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인의 공화(10)
작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고, 견하는 생각한다.
효윤도 견하를 추궁하듯 몰아붙이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다.
“언니를…… 각하를 위해달라고, 부탁했었잖아.”
그 약속은 두 번 했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처음으로 자기 방에 여자애들을 들였던 그날 밤.
시원하게 뻗은 효윤의 다리, 향기, 창밖에서 비쳐드는 불빛.
그리고 모든 것이 바뀐 그 참사가 일어나기 직전, 견하가 아직 ‘소년다웠던’ 그때 했던 약속.
또 한 번은 견하와 리안이 처음으로 입을 맞추고 난 후, 효윤이 견하의 마음을 물었을 때, 그때 했던 약속이다.
간신히, 견하는 반격으로 들어올 말을 예상하면서 답한다.
“리안 누나를 위한 일이야.”
“언니는 모른다는 말이구나.”
견하는 이를 악문다.
선.
악.
그 모든 걸 떠난 일이다.
그의 부모님은 선한 사람이어서, 그 암살자들은 악해서, 그런 결과를 빚은 게 아니다.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힘 - 권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강대한 권력이 있었다면, 감당할 수 없는 보복을 당하리라 적들을 두렵게 할 수 있었더라면.
견하 뿐만 아니라, 이제 견하에게 남은 소중한 사람들,
리안,
효윤,
루우,
지나.
친구들을 지키려면 권력이 필요하다.
권력이 끌어모은 인간들이 필요하다.
그 인간들로 이루어진 철혈의 요새가 필요하다.
일종의 강박.
그 강박을 눈에 담아 소년은 소녀를 쏘아본다.
“태사 각하를 위한 일이야. 나는 여기에 어떤 의구심도 품지 않아. 후회도 회의도 없어. ……속상하게 할지는 모르지. 하지만 결국 이해할 거야.”
누가? 누가 이해해준다는 거야? 효윤은 그렇게 되묻지 않는다.
그저 슬픈 눈으로, 자신이 어떻게 설득해볼 수 없는 곳까지 나아간 소년을 본다.
“……너 지금, 너 스스로는 리안 언니를 위한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내가 보기엔 그냥 너 하고 싶은 일을 밀어붙이는 것 같아.”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말끝에 울음이 조금 섞인 것 같다.
자신이 추하게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다.
견하는 효윤의 그 말에 시선을 떨궜다가,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말한다.
“누나한테는 오늘 있었던 일까지 보고해도 괜찮아. 내가, 감당할 테니까.”
견하가 아직 격한 감정을 가라앉힐만한 분별력이 있다는 점에 감사해야 할까.
효윤은 아무 말 없이 소년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잘 자.”
소년이 인사한다.
“……그래.”
효윤은 자신의 목소리가 이렇게 잠겨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효윤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자기 방으로 향했다.
루우가 했던, 견하의 ‘이상 상태’를 되뇌며.
되뇔수록 자신의 가슴이 죄어드는 것을 느끼며.
***
견하를 바라보는 효윤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루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홀로 방 안에 남아서도,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심각한 대화가 오가리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내 카간위 계승 문제를 두고 다툴 거야.”
씁쓸하게 중얼거린다. ‘친구들’ 사이의 다툼은 그녀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정이나 야망이냐를 묻는다면, 그녀 역시 야망을 택하는 사람이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견하에게 감사해야겠지.”
물론 견하가 최우선으로 삼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리안일 것이다.
그래도 이 고마움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 생각보다 약하구나.”
부황, 시레문 카간의 죽음에 이토록 흔들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솔직히 아까 견하의 말에 대답한 것도 겨우겨우 한 거다.
그런 자신을 붙들어주고,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벌어준다.
카간으로 바로 나가라고 다그치는 게 아니라, 우회할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루우는 이번엔 씁쓸하게 웃었다.
“……타이시가 왜 좋아하게 됐는지 알 것 같네.”
의지가 되는 남자, 기댈 수 있는 남자.
아무리 의지를 다지고 또 다진 사람이라 해도, 약한 부분은 있기 마련이다.
그 약한 부분, 덧난 상처를 덮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마음이 끌릴 수밖에 없다.
