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인의 공화(15)
극북.
남쪽에 가을이 오면, 이곳 대륙의 북방에는 겨울이 오기 시작한다.
물론 이 지역 기준으로 진짜 겨울은 아직 오지 않았다.
빽빽하기 이를 데 없는 원시의 숲.
철도나 도로의 건설을 거부하는 토질.
도저히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없는 기후.
이 모든 사정들이 겹쳐, 몽골과 고려 양쪽의 극북방위군은 평시와 똑같이 주둔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사실 극북방위라고 해봤자 북극권을 통과해 날아오는 항공기를 경계하거나, 국경경비대를 보조해 밀입국을 감시하는 수준이기도 했고.
때문에 본격적인 충돌과 대치는 극북보다는 그 남쪽에서 벌어졌다.
“높으신 분들 사정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그냥 무사히 끝났으면 좋겠는데.”
몽골 군인 하나가 참호 안에서 웅크린 채 그렇게 투덜거렸다.
작년 고려 내전 소식을 들으며 ‘진짜 불쌍한 친구들이군’하고 생각했는데 올해는 자기가 그 ‘불쌍한 친구’가 되고 말았다.
“내가 택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고생을…….”
옆에서 다른 군인이 중얼거린다.
그 말대로였다. 자기가 좋아서 ‘공화국군’으로 소속을 변경한 사람은 많지 않다. 애초에 ‘카간을 위해 봉사한다’는 인식도 희박했다.
그냥 징병제에 따라 군대에 들어왔고, 간부들이 결정했으니까 제국이 아니라 공화국 군인이 되었을 뿐.
“고려 내전은 허동주 죽고 금방 끝났다며?”
“우리도 어느 쪽에서 누가 죽어주면 좀 빨리 끝나려나.”
“야, 입 조심해. 그러다 간부 귀에 들어가면 작살난다.”
누군가 날카롭게 속삭이며 주의를 준다. 다들 입을 다문다.
슬쩍슬쩍 눈치를 살피다, 다시 누군가가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게 금방 끝난 건 아니라던데. 처음에는 엄청나게 치고받았대. 기갑이랑 공군도 동원해서.
그러다 허동주가 못 이길 것 같으니까 고려 타이시(太師)한테 평화 협상을 제안했고, 그 협상 자리에서 고려 타이시가 기습해서 죽여버렸다잖아.”
“아니, 젠장, 그러면 그것 때문에 우리 높으신 분들도 협상 안 하는 거 아니야? 다들 허동주 꼴 날까 봐 몸 사릴 거 아냐. 아니면 서로 고려 타이시처럼 상대방 죽여버리려고 들거나.”
“그건 모르겠는데, 고려 타이시라는 여자애 이제 막 스물 넘었던데.”
“사진이랑 영화로 봤는데 되게 귀여웠어.”
“그런 애가 아주 그냥 살벌하구나.”
“근데 아까 그 말이 맞다 치면, 왜 저쪽에선 공격 안 하는 거야? 우리는 왜 또 돌격 안 하고?”
“협상 중이어서 그런가? 고려는 내전 대충 정리되고 나서도 산동에 있는 잔당 진압이다, 쿠데타다 시끄러웠잖어. 그러니까 몽골 내전은 쉽게 쉽게 풀어가 보자, 는 거지.”
“그렇게들 융통성이 있으면 정말 좋겠는데…….”
누군가의 한숨 섞인 말과 함께, 병사들의 대화가 한동안 끊어졌다.
시간이 좀 지나고, 병사들 배에서 하나둘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울린다.
때마침 참호 저쪽 끝에서부터 허리를 바짝 숙인 병사들이 달려와 뭔가를 나눠준다. 육포 조각이다.
대충 질겅이다 수통의 물과 함께 삼킨다.
조금 있으면 육포가 뱃속에서 불어서 포만감이 들긴 할 것이다.
“그, 고려군이 국경 안으로 들어왔다던데.”
또 누군가가 꺼낸 풍문에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흥안령 국경을 넘어가지고, 칸발리크 군이랑 합류했다더라고.”
“아니 그럼 왜 안 움직이고 저러고 있는데?”
포격 한 번, 총알 하나 날아오지 않는다. 신정부군이든 구정부군이든 그저 서로 노려만 보면서 대치한다.
풍문대로라면 구정부군의 전력이 우월해진 상황이니 금방이라도 공격이 들어와야 할 텐데.
