카간 자리를 향해 나아간다는 부담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는 게레센제와 투쟁하고, 울제이와 투쟁하면서, ‘다이온 연방’을 천천히 잠식해 갈 것이다.
길고 힘들겠지만, 마음의 부담은 훨씬 덜한 싸움이다.
“둘 다 아니에요. 고려 제국은 당장 연방 가맹국이 되진 않을 겁니다. 그 대신 ‘참관국’ 자격으로 유예를 두고, 때가 되면 고려 역시 연방에 가입하는 거죠.”
‘때가 되면’이라는 애매한 표현.
준비를 충분히 갖추겠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루우가 원하는 때가 되면’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둘 다, ‘루우가 게레센제의 뒤를 이어 카간 자리를 계승할 때가 되면’이라는 의미를 감추고 있다.
“……만약 내가 아들, 그러니까 네 사촌 바이다르를 황태자로 세우겠다면?”
루우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는다.
이제껏 본 적 없는 날카로운 시선에, 게레센제는 등이 촉촉하게 젖는 걸 느낀다.
“그러셨다간 정말 동족상잔을 각오하셔야 할걸요? 아시잖아요. 보르지긴 가문의 피.”
게레센제의 아들 중 하나가 황태자가 된다. 즉, 게레센제는 다음 카간이 자기 아들이라고 선언해버리는 셈이다.
다음 카간이 되려는 루우에겐, 선택의 여지를 없애는 짓이다.
그렇게 되면 루우는 사촌을 죽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쓸 수 없다.
마찬가지로, 게레센제의 아들도 루우를 죽여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
단순한 궁중 암투 선에서 끝나지 않는다. 게레센제 계열과 루우 계열 사이, 보르지긴 가문의 내전으로 번져나갈 것이다.
게다가 루우는 고려군을 동원할 수 있다.
정말 그러고 싶으냐고, 루우는 눈으로 묻는다.
이는 경고이기도 하다.
“……황태자 문제는 보류하지. 좋다. 고려 제국은 다이온 연방에 ‘참관국’으로 참여하다가, 적당한 때에 가입한다. 그럼, 조카님의 지위는 어떻게 규정되지?”
“저는 다이온 연방과 카간의 ‘보호자’라는 칭호를 쓸 겁니다.”
실로 애매모호하면서 교묘하다.
‘보호자’. 그러니까 ‘보호’라는 구실로 다이온 연방의 내정에 얼마든지 개입하겠다는 말.
판단할 틈을 주지 않고, 루우는 각종 요구의 폭풍을 밀어 넣는다.
“다이온 연방과 카간의 ‘보호자’인 고려 황제는, 연방의 결속과 안전 보장을 위해 고려군을 칸발리크를 비롯한 주요 지역에 주둔시킬 겁니다. 그리고 고려군 인사들이 ‘국방’을 위한 자문을 맡을 거고요.”
요구사항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연방의회’, 이건 양원제로 구성될 겁니다. 상원 또는 참의원에는 ‘쿠릴타이’를 그대로 올릴 생각이에요. 다만 하원 또는 민의원이라고 불릴 곳에는……”
잠깐 말을 멈춘 뒤, 게레센제의 눈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웃음이다. 한 대 후려치고 싶지만.
“숙부님도 나름 낭키아스에서 기른 정객들이 있겠죠. 그들이 와서 자리를 채우면 될 것 같은데요.”
“……다른 요구는 없는 거냐?”
“고려의 ‘제국최고회의’에서 대표단을 파견, 민의원에 ‘참관’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니까 정리해보자면 이런 거다.
연방의 군. 게레센제의 낭키아스군을 어떻게 하진 못하겠지만, 고려군이 연방군을 침식해 들어오겠다는 말.
연방의 입법 기관. 기존 쿠릴타이를 참의원으로 올리고, 낭키아스에 있는 게레센제의 측근들이 민의원으로 참여한다. 참의원보다는 민의원이 권한이 강하니까 얼핏 게레센제에게 유리한 듯 보인다.
그러나 여기도 고려의 제국최고회의가 대표단을 파견, 간섭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낸다.
연방의 행정부. 이건 루우 테무르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하겠지. 아마 기존 타이시인 볼로드가 행정부를 장악할 테고, 여기서 게레센제의 입김이 닿은 자들이 추가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볼로드는 지금 하는 행동으로 봐서 게레센제의 편이라 생각하긴 어렵다.
“물론 제가 요구한 사항들은 모두 연방의 ‘헌법’에 명시되어야 하죠.”
어떻게 하실래요, 라고 조카는 묻는다.
“……나는 저 하늘에 떠 있는 것에 대한 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 균형이 안 맞지 않나?”
“그 지식의 대가로 낭키아스의 비중을 이만큼이나 양보해 드린 거예요. 마음에 안 드신다면 저는 키타이와 낭키아스를 깔끔하게 포기하고, 몽골-고려 이중 제국의 황제가 되는 수밖에요.”
물론 허세다. 그럴 준비는 전혀 되어있지 않다.
하지만 물러설 여지가 있다는 걸 게레센제에게 보여선 안 된다.
잠깐의 침묵.
눈앞의 조카를, 조카가 아니라 정적으로 판단해 노려본다.
한참 만에 게레센제가 다른 조건을 제시한다.
“연방의 군사통괄기구를 새로 창설하지. ‘연방최고사령부’같은 이름으로. 물론 그 최고사령관은 낭키아스 측 인사여야 해. 나도 안전장치는 필요하다, 루우 테무르.”
루우는 흘끔 뒤를 돌아봤다. 그 시선은 볼로드가 아니라 견하를 먼저 향했다.
-역시 이건 저 소년의 머릿속에서 나온 건가.
게레센제는 머릿속에서 주견하에 대한 경계 수준을 높인다.
루우, 견하, 볼로드 사이를 오가는 짧은 시선 교환.
고려의 황제와 그 측근은 ‘그런 조건 하에서라면 해볼 만하다’고 판단했다.
“좋습니다. 숙부님의 요구, 받아들일게요. 쿠릴타이를 준비하죠.”
산뜻하게 웃으면서, 루우는 이렇게 덧붙이는 걸 잊지 않는다.
“하지만 저 위의 ‘붉은 존재’에 대해, 쓸모 있는 정보가 나오지 않으면 다시 생각해 볼 거예요.”
조카가 작은아버지에게 투정 부리는 듯한 귀여운 어조지만, 담긴 뜻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