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인의 공화(9)
고려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움직이기 며칠 전.
바라트의 협력을 기대할 수 없게 된 몽골 공산당은 대안을 찾았다.
바로 고려의 동지들과 제휴하는 것이다.
“그쪽 동지들은 황제에게 협력한 덕분에 활동도 합법화되고, 의회에서 의석도 제법 확보했습니다. 현 태사 미리안은 정국의 안정을 중시해 탄압보다는 협력을 추구하죠.”
“루우 테무르 황제도 자신을 옹립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공신’들을 숙청할 수는 없으니까요. 여전히 허동주 잔당이 설치는 중인데 또 적을 만들 수도 없고.”
“하지만…… 그쪽 노선에는 큰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다들 아시겠지만.”
누군가 꺼낸 말에 다들 침묵한다.
민감하고 불편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혁명을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했다…… 그런 비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군주정과의 협력은 바라트가 제시한 노선과는 완전히 결별하겠다는 뜻과 다르지 않아요. 아시잖습니까. 바라트에서 고려의 동지들을 어떤 식으로 멸시하는지.”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국가의 완성. 그 목표를 포기하고 구체제와 협상해 점진적 개혁을 추진한다.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기로 한 고려의 공산당, 사회민주당은 ‘수정주의자’라 욕을 먹는다.
혹은 더 경멸을 담아, ‘너희는 독자적 이론도 세우지 못하는 개가 되었다’는 의미로 이렇게 불리기도 한다.
‘미리안주의자’라고.
“물론 고려 쪽은 ‘과학 이론에서 가설과 실험, 증명과 수정은 늘 있는 일. 수정을 두려워하고 죄악시하는 당신네는 과학이 아니라 종교’라고 반박하고 있죠. 그런 의미에서 바라트 쪽을 ‘교조주의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만,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우리도 고려의 동지들처럼 바라트와 결별하고 우리의 길을 걸을 것인가, 아니면 바라트와의 연대를 중시할 것인가, 그런 문제죠.”
“그렇죠.”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사회주의 세력을 등지고 외로운 길을 걷는다면, 그 부담은 상당히 크다.
당장 바라트에서 나올 지원은 모조리 끊길 것이다.
고려의 동지들은 이제 정부에서 합법적으로 지급되는 봉급이나 연금을 받기 때문에 바라트의 협박이 전혀 두렵지 않았겠지만…….
몽골은, 어떤가.
누군가 갑자기 웃는다. 심각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었기에 누군가는 눈총을 보내고, 또 누군가는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낸다.
왜 웃는 걸까.
웃음을 터트린 사람은, 바라트 쪽 소식이나 혁명 최전선의 소식을 전해줬던 동지, ‘무당’이다.
“아니, 아니 생각해보시오, 동지들. 실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요. 바라트와 결별한다고 해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지. ‘이미 바라트와 결별한 동지들’을 우리 편으로 삼으면 될 일 아니오?”
사람들의 얼굴에 의아함과 이해가 동시에 퍼져나간다.
“바라트와 다른 길을 걷겠다, 이건 당연히 군주정을 인정하고, 우리도 입헌군주정의 한 축으로 자리 잡는다는 말이오.”
“그렇군. 앞서 이야기했지만 어쨌든 칸발리크 정부를 지지하기로 하면 칸발리크 정부도 대가를 내놓을 겁니다.”
“고려의 사례를 모범으로 삼아 우리도 한 단계 더 진보할 수 있소. 누가 몽골의 새 군주가 되든.”
“그런데…… 예를 들어 게레센제나 울제이 중 하나가 카간이 될 경우, 고려의 동지들과 대립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아니…… 아, 그런 건가?”
“그렇소. 이제야 이해하는구먼.”
‘무당’의 얼굴에 득의양양한 미소가 떠오른다.
“우리는 루우 테무르를 지지하고, 그녀의 즉위를 지원하는 거요. 우리도 ‘공신’이 됩시다. 그러면 고려의 동지들과 연계는 자연스레 이뤄질 것이고, 게레센제나 울제이를 지원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지분을 얻어낼 수 있겠지.”
