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인의 공화(12)
배영훈 중령은 지휘소로 쓰는 장갑차 위에서,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뭐 이런,”
그 뒤로는 말을 잇지 못한다. 표현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도산서원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기괴한 광경을 수없이 봐 왔다고 자신했지만, 이건 너무했다.
칸발리크 시내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검은 하늘과 붉은…… 무언가.
“중령님, 선두의 기갑사 쪽에서 보고가.”
부관의 말에 배영훈은 시선을 내렸다.
“뭐지?”
“두통과 메스꺼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휴식을 상신한다고.”
“……허가한다.”
기갑사 기술은 지난 1년간 상당한 개량을 거쳤다.
성능을 대략적으로 유지하면서도 탑승한 이단의 정신건강을 헤치지 않는 쪽으로.
그래도 기갑사에 탑승한 이단의 감정표현이 둔해지는 걸 완전히 막을 순 없었다.
기-칠정이 마모된다고 하던가.
즉, 그런 사람들이 ‘고통’을 호소했다면 상당히 심한 것이다.
그 호소를 무시하면 좋지 않다. 배영훈은 즉각 휴식을 허락했다.
되도록 하늘 위의 저것을 쳐다보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후…….”
그도 장갑차에서 내려 휴식을 취한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임무가 변경되어서 다행이야.”
솔직히 자신이 없긴 했다.
주견하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사의 명령을 밀어붙이는 모습을 ‘연기’할 수는 있지만, 그 뒷일을 감당할 용기는 없었다.
게다가 주견하의 성격상, 하늘에 저런 걸 두고 어떻게 귀국하냐고 할 게 뻔했고.
“정치 상황 변동이 군인에게 좋은 일이 되는 법은 별로 없지만 말이지.”
부관에겐 흘리듯 그렇게 말한다.
공산당, 사회민주당의 갑작스러운 충성 발언.
그들이 황제 폐하의 몽골 카간 자리 승계를 지지한다고 선언한 뒤, 태사도 뒤따라 지지를 표명했다.
제국입헌당, 고려국민당 모두.
그리고 곧바로 변경된 임무가 배영훈에게 내려왔다.
-칸발리크에 주둔, 주견하 대령 및 최효윤 준장과 합류. 황제 폐하를 보좌하며 현장 지휘관의 판단에 따를 것.
이 경우 ‘현장 지휘관’이 누구인가가 문제다.
당연히 배영훈 본인은 아닐 테고, 주견하 또는 최효윤일 것이다.
황제 폐하일지도 모르지.
민간인이긴 하지만, 폐하께서 지휘를 맡으시겠다고 했을 때 그 점을 지적할 군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누가 됐든 이젠 변한 정책을 따라서 움직여야 하나.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다. 자신의 인생도 참 파란만장하다. 그냥 무사히 군 생활을 마치는 게 목표였는데, 어느새 여기까지 오다니.
“뭐가 어디서 어떻게 꼬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하자. 부품답게.
하지만 완전 마모되어 떨어져 나가기 전에, 기름칠이라도 좀 해둬야겠다고 배영훈은 생각했다.
***
배영훈과 경례를 주고받은 뒤, 견하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몇 번이고 반복한 설명을 다시 늘어놓았다.
“카간 자리는 일단 게레센제 칸에게 돌아갑니다.”
“……그게 무슨?”
본국에서 태사가 갑자기 입장을 바꾼 것도 그에겐 큰 정치적 변화였는데, 칸발리크의 변화는 훨씬 더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견하는 인내심을 갖고 차근차근 설명하기로 했다.
“아직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다는 게 황제 폐하와 감찰국의 판단입니다. 폐하는 일단 게레센제 칸의 즉위를 지원하면서, 다음 계승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로 하셨죠.”
“……폐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야. 그러면, 다른 문제입니다만, 저건 어떻게 합니까?”
배영훈은 손가락을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물론 견하는 그가 천장 너머 그 ‘붉은 존재’를 가리킨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건 좀 있다가 이야기해 드리려고 했는데.”
견하는 미간을 손끝으로 만지다가, ‘기밀 유지하십시오’라는 말과 함께 설명을 시작했다.