“일단 도와준다고 오긴 왔는데, 고려 사람들도 외국 일에 자기네 피를 흘리긴 싫겠지. 그래서 방어만 하는 거 아냐?”
“그건 그렇겠네.”
“우리 쪽은 저쪽에 비해서 유리할 게 없으니까 가만히 있는 거고.”
“……빨리 집에나 갔으면 좋겠다.”
다시 침묵이 참호 안을 감돈다. 동의의 침묵이다.
다들 불안하게 미래를 상상한다. 이대로 ‘웃어넘길 수 있는 사건’으로 모든 게 끝났으면 한다.
하지만 동시에 금방이라도 죽고 죽이는 생지옥으로 떠밀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몸을 떨고 만다.
***
알타이 자유 공화국군 병사들의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일단 고려의 서쪽 국경선은 북쪽에서부터 남쪽까지 차례로 극북방위군, 서북부군, 서부군이 맡는다.
극북방위군이야 원래 움직이지 않고, 서부군은 조유관의 지휘 아래 몽골 국경을 통과했다. 칸발리크 정부의 볼로드가 고려의 개입을 받아들이기로 했기 때문이다.
카라코룸의 신정부가 장악한 지역은, 카라코룸을 중심으로 한 국토의 중앙부다.
반면 칸발리크의 구정부가 장악한 영토는 국토의 남쪽부터 동쪽까지. 비스듬한 초승달 형태로 신정부의 영역을 감싸고 있다.
고려 서부군은 국경인 흥안령 산맥을 지나 칸발리크군과 합류, 구정부군과의 경계선을 따라 전개하며 언제든 내려올 공격 명령을 기다린다.
물론 적의 전력이나 동맹 측의 정치적 판단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런 움직임은 별 의미 없는 희생으로 연결되기 마련이니까요.”
리안은 그 자그마한 얼굴의 큰 눈을 빛내며 그렇게 말했다.
전쟁성 장관 강태훈, 그리고 남쪽에서 삼한반도군과 협력 작전을 벌이다 수도로 올라온 김천열.
그 외 군의 주요 인사들이 태사 미리안 앞에 모였다.
그녀는 내전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다. 이제 군 내부에 그녀의 지도력을 의심하는 자는 없다.
그녀의 판단을 신뢰한다. 실제로 내놓는 판단들이 합리적이기도 하고.
“허동주는…… 뭐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겠지만 무모한 총공세로 전력을 소모했죠. 우리는 그런 어리석은 결정은 내리지 않을 겁니다.”
공교롭게도 조유관 역시 같은 판단을 한 모양이다. 군을 조심스럽게 전개하고 있을 뿐, 딱히 돌출 행동은 보이지 않는다.
아직 그의 사령부는 국경 가까이에 있다. 칸발리크로 진입하진 않는다.
“극북방위군의 방침은 평시와 같이 대기. 서부군은 조유관 대장에게 일임. 남은 건 서북부군인데, 여기는 김천열 중장이 맡아줬으면 좋겠군요.”
남쪽에서 게릴라 진압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휴가도 없이 미안합니다, 라고 리안은 덧붙였다.
김천열은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피로를 숨길 수는 없었으니까.
작년에 허동주 대신 미리안을 골랐다. 그 덕분에 살아남았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지나치게 유능하게 움직였다.
쓸모 있다는 인상을 준 탓인지 ‘황성방위군’에 배치되었음에도 삼한반도로 내려가 도우라는 명령을 받았었다.
김천열은 1930년 여름 내내 삼한반도에서 게릴라들과 씨름했다.
이제는 가을, 다가오는 겨울에 서북부에서 몽골의 반란군과 씨름해야 한다.
전공을 세울 기회가 많다는 건 좋은 일이다. 회의에 참석하기 바로 전에도 넌지시 ‘대장 진급’ 이야기를 들었다.
동기나 선배들의 질투를 염려해 완강히 거절하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대장으로 나아가긴 할 것이다.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하지만 진급은 진급이고, 일이 피곤한 건 피곤한 거다.
그리고 서북부군 지휘는 보통 일이 아니다.
“그건…… 서북부군 재건까지 포함하는 일입니까?”
본래 서북부군 상당수는 내전 당시 안세규의 철도망 교란 작전으로 각지로 흩어졌었다.