견하의 그런 면모는 어쩌면…… 그에게 일어나는 여러 이상 현상 중 하나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시레문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나니, 루우는 견하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견하가 리안을 이해한 것처럼.
그러니까 어쨌든, 고맙다.
그리고 그 고마움은 곧 ‘미안함’으로 바뀌어 갔다.
리안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실.
“류성일과 안세규가 꽤 오래전부터 제휴하고 있었다는 것…….”
그걸 견하 앞에서 계속 감춰도 되는 걸까.
리안에게는 ‘안세규가 4월 1일 전용열차 습격을 기획했다’는 암시를 줬다.
그 정보는 견하에게도 들어갔을까?
그게 확실하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 그저 자신이 미안하다는 이유만으로 ‘류성일과 안세규의 제휴’ 정보를 알려주면……
리안과 견하 사이는, 끝장날지도 모른다.
“적어도 견하가 감찰국, 아니 정치경찰실 전부를 동원해서 법무성과 외무성을 작살 낼 건 확실해.”
리안은 그걸 두고만 볼까?
아니.
리안은 그 점에서는 굉장히 엄격한 사람이다.
견하의 복수보다는 국가의 안정성을 우선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파탄…… 까지는 아니더라도 두 사람 사이는 삐걱일 것이다.
“친구들, 연인 사이를 망치고 싶진 않아.”
아직은 침묵해야 하나.
혹은 귀국해서, 리안과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류성일에게 언제쯤 벌을 줄지, 견하에게 언제 복수의 기회를 줄지는, 그녀가 결정하겠지.
그럼, 다른 문제로 넘어가 보자.
서부군을 지휘하는 조유관이 움직인다.
그건 이미 예상할 수 있었던 움직임이지만, 고려 내 범좌익의 행보는 예상치 못했다.
“이쪽은 마냥 감사할 일은 아니지…….”
저쪽도 노리는 바가 있으니 그런 행동을 할 것이다.
견하의 말대로 자기네 지지율을 높이는 게 가장 큰 목적일 터.
“그런 욕망도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해야지.”
하지만 그들과 끝까지 공존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들지 않는다.
바라트 공산당과 달리 ‘점진적 개혁’으로 노선을 잡았다 할지라도, 위험성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그들이 고려국민당, 제국입헌당 모두 물리치고 정권을 잡는 날이 오지 않도록, 적절히 균형을 잡아야 한다.
그런 날이 오면 혁명을 일으키거나 그러진 않겠지만, ‘황실 폐지’ 정도는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루우가 ‘황실을 폐지하고 공화국으로 체제 전환을 할 때’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은 미리안이 유일하다.
그러니 그 인간들의 정권 탈취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뭐, 그 외에도 쓸모가 많긴 해.”
사회주의자들은 국가의 안쪽에서 차오르는 부패와 모순에 ‘경고’를 던져준다. 그리고 ‘개혁’의 방향을 짚어준다.
그런 점에서는 확실히 쓸모가 있다.
역사적으로 그 경고를 귀담아듣고 개혁에 착수한 제국들은 살아남았지만, 무시하고 ‘강경진압’으로 일관한 제국들은 무너졌다.
-나는 살아남는 제국의 황제가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라 자체를 사회주의 국가로 바꿀 필요는 없지.”
루우는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오늘은 이만 생각하고 자자.
곧 게레센제가 온다.
카간 자리를 둘러싼 정신없는 싸움이 시작된다.
그 전에, 쉴 수 있을 만큼 쉬어두자.
***
카라코룸, 광장.
신생 공화국의 통령 취임식이 열리고 있다.
“일흔을 앞둔 노인네를 통령이라고 내세우다니…….”
부하의 투덜거림에, 토칸은 쓰게 웃었다.
그 말이 맞긴 하다. 통령이 된 노인은 ‘명망’ 외에는 별다른 장점이랄 게 거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바로 그 ‘명망’이 중요하다. 명망 위에 ‘신생 공화국 통령’이라는 감투를 씌워주면 아주 매력적으로 변한다.
인자한 얼굴, 인자한 어조, 모두를 용서하고 감싸줄 것만 같은 그 인상.
새 통령은 자신의 무기로 끌어들일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끌어당길 것이다.
