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인의 공화(8)
“바라트 공산당은 어떤 입장입니까? 그쪽에서 뭔가 지도 사항이 나온 건 없습니까?”
공식적으로는 이들 세력 사이에 상하 관계는 없다.
그러나 바라트는 세계 최초로 혁명을 성공시킨 국가다. 그래서 혁명의 고향이라 불리기도 한다. 페르시아를 비롯한 주변국으로 열심히 혁명을 확산시키고 있기도 하고.
그러니 ‘최초의 성공사례’를 보유한 선배들로서, 혹은 스승으로서 동지들에게 교훈을 전달할 의무를 진다.
혁명가들은 누구나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잘 모르는 사람에게 정보를 공유한다. 그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으며, 언제든 변할 수 있다.
초기 혁명의 위대한 선배들은 그랬다.
하지만…… 시간은 그런 관계를 변질시키기 마련이다. 정보의 불균등은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바라트가 국력을 회복하고 점점 더 강해져 갈수록, 바라트 공산당의 선배들이 은퇴하고 후배들이 새로 들어올수록 그런 경향은 강해진다.
게다가 이 ‘후배’ 세대들은 혁명가로서 경력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 ‘당의 관료’로서 경력을 시작한다.
당연히 저들의 태도는 동지들을 대하는 게 아니라 해외의 위성 조직을 대하는 듯한 냄새를 강하게 풍길 수밖에.
많은 혁명가들이 바라트의 그런 태도에 불쾌감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기댈 수 있는 줄은 혁명에 이미 성공한 나라뿐이다.
아니꼬워도 일단은 어엿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때까지 참아야지 어쩌겠는가.
그 문의 결과를 알고 있는 ‘무당’이 다시 입을 연다.
내용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별다른 지침은 아직 없소. 검토중…… 이라는 것 정도.”
“몽골의 정세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갑니다. 시급을 요하는 일인데 언제까지 ‘검토중’이라고만 할 셈이랍니까?”
누군가 그간의 불만을 섞어 말하자, 무당은 ‘깡패’에게서 들은 바라트의 사정을 이야기한다.
“바라트 쪽에서도 예측하지 못한 사태라. 지금까지는 아즈텍 연방에서 일어날 혁명에만 집중하고 있었는지……, 몽골에서 먼저 혁명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 못 한 모양이오.”
“아즈텍…… 이라.”
바라트 공산당에 대한 섭섭함이야 둘째 치고, 이해할 수는 있다는 반응들이 나왔다.
세계 제1의 경제 대국에서 시작된 대공황.
그리고 테러, 그에 따른 정국의 혼란. 고려에서 보낸 특사들이 ‘아즈텍의 내전이 머지않은 것 같다’고 입을 모았듯이, 다른 나라들도 그렇게 내다보고 있었다.
예상외의 사태가 몽골에서 먼저 터져버렸을 뿐.
“언제든 아즈텍 문제에 개입, 세계에서 가장 든든한 혁명 동지를 키워낼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우리 쪽에서 혁명 지원을 요청하니 당황스럽긴 했겠지.”
인력과 물자는 한정되어 있다. 아즈텍에 지원할 것들을 그대로 둔 채, 몽골 쪽에 보낼 사람이나 물자를 새로 뽑는 건 바라트로서도 부담이 크다.
자연히 아즈텍에 보낼 자원을 몽골 쪽으로 돌리자는 의견이 나오게 된다.
“그쪽도 그쪽 나름대로 토론이 이어지겠군요.”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그렇듯이, 바라트에서도 주장과 반박이 격렬하게 오갈 것이다.
몽골 혁명의 성공 가능성은 어떻게 되는가, 지원할 가치는 있는가, 아즈텍에 갈 자원을 몽골 쪽으로 돌리는 바람에 아즈텍 혁명이 실패한다면?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둘 다 놓치는 것은 아닌가?
그러면 이런 반박이 돌아온다. 아즈텍이 혼란스럽다곤 해도 아즈텍 정부가 바보들 집합소도 아니고 상황을 수습해낼 수 있지 않을까?
아즈텍 쪽 동지들을 전폭 지원했을 때 혁명이 성공한다는 보장은 있는가?