인민들의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사람들이 ‘군주의 공신이 된다’는 건 꺼림칙한 일이다.
그러나…… 궁극적 혁명 완수를 향한 과정이라면 그 정도는 타협할 수 있지 않을까.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을 하나의 성공사례라고 본다면, 고려 공산당이나 사회민주당도 ‘성공사례’라고 보지 못할 이유는 없잖은가?
다른 남자가 무겁게 입을 연다.
“상당히 명쾌한 안이긴 합니다. 신정부를 지지했을 때와 달리 쓸모가 다했다고 숙청당할 염려도 적겠죠.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아직 ‘쿠릴타이’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남자가 말하는 쿠릴타이는 근대 들어서 확장된 ‘의회’라는 의미보다, ‘카간 선출을 위한 회의’라는 전통적 의미에 가깝다.
“아직 칸발리크 정부가 누구를 즉위시킬지는 정해지지 않았다는 말이죠. 루우 테무르가 즉위한다면 지금 나온 말대로 일을 진행하는 게 좋겠습니다만, 게레센제나 울제이가 즉위한다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두 형제 중 한쪽이 카간이 된다면 고려와는 틀림없이 대립 관계로 들어설 것이다. 그들의 성향이 루우 테무르나 미리안 같을 거라 낙관하기도 어렵다.
무엇보다도 몽골의 현 타이시, 볼로드가 미리안과 같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거기에 또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몽골 내부의 문제에 신경이 쏠려 있는데, 몽골의 변화는 틀림없이 동아시아, 더 나아가 세계정세의 변화를 가져올 겁니다.”
누가 군주가 되든 두 나라의 통합이 이루어진다. 몽골과 고려, 몽골과 키타이, 몽골과 낭키아스. 어떤 식이든 큰 변화다.
“이런 변화 속에서도 우리가 살아남을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는 거죠.”
사회를 맡은 남자가 다시 한번 ‘자, 자’하며 논의를 정리했다. 누가 보기에도 더 생산적인 의견이 나오긴 힘들게 됐으니까.
‘만약에 이렇다면, 저렇다면 어떻게 할까’의 무한 반복일 뿐이다.
“루우 테무르가 즉위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라는 식으로 의견이 모이는 것 같군요.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 즉위를 어떻게 지원할지는 차차 논의해봅시다. 고려 쪽 동지들과 연락을 취해 봐야 구체적인 안이 나오겠죠.”
“물론 상황 변화에 따라, 신정부를 지지하는 안이나 단독 혁명 노선도 선택할 수 있음은 기억해야 할 겁니다. 늘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네, 동지의 말도 옳습니다. 오늘은 이쯤에서 해산하고, 일단은 변화를 지켜봅시다. 칸발리크의 ‘쿠릴타이’가 누구를 지지하는지 지켜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
몽골 공산당이 고려 공산당에 접근.
‘루우 테무르의 카간 즉위를 지지하는 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 묻자마자, 고려 내 범좌익이 요동쳤다.
-우리 쪽에서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논의를 밀어붙이자!
이러한 정치적 계산 아래,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은 루우의 카간위 계승 지지를 선언한 것이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태사 미리안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상황.
‘폐하께서 원하신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어쨌든 루우의 카간위 계승을 지지하겠다는 라디오 방송을 내보냈다.
“아직 이르기도 하고, 이런 표현이 적절한 지도 모르겠지만, ‘잘됐다’고 말하고 싶은데.”
칸발리크에서 루우와 함께 그 라디오 방송을 들은 직후, 견하는 그렇게 말했다.
효윤도, 수영도 루우의 눈치를 살핀다.
루우는 마음을 얼마나 추슬렀을까.
“……지지는 고맙지만 당장 카간이 되진 않을 예정인데. 찬물을 끼얹는 건 아닐지 모르겠어.”
한참 만에야 소녀는 그 가는 목덜미를 당당하게 세우며, 그렇게 답했다.
