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인의 공화(11)
이는 작년 미리안의 ‘혁명군 사령부’를 연상케 한다.
“우리의 전력을 국내 문제, 그것도 동쪽과 동남쪽 경계에만 투입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안심되긴 합니다.”
통령 무에투켄은 느긋한 어조로 말하고, 각료들도 그 말에 느긋하게 동의한다. 혁명을 향한 격한 열정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듯한 모임.
어떻게 보면 참 안일하다고 혀를 찰 수도 있지만, 범 알타이 인민동맹은 딱 이 정도의 모습에 만족했다.
괜히 주도권을 쥐어보겠다고 날뛰는 것보다는, 일은 인민동맹에 맡기고 후방에서 안정에 힘써주는 편이 고맙다.
“그래도 아직은 전선이 온전히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각지에 주둔한 부대들 중에는…… 카라코룸 근방의 부대들은 신 공화국 정부를 지지하는 쪽도 많습니다만, 먼 곳에 있을수록 어느 편에 설지 거취를 정하지 않은 부대가 많습니다.”
전선은 분명한 편이 좋다. 후방은 후방, 전방은 전방. 이렇게 분명해야 행정과 군사를 비롯한 모든 면에서 일관된 정책을 내세울 수 있다.
여기저기 정신없이 아군과 적군이 뒤섞여 버리면 혼란에 혼란을 거듭한 끝에…… 대체 왜 망했는지도 모르고 멸망하게 된다.
“서둘러 신정부에서 해당 부대들의 충성 여부를 물어야 합니다. 또 그러고 나서도 칸발리크에 양다리를 걸친 건 아닌지 감시하고, 충성을 거부하는 부대는 토벌해야죠.”
“우리가 이미 확보한 부대들로 압박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습니다. 신정부에 복종하지 않겠다면, 강제로라도 따르게 해야죠.”
“하지만 그러다가 정작 카라코룸은 텅 비어버리는 것 아닙니까? 역사 속 혁명 정부들이 본거지를 비웠다가 반혁명 세력에게 허무하게 당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최후까지 정부를 지킬 정예부대는 남겨두었지요. 다만 정부 자체를 지키는 병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경호 인력까지 세심하게 지휘하기엔 다소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 모두, 자신이 정부 요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경호 지침에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무모한 행동은 절대로 삼가십시오.”
허무하게 암살이라도 당하면, 그 개인에게는 비극이지만 신정부에는 큰 손실이다.
대외적으로도 요인 하나 제대로 못 지키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정부라는 인상을 준다.
그때는 기회를 엿보던 이리 떼들에게 물어뜯길 뿐.
누군가 의아한 얼굴로 질문을 던진다.
“카라코룸을 지키고, 주변 부대를 압박해 충성을 받아내고, 전선을 형성할 부대들, 다 어디서 샘솟는 겁니까?”
이제 막 신정부에 참여한 인사의 질문이다. 그는 모든 게 착착 진행되는 모습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계획의 진행에는 늘 그렇듯이 돈이…… 필요했으니까.
“아 그건, 우리 알타이 자유 공화국의 첫 국가 기밀이라고 해두죠.”
범 알타이 인민동맹 출신 관료가 그렇게 말하며 희미한 미소를 흘렸다.
농담처럼 능란한 말 돌리기였지만, 정말로 알려줄 수도 없고 알려줘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무기를 사들여 비축하는 건, 물론 대부분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수완이었다.
하지만 그 돈은 인민동맹의 사상에 동조, 몰래 지원해왔던 정치가나 명문가의 수장들, 기업가들로부터 나왔다.
그 돈의 출처가 밝혀지면 그들은 죽는다. 칸발리크 정부는 틀림없이 그렇게 할 것이다.
미리안이 허동주에게 협력한 기업가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듯이.
그 밖에도 밝히지 못할 것들은 많다.
이를테면 시위대, 혹은 행동대원들을 어엿한 ‘시민군’으로 길러내기 위해선 무기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고려의 외무장관 안세규나, 그의 지시를 받은 조유관 대장은 비밀리에 군사고문단을 파견, 시민들을 훈련하는 법이나 군을 지휘하는 법을 가르쳐줬다. 보다 잘 훈련된 군대를 상대로 싸우는 법도.