태평양 건너편의 동지들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가까운 아시아 대륙의 동지들을 지원하는 게 옳지 않을까?
쉽사리 결정할 수는 없는 문제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만 간다.
“그런 사정을 이해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렇다고 무작정 바라트 동지들의 결정만 기다리고 있을 순 없는 노릇 아닙니까.”
“단독 혁명은 보류…… 우리는 이렇게 가닥을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젠가는 카라코룸과 칸발리크 사이의 경쟁처럼, 우리도 양강 구도를 만들어 혁명에 임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고려 같은 삼파전 양상은 피하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의견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아쉽지만 단독 혁명은 잠시 접어둘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세 번째 안 말인데, 현 정부와의 협력…… 이건 어떻게들 보십니까?”
누군가 ‘군주정과 협력이라니, 생각할 가치도 없소’라고 소리쳤지만 그리 동조를 얻진 못했다.
생각해볼 가치가 충분했으니까.
이 역시, 전례가 있다.
“고려의 동지들은 제3제국의 새로운 황실에 충성하는 대가로 상당한 지분과 개혁을 얻어냈죠.”
***
리안은 오랜만에 상쾌한 얼굴로 햇볕을 쬐었다.
삼엄한 경호 속에 있었지만, 그 사실을 머릿속에서 지우는 건 어렵지 않다. 익숙하다면 더더욱.
마치 제국최고회의에 관람객으로 들어온 여대생이라도 된 것 마냥, 리안은 밝게 웃었다.
그런 그녀를 따라오던 세규도 웃음 짓는다.
“생각보다 깔끔하게 정리됐습니다.”
“외무장관님께서 함께 ‘대세’를 이뤄주신 덕분이죠.”
제국입헌당과 고려국민당의 두 당수는 조금 전 ‘고려군의 해외 주둔 제한에 관한 법’을 통과시키고 나오는 길이다.
“이걸로 조유관의 움직임에 상당한 제약을 가할 수 있을 겁니다.”
세규의 말대로, 이 법은 단순히 이름처럼 ‘군의 주둔에 관한’ 것만 다루진 않는다.
“군이 멋대로 ‘정치적 판단’을 하거나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시도를 근본부터 막는 시스템…….”
전선 지휘관의 판단을 우선하던 오랜 전통을 철폐하고, 융통성 없을 정도로 빡빡한 통제를 가한다.
태사부, 제국최고회의의 승인으로 이루어진 이중 족쇄.
물론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멋대로 군을 움직이는 행위는 애초에 반역으로 간주되지만, 이번 법은 이를 명명백백하게 글자로 박아넣은 것이다.
“단순히 반역이라고 규정할 뿐만 아니라, ‘진압의 의무’를 삽입한 건 꽤 괜찮았어요.”
리안의 세규의 발상에 찬사를 보냈다.
그렇다. 멋대로 날뛰는 군인을 향해 반역자라고 말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어떻게 그 반역자들을 때려잡을 것인가, 다.
“보통 반역 행위는 돌발상황이기 때문에, 대처 방법은 제대로 확립되지 않기 마련이죠.”
있더라도 모호하거나, 아예 쓰이지 않기도 한다.
원칙이 그렇다고 해도 정치가 중 ‘유혈사태는 피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머저리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 놈들이 쉽게 반란군과 타협, 정권을 내주기도 한다.
“머저리의 등장을 막고, 전 국민을 반란 진압에 강제로 동원하는 법. 그리하여 반란을 꿈꾸던 인간들에게 그 꿈을 접으라고 말하는 법.”
허동주와 치렀던 내전의 교훈 이 법의 초석이 되었다.
법이 효력을 발휘하면 온 국가가 반역자로 규정된 군부대를 없애기 위해 움직인다.
주변 부대에는 당연히 그럴 의무가 주어지고, 반역 부대의 모든 장병들에겐 ‘상관을 살해할 의무’가 주어진다.
철저하게 군을 옥죄는 체제.
“이렇게 되면 법이라기보다는 행동지침이나 작전계획에 가깝겠습니다만…….”
“실제로 발동될 가능성은 거의 없겠죠. 법이 가하는 압박이 워낙 크니까요.”
“그렇기는 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법 집행을 어떻게 더 세부적으로 보완해나갈까 하는 점입니다.”