효윤과 수영은 안도한 표정이 되고, 견하는 살짝 미소를 띤다.
“다소 찬물을 끼얹긴 하겠지. 하지만 그렇게 잃는 것보단 얻는 게 더 커.”
기껏 지지해줬는데 ‘당장은 카간 자리까지 겸할 생각은 없습니다’라고 하면 실망하긴 할 것이다.
“그렇지만 정치권에서 오가는 말과, 민중들이 아는 정보 사이엔 차이가 있다는 점을 잘 생각해야 해.”
“하긴 국민들에겐 카간위 계승 문제는 이제 막 제시된 참이니까.”
시레문이 죽었다는 몽골의 소식이 고려 내에 퍼지고, 그에 대해 국민들이 판단할 시간이 필요하다.
시레문의 딸…… 루우가 그 자리를 잇는 게 맞지 않는가? 혹은 그게 우리나라에 좋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떠오를 시간.
“그런 면에서 이번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지지 선언은 큰 의미가 있어. 국민들은 정치권에서 저런 이야기가 나오는구나, 하고 일단 관심을 보이겠지.”
물론 이번 일을 통해 두 정당도 지지율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서로에게 좋은 일이다.
“그렇게 차근차근 ‘분위기를 고조시켜 나가는’ 게 중요해. 이번에 우리가 노리는 건 바로 그거야.”
“게레센제 칸이 카간이 된다면 그런 여론이나 움직임에 대해 항의하지 않을까?”
효윤이 묻자 견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저었다.
“다소간 항의는 있을 수 있겠지만 적극적으로는 못 할 거야. 자신의 황위가 루우의 지지 덕분이라는 걸 아는 데 그러진 못하겠지.”
또한 루우를 비롯한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의 추진파들은 칸발리크의 실권 역시 상당히 장악할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정면에서 저항하긴 힘들 테고, 대신 물밑에서 뭔가 작업을 벌일 거야. 그건 경계해야지.”
그보다도, 라며 견하는 말을 이었다.
“게레센제에게 카간 자리를 양보했다, 그 상황이 끼칠 영향을 최대한 이용해야지.”
“영향을 끼친다면……”
수영이 입을 연다.
“고려의 국민들이, ‘우리 폐하의 카간위를 빼앗겼다’고 분개하기를 기다린다는 거야?”
천손민족협회, 감찰국에서 일한 경험이 어디 가진 않은 모양이다.
견하는 망설임 없이 긍정했다.
“맞아.”
세 소녀는 각기 ‘역시’라는 표정을 짓는다.
수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효윤은 골 아프다는 듯, 루우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루우는 카간이 되고 싶다…… 이를 이루려면 먼저 권력 핵심들의 동의와 지원이 필요하지. 하지만 만장일치를 얻어낼 순 없어.”
그건 불가능한 꿈이다.
“그렇다면 다른 데서 힘을 끌어오는 수밖에 없어. 바로 ‘국민의 열망’이지.”
내전을 거치면서 고려는 국민에게 투표권을 주었다.
국민의 의향을 정책에 반영하고, 국민의 표를 정치인들이 신경쓸 수밖에 없는 구조로 변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국민이 루우의 카간 즉위를 원하게 만들면’, 강제로라도 정치권을 움직이는 일 역시 가능하다.
“게레센제가 카간으로 분투하는 동안, 우리는 그 열망을 부추기며 때를 기다릴 거야.”
***
루우를 제외한 세 사람은 각자 칸발리크 황궁에서 배정받은 방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효윤은, 수영과 떨어지자마자 견하의 손목을 붙들었다.
왼팔이다. 기분 탓인지 붕대 너머의 살갗이 차디찬 것 같다.
긴 포니테일이 흔들린다. 강렬하게 쏘아보는 소녀의 시선이 견하의 미간을 꿰뚫을 듯 날아온다.
“리안 언니도 알아?”
소년은 아까와 달리, 곧바로 대답하지 못한다.
“어쩔 생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