비록 몇 달 뿐이었지만, 무기보다도 그런 인적 지원이 훨씬 더 고마웠다.
지금은 고려의 군사고문단 모두 고려로 철수한 상태.
그러나 그들이 남긴 가르침 덕분에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간부들은 어찌어찌 시민들을 시민군으로 급조해서, 필요한 곳으로 파견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로 정예한가에 대해서는 제쳐두더라도, 규모만큼은 확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순순히 충성할 부대는 염려할 것이 없고, 압박해서 충성을 받아낸 부대는 병력을 다른 부대로 분산 배치하고 지휘관을 감시하면 되겠지. 하지만 끝까지 복종하지 않고 저항하는 부대는 어떻게 할 셈이오? 토벌할 건가?”
늙은 무에투켄이 묻는다. 인민동맹 출신 각료가 통령의 질문에 답한다.
“토벌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통령 각하.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칸발리크의 구정부와 대결할 준비를 갖춰야 합니다.”
전선의 분산, 병력의 분산, 준비의 미흡. 허동주가 내전에서 패배한 원인이다.
병력의 집중, 규모의 확대, 무자비한 속도. 미리안이 내전에서 승리한 원동력이자…… 세계대전 당시 허동주가 군벌로 성장하고 태평천국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승리와 패배 모두, 허동주에게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선배의 성공과 실패로부터 배울 것이다.
작년 고려에서 진행된 내전은 정말로 많은 ‘교훈’을 주었다. 그 세세한 진행과정 모두, 학습에 필요한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오? 무시하고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소? 그런 부대들이 향후 공화국의 승리에 큰 걸림돌이 되리라는 건, 굳이 군사 전문가가 아니어도 알 수 있소.”
“물론, 대책은 있습니다, 각하. 각하께는 따로 보고드리겠습니다만, 역시 기밀이기 때문에 다른 각료분들껜 알려드리기 어렵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범 알타이 인민동맹을 지원했던 사람들 중 일부가 칸발리크 정권에도 그대로 남아 있듯이, 이 카라코룸 정부 안에도 내심 구 정부에 항복할 궁리를 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혹은 둘 사이에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자들이거나.
그런 자들에게 비싼 정보를 던져줄 순 없다. 물론 배신자라고 해서 굳이 색출해낼 생각도 없다.
배신할 생각 자체를 거둬들이도록, 자유 공화국이 압도적 승리를 거둬 나가면 되니까.
***
인민동맹은 토칸이 그저 유능한 행동대장이면서, 동시에 암살자라고만 알고 있다.
두 가지 분야에서 모두 재능을 보인다는 건 상당히 드문 일이고, 그 때문에 주목받기도 하지만, 토칸은 조직 내에서 더 위로 올라가는 건 한사코 사양했다.
-현장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게 더 좋다.
그런 핑계를 댔다.
다른 사람들은 괴짜라고 부르면서도, 호의적으로 대해주었다.
당연한 반응이다. 편안한 데 안주하기보다는 몸을 움직이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더 호감을 느낀다.
이번에 혁명이 터지면서 그 공로가 너무 컸기에, 반쯤 강제로 위로 올라가게 됐지만…… 어쨌든 토칸은 적절한 선에서 멈췄다.
실상은 그가 겸손하기 때문도 아니고, 현장 일이 좋기만 해서도 아니다.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크…… 윽, 흑, 하……”
엄청난 고통에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남자는, 간신히 엉덩이를 뒤로 밀어붙이며 토칸에게서 멀어지려고 했다.
남자는 신생 공화국에 복종하지 않는, 여전히 저주스러운 카간 제도에 충성하는 한 장군이었다.
알타이 자유 공화국 정부에서는 남자와 같은 이들을 ‘반항적인 지휘관’이라 불렀다.
하지만 토칸은 좀 더 경멸을 담아,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카간의 개’라고.