법이 유명무실해지지 않으려면 강제성이 있어야 한다.
다소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일 정도로 잔인할지라도.
“그 문제는…… 차차 생각해보도록 하죠.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하고.”
리안의 말에 세규가 끄덕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동시에 머릿속에 같은 생각을 떠올린다.
-바라트 같은, 정치장교 제도라든가……?
리안은 거기서 더 나아가, 그 역할을 맡을 후보도 떠올린다.
-견하에게 맡긴다면……?
이를테면, 군사정치지도국 같은 걸 만들어서.
그러면 지금 고려 제3제국의 확장이라는 목표를 향해 뛰는 견하를, 통제할 수도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라도, 그녀의 소년은 자기 일은 열심히 하는 사람이니까.
견하가 다이온 연방의 결성과 카라코룸 천도가 리안을 위한 일이라고 믿듯이,
리안도 이게 견하를 위한 길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군벌 국가적 전통을 폐기하고 어엿한 일반 국가로 나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각자…… 그렇게 믿는 대로 움직인다.
***
그러나 상쾌한 안심 속에 집무실로 돌아온 리안 앞에는, 얼굴이 구겨질 만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즉각 각료회의가 소집된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이거.”
각료들 앞에서 리안은 보고서를 흔들었다.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우리 폐하의 몽골 황위 계승을 지지한다고 발표했다니요.”
각료들은 난감한 얼굴이 되어 서로를 바라본다.
특히 고려민국 임시정부에서 그들과 함께했었던 안세규가 곤혹스런 표정을 짓는다.
“허를…… 찔렸습니다. 공산당이나 사회민주당은 군주정과는 거리가 멀다고만 생각해서 이런 식의 행동을 벌일 거라고는…….”
다른 각료들도 이해한다는 표정을 짓는다.
리안은 집무실에 있을 때보다는 평온한 표정이다.
하지만 한 손으로 목을 잡고, 피곤하다는 듯 돌리는 그 모습에서 짜증이 짙게 풍긴다.
“그 어떤 정당도 폐하의 몽골 황위 계승을 정면에서 반대할 수는 없죠.”
리안의 말에, 류성일이 동의를 표한다.
“각하의 말씀대로입니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간접적으로 압박하는 방식을 택했어요.”
그래서 만든 게 ‘고려군의 해외 주둔 제한에 관한 법’이다.
“하지만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정면에서 당당하게 황제 지지를 선언해올 줄이야…….”
상상하지 못한 묘수다.
그리고 매우 효과적인 공격이다.
“그들의 움직임 뒤에는 역시 폐하가…… 아니, 그렇진 않겠죠.”
루우에게 공산당이나 사회민주당을 움직일만한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하긴 어렵다.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고 봐야겠군요.”
무슨 거래일까. ……뭐 그건 차차 밝혀질 테고.
조유관이나 몽골 쪽 움직임만 신경 쓰느라, 국내 공산당이나 사회민주당의 움직임을 살피는 데는 소홀했다.
“의석은 적다고 해도 일단 국민들 앞에 공식적으로 지지를 선언하고 나선 이상, 우리도 뭔가 입장 표명은 해야겠죠.”
이번 일은 교훈으로 삼는다. 다음에는 방심하지 않을 것이다.
리안은 굳은 표정으로 서서, 책상에 시선을 떨군 채 말했다.
“몽골 황위 계승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서는 패배를 인정하자.
되돌릴 수 없는 걸 되돌리겠다고 억지를 부리면, 상황만 계속 나빠질 뿐이다.
일단 물러서서, 반격의 방법을 생각하자. 아니면 적어도 방어선은 만들자.
“그러나 고려의 독립성은 지켜져야 합니다.”
그게 리안이 내세울 수 있는 새로운 명분이었다.
“폐하가 몽골과 고려, 두 나라의 황위를 겸하시도록 한다. 태사 이하 정부 각료들의 의사는 그러하다고 발표합시다. 다만,”
리안은 말을 멈추고, 시선을 들어 각료들을 바라본다.
짜증은 가시고, 힘있는 눈빛이 돌아왔다.
“두 나라의 완전 합병은 안 됩니다. 우리는 몽골의 일부가 되진 않을 겁니다.”