배영훈은 ‘기밀’이라는 말에 바짝 긴장하며 견하의 말을 듣는다.
“저 ‘붉은 존재’의 출현 원인, 게레센제 칸이 알고 있답니다.”
“게레센제 칸이……!”
“뭐, 그쪽 주장으로는 그렇다는 거죠. 자세한 건 와서 하는 말을 들어봐야 알겠지만.”
아니, 그럼…… 배영훈의 머리도 돌아간다. 대충 상황이 짐작된다.
“혹, 칸발리크 문제의 해결 때문에 카간위를 양보하신 건……?”
“그런 측면도 있다는 걸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견하는 양 손바닥을 펼쳐 보인다. 별수 없지 않냐는 듯한 몸짓이다.
“이런 도시에서 우리 폐하를 카간으로 옹립할 수는 없잖아요?”
일단은 칸발리크 문제를 해결하고, 그다음에 몽골 전체의 문제를 해결한다.
카라코룸에서 ‘알타이 자유 공화국’이라고 떠들어대는 역적들을 제압해, 몽골을 일단 안정시켜야 다음 일을 진행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잡음들은…… 게레센제 칸에게 넘길 생각이지만.”
배영훈은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도저히, 고등학교 3학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주도면밀함이다. 이 소년과 충돌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든다.
“그럼 이대로, 게레센제 칸이 올 때까지 대기입니까?”
“그렇긴 한데, 도착하면 경호를 맡을 부대가 필요해요. 데려오신 병력…… 장갑차나 기갑사, 좀 빌릴 수 있겠죠?”
“가능합니다.”
“게레센제 칸에겐 ‘철통같은 경호’가 필요합니다. ‘우리 병력의 경호 속에 안전하게 모셔야죠’.”
주견하의 말이 암시하는 바에, 배영훈은 침을 삼킨다.
긴장의 연속이다.
이 인간은, 게레센제 칸의 납치도 서슴지 않을 생각이다.
“게레센제 칸이 도착하면 쉴 시간은 더 없을 거예요. 그때까지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두세요.”
***
카라코룸, 신정부의 청사로 쓰이는 시청에선 암살자들의 성과를 검토하고 있다.
“반항적 지휘관들의 처리는 성공적입니다. 지휘관이 제거된 부대들 대다수는 혼란에 빠져 있거나, 결국 우리 신정부에 충성할 것을 밝혔습니다.”
“혼란에 빠진 부대에도 새로운 장교를 파견, 장악은 순조롭습니다. 전력은 크게 증강될 겁니다. 이제 빠른 재편을 마치면, 전선을 정리하고 칸발리크 정권과 맞서기 위한 큰 고비는 넘기는 셈입니다.”
“우리들의 선배, 허동주의 가르침이 참 많은 도움이 되는군요.”
누군가의 말대로였다.
적 지휘관을 제거하여 한 부대를 ‘참수된’ 상태로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머리를 잃은 부대를 흡수하며 세력을 불려 나간다.
모두 허동주에게서 배운 것이다.
다들 안도할 뿐만 아니라, 이미 다 이기기라도 한 듯 희색이 만연하다.
그러나 좋은 소식만 전해지진 않는다.
“고려의 서부군, 국경을 통과했다고 합니다!”
“……구정권은 외세까지 끌어들이는 건가…….”
겉모양은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
물론 저쪽에는 ‘시레문의 딸인 루우 테무르가 자기 군대를 동원해 아버지의 나라를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우겠지만.
그러나 칸발리크 정부의 ‘외세 의존’을 비난하는 성명이, 고려군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 주진 못한다.
“서부군의 지휘관, 조유관의 능력은 작년 고려 내전에서 충분히 입증됐습니다.”
“으음…….”
통령, 무에투켄은 근엄한 신음을 흘린다. 각료들은 그 눈치를 살피다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동쪽은 방어로 일관하면서, 칸발리크의 공략을 서둘러야 하지 않을지요?”
“그러긴 해야겠지만 역시 ‘시간’이 부족합니다.”
시간.
무엇을 하든 늘 필요한 것이다.
항상 모자란 자원이기도 하다.