“당신의 부하들은 당신이 이 지경이 됐는지 모르겠지. 아니, 당신도 부하들이 어떤 지경이 됐는지 모르잖아. 그러니까…… 가르쳐줄게.”
웃으며 한 걸음씩 다가서는 토칸을, 장군은 올려다본다. 눈이 심하게 흔들린다.
그걸 보면서 토칸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설명이 필요 없나? 대충 눈치챈 건가? 그래, 장군 계급 정도면 알겠지. 당신 부하 장교들, 참모들은 죽었어. 고통스럽진 않았을…… 거라고는 도저히 못 하겠군. 고통스러웠을 거야. 살고도 싶었을 거고.”
토칸의 양손은 하얗게 물들었다.
그뿐이었다면 특이한 피부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절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열 개의 손가락이, 모두 촉수처럼, 채찍처럼 길게 늘어나 있었으니까.
장군의 눈길은 이제 토칸의 손 쪽으로 향했다.
“아, 이건 말이지, 장군. 돌아가신 위대한 카간 폐하께서 내게 선물해주신 거야. 물론 카간께선 나라는 실험체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셨겠지. 과학자나 시설 책임자들에게 앉아서 보고나 받으시면 됐을 테니까.”
아주 잠깐, 같은 실험체였다가 실험 과정에서 죽어 나갔던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아니 떠올리려고 애쓰지만…… 이젠 기억도 안 난다.
대신 비명과 울음소리만 선명하게 귓가에 울렸다.
“나는 운이 좋은 실험체였지. 살아남기는 했지만 실패했다고 판단됐거든. 실험이 요구하는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질 않아서 말이야.
쇠약해지긴 했지. 죽일 약물이나 총알, 전기도 아까웠던 건지 그들은 나를 그냥…… 어디 빈민가 구석에다 버렸어.”
그리고 그때, 정말 얄궂게도, 토칸의 몸에 변이가 일어났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이런 암살자를 보내주신 카간의 성은에 감사하라고, 장군.”
곧게 뻗어 나온 열 개의 촉수가 장군의 몸을 꿰뚫었다.
토칸은 아직 죽지 않은 장군과, 똑바로 눈을 마주친다.
토칸은 양팔을 벌렸다. 장군의 몸 역시 그렇게 벌어져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
찢어진 시체에서 튄 피를 짜증스레 닦으며, 토칸은 장군의 집무실 책상에 앉았다.
“남의 물건을 허락도 없이 쓰는 건 좀 그렇지만, 이젠 허락해주고 싶어도 못 하잖아?”
시체에 한 번 조롱을 날려주고, 펜을 들어 생각을 정리한다.
죽인 사람과 죽일 사람을 정리한다. 기억력은 자신 있다.
중요한 건 앞으로 어떤 순서로 죽일 것인가. 또 어떻게 죽일 것인가, 다.
토칸 말고도 다른 암살자들이 사방으로 파견됐다. 서부, 북부, 남부로.
토칸은 동쪽, 정확히는 동남 방향이다.
최종목적지는, 칸발리크.
그 안에서 구정권의 주요 인물들을 암살하라.
물론 이는 선택 사항이고, 여의치 않을 때는 신정부 장악 지역에서만 암살 임무를 수행하고 귀환하라는 게 명령이다.
“하지만…… 이 이름은 왠지 끌려.”
주견하.
얼마 전에 칸발리크로 들어와, 루우 테무르 공주를 카간으로 만들려 움직인다는 남자.
“너도 이단이라지?”
하지만 이단임을 감추는 토칸과 달리, 그는 자신의 능력을 한껏 드러낸다.
동명역 쿠데타 진압의 참혹함에 대해서는 토칸도 들었다.
보고에 따르면 그의 왼팔은 최근 이상한 변이까지 일으켰다고 한다.
토칸은 정권의 그늘 밑에서 움직이고,
주견하는 정권의 중심부에서 활개 친다.
대칭이라도 이루는 듯한, 두 사람의 행보.
“만나보고 싶군.”
호기심.
펜을 종이에 톡톡 두드리다, 토칸은 결심한 듯 웃었다.
“얼굴이나 한번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