그 바람에 서북부 국경이 비었고, 몽골군이 국경 안으로 들어와 내전에 간섭할 기회를 엿보기도 했다.
내전이 끝나고 나선 기존 서북부군을 포용하고, 그들을 주축으로 재건 작업을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더디다.
쿠데타니 대공황이니 뭐니 해서 서북부군에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긴 힘들었기 때문이다.
미리안은 여기에 김천열을 보낸다. 그래서 서북부군 재건과 동시에 몽골 내전 개입까지 한꺼번에 맡길 생각이다.
“적 주력은 옹구차트-새너두 선에서 묶어두고, 우리는 서북부군을 주축으로 초원을 관통해서 카라코룸을 공략하는 작전을 짜고 싶은데 말이죠. 가능할까요?”
조유관의 서부군이 아니라, 김천열이 이끄는 서북부군이 카라코룸을 공략했으면 좋겠다는 말.
글쎄. 몽골군, 고려 서부군과 합동 작전이라면 모를까 서북부군만 전면에 내세워선 좀 어렵지 않을까.
작전 실행의 어려움을 입에 담으려던 순간, 리안이 덧붙인다.
“서북부군 앞쪽으로, 그러니까 몽골 동부에 전개한 서부군을, 서북부군 밑으로 재편할 수 있는 권한을 드릴게요.”
그거라면 될지도 모르겠다. 김천열은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다.
예나 지금이나 구성원이 바뀌었을 뿐 서부군의 무장과 훈련 정도는 상당하다. 이들 중 일부를 서북부군으로 편입할 수 있다면 재건 시간은 크게 단축된다.
카라코룸 공략을 위한 전력이 크게 증강되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김천열은 슬쩍, 전쟁장관 강태훈의 얼굴을 바라본다. 장관은 간결하게 끄덕였다.
그건 태사의 명령을 받들라는 뜻이자, 동시에 여기에 어떤 ‘정치적 판단’이 개입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동작이다.
조유관 대장, 위태롭게 굴더니 결국 이렇게 가는 건가.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사람인데.
“……충분히 가능합니다, 각하.”
자신도 조유관 옥죄기에 동참하게 됐다.
그 씁쓸함을 삼키며, 김천열은 구체적인 작전 실행 방안으로 화제를 돌린다.
“‘칸발리크’ 문제 해결에는 제가 나서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그 부분은 따로 처리 방안이 있습니다. 몽골 수도의 문제니까 몽골 정부와…… 섬세한 협상을 주고받아야겠죠.”
“칸발리크와 카라코룸이 합의를 볼 가능성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안 장관 말로는 ‘유감스럽지만, 전면적인 내전은 피하기 어렵다’고.”
“그럼 오직 군인의 일만 남는군요.”
더 큰 정치적 문제에는 나서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군. 김천열은 그 점에 안도한다.
“그럼 저는 곧바로 서북부군 재건과, 적 전선 돌파, 카라코룸 제압 작전에 나서겠습니다.
다만 걱정되는 점은 적 전력인데…… 카라코룸 일대는 돌아가신 카간 폐하의 정책으로 상당한 수준의 공업화가 진행됐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마치 미리안 일가의 본거지인 상경 일대, 동북부와 같은 요소다.
미리안은 이 공업지대를 확보하고 있었기에 점차적으로 허동주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다.
게다가 카라코룸은 아시아 대륙 한가운데 위치해, 상당히 정비된 철도망의 중심이기도 하다.
고려의 동북부보다 더욱 거대한 산업지대라 볼 수도 있다.
“장기전으로 끌면, 불리해지리라 생각됩니다. 지금은 내전에 개입하는 양상이지만, 만약 그 ‘신생 공화국’이라는 녀석들이 국가규모의 총동원 체제를 완비하면, 국가 대 국가의 전면전과 다를 바 없어질 겁니다.”
그러니 서북부군 재건을 마치고 작전을 전개한다는 ‘순차적’인 방식은 쓸 수 없다.
“그랬다간 겨울이 오기 전에 절대로 공격 준비를 마칠 수 없습니다. 겨울이 오면 작전 자체도 어려워지고, 월동 장비 보급에 또 한세월입니다.”
이건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지만, 이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서부군 일부의 편입과 카라코룸 방면 진격을 동시에 진행하겠습니다. 제 밑에서 제 지휘를 받는 ‘습관’을 들이는 수밖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