군이든, 시민이든, 관료든, 외국이든 지지를 최대한 확보하는 게 급선무다.
곧, 칸발리크와의 투쟁이 시작될 테니까.
“노망이 나서 엉뚱한 짓이나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부하의 계속된 푸념에, 일단 토칸도 끄덕였다.
“일리는 있는 말이야. 노인네들은 그 경험만큼 음흉하기도 하고, 뒤늦은 권력욕에 눈 떠서 괜히 장기집권하겠다며 정권을 불안정하게 만들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때는 그때의 대책이 있어.”
토칸의 손가락 끝이, 아주 살짝, 하얗게 변한다. 불안하게 꿈틀거린다. 부하는 그 점은 눈치채지 못한다.
그 누구도 토칸이 이단이라는 건 모른다. 토칸에게 명령을 내리는 사람들조차도. 토칸은 그저 유능한 인재, 혹은 도구일 뿐이다.
그리고 토칸도 그런 도구로 취급되길 바란다. 도구가 나름의 생각을 갖고 움직인다는 걸 들키면, 경계심을 살 뿐이니까.
“우리,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손 안에 있는 노인이야. 수상쩍은 기미를 보이면 제거하면 그뿐이다.”
이미 그런 명령이 토칸에게 내려와 있었다. 언제든 늙은 통령을 ‘노환으로 인한 사망’으로 처리 할 수 있게 대비할 것.
“그러니 일단은 새 공화국의 탄생을 축하하고, 충분히 기뻐하자고. 늘 있는 날은 아니잖아?”
사람들이 새 통령의 무슨 말을 들었는진 몰라도 박수를 친다.
토칸과 부하들도 그 박수를 따라 박수친다.
방금 새 공화국의 이름을 선보인 모양이다.
‘알타이 자유 공화국’이라는 이름을.
“우리 이름이 국호에 들어갔으니까, 너무 불만만 품진 말자고.”
그렇게 말하며 토칸은 유쾌하게 웃었다.
웃음 뒤로, 방금 확인한 또 다른 임무를 떠올린다.
신생 공화국에 복종하지 않는 위험인물들에 대한, 암살 임무다.
-이건 부하들에겐 맡길 수 없겠지.
***
‘알타이 자유 공화국’은 카라코룸을 수도로 빠르게 체제를 갖춰나갔다.
참조할 사례는 얼마든지 있었다. 100여 년 전 프랑스 혁명과 공화국부터 시작해서, 일본 공화국, 아즈텍 연방, 잉카 공화국 등.
공화국은 아니지만, 얼마 전 체제의 변혁을 꾀한 고려 제3제국도 참고할만한 사례가 된다.
이 모델들을 참고하며 ‘알타이 자유 공화국’은 정부 기관을 설치하고 제헌의회를 소집하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제헌의회는 특히, 고려의 ‘제국최고회의’를 많이 참조했다.
곧 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하지만…… 적의 강점을 받아들이는 건 그리 신기한 일은 아니다.
어쨌든 적과 싸우려면 적과 최소 대등해질 필요는 있다.
내전 시기에도 정부를 꾸려나가는 법, 나름 민주적 제도를 도입하는 방법, 총선거를 치르는 방법, 정권 내 여러 세력의 이해관계를 조절하는 방법 등.
칸발리크 구 정부와의 투쟁을 앞둔 새 정부로서는 배워야 할 점이 많았다.
내부 문제가 정리될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자 곧바로 외부 문제로 눈길을 돌린다.
사실 독자적 ‘외무성’을 뒀다면 당연히 외교를 시작해야 하는 법이다.
국경을 맞댄 카자흐, 알티샤흐르, 탕구트의 반응은 미적지근. 특사든 영사든 보낼 생각은 없었지만, 칸발리크 정부를 지원한다든가 하지도 않는다.
그 너머의 티베트, 카잔, 사마르칸드, 호레즘 역시 마찬가지다.
“뭐,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외교적 성과를 더 거뒀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은 있습니다만 그거야 어느 정도 승기를 잡아야 기대할 수 있겠죠. 어쨌든 지금은 서쪽, 서남쪽 국경이 안정됐음에 만족합시다.”
늙은 통령, 무에투켄을 상석에 앉혀둔 각료 회의는 그런 말로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