작년 고려 내전에서 미리안도 그러했다. 예비군인 광군을 동원하고 물자를 생산하며 전선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걸 확보한 미리안은 승리했고, 그 제한된 ‘시간’ 안에 필요한 결단력을 보여주지 못한 허동주는 패배했다.
허동주가 아니라 미리안이 되려면, 카라코룸 신정부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시간을 벌 작전이 하나 더 필요합니다.”
“마련된 대책은 없습니까?”
“시간이 지나면 상황은 더 악화됩니다. 고려뿐만 아니라 키타이, 낭키아스까지 남쪽에서 달려들기 시작하면……”
‘끝장이다’라는 말은…… 어떻게든 삼킨다.
“그럼 그런 상황을 막고, 적의 주의를 분산시킬 대책을 세워야겠군요.”
범 알타이 인민동맹 출신 관료가 그렇게 입을 연다.
하지만 그 말투는, 당황했다기보다는 ‘이미 그런 대책이 세워져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당연히 다른 각료들도 그런 눈치를 알아채고 시선을 보낸다.
“복안이라도 있으신지……?”
“이럴 때를 대비해 하나 세워둔 게 있긴 합니다. 지나치게 큰 혼란을 불러올 수 있고, 또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긴 뒤의 뒷수습’에 대한 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은 터라, 과연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며 그는 통령 무에투켄의 얼굴을 살핀다. 노인은 말해보라는 듯 끄덕였다.
“산동에서 신수덕이 대규모 학살을 자행할 때, 그에 착안해서 세운 계획입니다. 신수덕의 참혹한 악행 때문에, 그간 키타이나 낭키아스에서 몽골인 정부와 협력하던 많은 친몽파(親蒙派) 단체들이 큰 타격을 입었죠.”
고려령 산동 내 친려파 단체들이 안전과 이익을 미끼로 한족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듯이, 이 친몽파 단체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영향력을 키워왔다.
말하자면 제국과 식민지 주민들 사이엔 ‘복종만 하면 이익을 준다’는 신용거래가 성립됐던 상황.
신수덕은 그 신용을 무참하게 깨버린 것이다.
“친몽파 단체들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감소하고, 그 대신 독립투쟁파가 기승을 부리게 됐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저희는 이 ‘독립투쟁파’와 연락 정도는 주고받는 관계를 구축해 왔습니다.”
요컨대, 몽골 황실이라는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어색한 동맹 후보’를 물색해뒀다는 말이다.
“물론 저들 눈에는 우리나 고려인 신수덕이나 똑같이 ‘식민지배세력’일 겁니다. 완전히 믿진 않겠죠.
그러나 일차적으로 독립을 위해 서로 이용하는 관계 정도라면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보였습니다.”
각료들 사이에서 오오, 하는 감탄사가 퍼진다.
그러나 통령 무에투켄의 표정은 변하지 않는다.
역시, 나이만큼 노회한 정치인인가. 인민동맹 출신 각료는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잇는다.
“따라서 이들에게 ‘몽골 내에서 우리가 적의 발을 묶어주는 지금이 독립의 적기다, 일제히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하라’고 신호를 주면, 즉각 폭동을 일으킬 겁니다.
그러면 오히려 저들이 키타이와 낭키아스의 발을 묶어주는 동안, 우리가 시간을 벌겠지요.”
키타이와 낭키아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몽골령 산동이나 고려령 발해도도 마찬가지 문제에 휩싸인다.
적의 전력과 주의가 분산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의 혁명과 저들의 봉기가 모두 성공할 시, 저들을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수교를 맺어주겠다는 약속도 있어야겠습니다. 다만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그 이후는 장담할 수 없다.
독립된 한족 국가가 대체 어떤 성향을 띠고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동아시아의 정세가 어떤 식으로 요동칠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최후의 수단.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모두가 마른 침을 삼키며 늙은 통령의 얼굴만 본다.
늙은 통령은 자신의 결정이 ‘말년의 망령’으로 평가되지는 않을지, 그런 오점을 남기진 않을까 두려웠다.
그러나 일단 통령 자리를 수락한 이상 결단은 내려야 한다.
신생 공화국의 생존을 위해선 다른 방법이…… 없다.
이윽고 노인의 무겁게 처진 입이 열렸다.
“……계획을 승인하오. 실행하시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